#78화. 飛者上有跨者(비자상유과자)
은률은 장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뜬금없는 여자의 등장은 뭐며, 고유생은 왜 숨겼는가? 그의 상식 안에서는 도저히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고유생은 이미 일흔을 바라보는 노인인데 여인을 숨기다니요? 또한, 깊숙한 내부까지 들어온 여인이라면 선운검파의 제자가 아닙니까?”
고유생은 감투에 욕심이 많은 노인이지만 여색을 탐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무림인들이 가득 모인 잔칫날을 잡아 굳이 추잡한 일을 벌일 리 만무했다.
“선운검파의 제자는 확실히 아니었다. 물론 음란한 짓을 하려던 것도 아니었어. 상대를 아주 작살 내려고 작정한 듯했으니까. 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벌써 저세상으로 보냈을지도 모르지.”
“그럼 원한이 있는 상대라는 건데, 고유생이 젊은 여인과 맞붙어 싸울 일이 있습니까?”
장은은 한쪽으로 입술을 쭉 밀어 올렸다. 당연히 누구인지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형진을 쫓아와 운선을 구한 여인. 그녀의 검만 보아도 검선의 유일 제자 주운이라는 사실을 모를 수 없었다.
“어쩌면 아주 큰 미끼가 될 수도 있지.”
그러나 굳이 은률에게 말해 줄 이유는 없었다. 그는 천재적인 검객이었으나 입이 가볍고 생각이 얕은 편이었다. 수하로 부리기에는 더할 나위 없지만, 자율적인 임무를 맡기는 데에는 믿음이 가지 않았다. 지금 장은의 머릿속에 있는 어떤 계획을 말해준다고 해봤자, 일을 그르치면 그르쳤지 도움이 될 리 없었다.
“고사숙을 어찌 요리할지는 차차 생각해보자꾸나. 아무튼, 준비는 잘 되어 가느냐?”
은률은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적잖이 당황했다. 이번에도 사형은 자신과 의논할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따져 물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스스로 생각해서 답을 구할 수 없을 테니까. 무조건 사형의 명을 따르면 만사가 편했다.
그에게 장은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하여, 그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었다. 운선을 놓아준 사형에게 자못 서운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손가락 따위 잘린 게 무슨 대수라고.
“용문파가 돌아가는 길목에 십수 명씩 자객을 배치했습니다. 마교의 기괴한 탈을 구해 놓았으니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의심이 향할 것입니다.”
“흐음.”
태을신교와 직접 대면한 적이 있는 두타공파를 제외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특히 용송현은 성정이 불같고 참을성이 없으므로 금세 태을신교의 도발이라 생각할 게 뻔했다.
“소소정이 문젠데…….”
“그러게 말입니다.”
그녀는 겉으로는 세상 온화하고 친절해 보이지만, 오대산검의 그 누구보다 심계(心計)가 깊은 이였다. 허투루 준비했다가는 다 들통날지 모르니 신중해야 했다.
“우리는 의심의 불씨만 심어두면 된다. 아이들에게 단단히 입단속을 시켜라.”
“네.”
두 사람의 밀담(密談)은 여기까지였다. 장은은 하루를 꼴딱 새웠으므로 피곤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오전 접대는 은률에게 부탁하고 처소로 돌아가 잠시라도 눈을 붙일 생각이었다.
한편,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엿들은 운선은 마음이 복잡했다. 그들의 음모는 용문파를 공격하여 태을신교에 죄를 덮어씌우는 것. 그다음은 뻔했다. 이유를 만들었으니 분란의 원인을 제거하면 된다. 물론 그 선봉장은 이미 정해져 있을 것이다. 무림 맹주 조양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황석파의 새로운 장문, 장은.
그러나 운선은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었다. 서둘러 성곤에게 보고해야 하겠지만, 지금은 불가능했다. 이번에도 주운을 버려둔다면 짐승과 뭐가 다를까? 무엇보다 그의 마음속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는 신교의 형제들이 아니라 주운이었다.
‘아직 구할 수 있다. 크게 다쳤을지언정 살아는 있다. 이용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으니 함부로 목숨을 앗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 잔인한 늙은이가 데리고 있다면 어떤 곤욕을 치르고 있을지 모른다. 더 험한 일을 당하기 전에 빨리 구해야 한다.’
우선 고유생을 찾아야 했다. 어디에 숨겼는지는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운선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만약 주운이 회생 불가한 상태라면 그 늙은이의 몸을 갈가리 찢어버리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이런…….”
장은이 졸고 있는 틈을 타 지붕에서 내려오려는 찰나였다. 웬 예쁘장한 소녀가 안뜰을 가로질러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목적지가 정은률의 처소인 것 같았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일각만 더 기다려야겠다.’
초조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운선은 다시금 지붕 위에 납작 엎드렸다. 낯선 방문객 때문에 장은이 바짝 긴장할 테니, 미세한 움직임에도 발각될 수 있었다.
“하아.”
가은은 문 앞에 서서 크게 날숨을 뱉었다. 어제 인경을 향해 인정사정없이 검을 휘두르던 은률의 모습이 생각나자, 숨이 잘 안 쉬어졌다. 그러나 두려움을 이겨내야 했다. 이보다 더 확실하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방법은 없었다.
똑, 똑똑.
“누구냐?”
날카로운 목소리에 어깨를 움찔했으나, 곧 마음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소녀, 정공자님을 뵈러 왔습니다.”
예상치 못한 가냘픈 목소리에 은률은 흠칫 놀랐다. 이 깊숙한 곳까지 찾아올 정도면 적어도 오대산검의 제자일 텐데 여인이라면 역시 선운검파밖에 없었다.
“나를 찾아올 일이 있나?”
졸고 있던 장은도 본래의 매서운 눈빛으로 돌아와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장로급이 아니라면 감히 은률의 방문을 두드릴 배짱이 없을 터였다.
“혹시 무슨 일이 생겼는가?”
문 쪽으로 향하는 은률의 발걸음이 사뭇 조심스러웠다. 이미 왼손에는 예리한 단검을 쥐고 있었다. 장은 역시 바짝 긴장하여 병풍 뒤에 몸을 반쯤 숨겼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끼이익!
문을 두드린 이의 정체를 확인한 은률은, 자신도 모르게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야말로 상상하지도 못한 인물이었다.
“너는?”
가은은 문이 열리자마자 곧바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되도록 상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정공자, 소녀는 운평 약초꾼 가씨 노인의 여식 은이라 하옵니다. 공자님께 드릴 것이 있어 이리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아니, 민가에 사는 처자가 어찌 여기에? 이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오!”
상대가 너무나 연약하고 볼품없는지라,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여인과 대화를 해본 경험이 없는 은률은 괜히 인상을 쓰고 어조를 높였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감히 그럴 만한 사정이 있으니 바로 내치지 마시고 말씀 좀 들어주세요.”
가은의 가냘픈 어깨가 두려움으로 바르르 떨렸다. 또한, 크고 동그란 눈에는 맑은 눈물방울이 맺혔다. 은률을 향해 눈을 한번 깜빡이자 마치 처마에 고였던 빗물처럼 주르륵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처량 맞은 지, 웬만한 냉혈한이 아니고서야 쉽사리 내치기 어려웠다.
“조실부모하고 원용당에 팔려갈 처지에 놓인 저는, 그들을 피해 황석산에 올랐습니다. 무림인들 사이에 섞여 어찌어찌 여기까지 딸려왔고요. 그런데 우연히 평소 흠모하던 정공자님의 위용을 뵐 수 있었습니다. 제 필생의 행운을 다 써버린 것이지요. 그것만으로도 만족하였는데, 그만 제가 감당할 수 없는 무엇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여, 위험을 감수하고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물론 찬찬히 생각해보면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았다. 우선, 일행이 없이는 결코 어린 낭자가 혼자 황석파에 들어올 수 없었다. 또한, 강호인이 아니라면 정은률의 위명을 들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판단력을 잃은 지 오래였다. 소녀의 간절한 호소를 듣는 순간, 마음을 온통 빼앗겨 생각까지 꽁꽁 얼어붙고 말았다. 세상 냉혈한 검객이 여인 앞에서는 그야말로 숙맥이 되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이게 다 스물이 한참 지났는데도 여인과 손도 못 잡아본 그의 외로운 팔자 탓이었다.
‘저 멍청한 녀석!’
안쪽에서 듣고 있던 장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도 일단 위협이 될 것 같지는 않으니 나서지 않고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어, 아, 그래서 줄 게 뭐요?”
이제는 되레 은률이 말을 더듬고 있었다. 그의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흘끗 훔쳐본 가은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반신반의했건만, 자신의 천애 고아 연기가 잘 먹힌 것 같았다.
“이거…….”
가은은 가슴 춤에 손을 넣어 조심조심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수련이 수놓아진 손수건이었다.
“이게 무슨?”
“이 안에 공자님의 소중한 것이 있으니 조심히 펼쳐 보세요.”
마침내 가은이 손수건을 건네자, 은률은 퍽 미심쩍은 얼굴로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곧 한겹 한겹 손수건을 개켰다.
“헉!”
손수건 안을 들여다보는 은률의 얼굴이 금세 상기되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한쪽으로 몸이 기우뚱하여 하마터면 넘어질 뻔하였다.
“공자님의 귀한 옥체가 굴러다니는 걸 볼 수 없어 소중히 간직해 두었습니다. 감히 도를 지나친 행동이라 생각하시면 죽여주세요.”
가은은 몸을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차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여차하면 도망갈 생각에 계속 퇴로를 살피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하아…….”
은률은 몸을 돌려 장은이 있는 병풍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가득 차 있었다. 더는 모른 체할 수 없었던 장은은 그제야 천천히 다가와 손수건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그것은 손가락이었다. 운선이 던진 곶감 꼭지에 잘린 은률의 손가락. 여전히 흙먼지가 묻은 채 하얀 손수건 위에 놓여 있는 그것은, 현실감이 없어 마치 희구처럼 보였다. 몸에서 분리된 지 벌써 하루 가까이 된 지라, 잘린 단면에서는 이미 부패가 시작되는 중이었다. 그 악취 때문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낭자는 어디 문파입니까?”
장은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더니, 가은의 머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막상 얼굴을 마주하자 왜 아우가 얼어붙었는지 알 만했다. 시골 처자라기에는 꽤 반반한 미모였다. 어째서 원용당이 노렸는지도 단번에 이해가 갔다.
황석파의 장문을 만났는데도 가은은 주눅 들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장점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순진하고 해맑은 소녀의 눈망울이 장은을 향해 도르륵 움직였다.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함이었다.
“저는 문파가 없습니다. 다만 제 사정을 우연히 들은 선자님 한 분이 도와주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감히 월권이었다면 벌을 내려주세요.”
은률은 한참 동안 가은을 내려다보았다. 이 상황이 두려운지, 연신 몸을 떠는 양이 여간 안쓰럽지 않았다. 무엇보다 버려진 손가락을 이리 소중하게 간직하고 가져다주다니 감동이었다. 그러나 이 고마움을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까?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저 이런 일에 능숙한 사형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장은은 아우의 표정만으로도 그의 마음을 다 읽어 내었다. 이제부터 자신이 나설 차례라는 것도. 수많은 말은 꿀꺽 삼키고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벌을 주다니요. 상을 주어도 모자랄 텐데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여 보답을 하고 싶은데, 혹시 원하는 것이 있나요?”
장은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에는 사람을 안심시키는 무엇이 있었다. 가은 역시 금세 얼굴이 밝아져서는 몸을 천천히 일으켜 앉았다.
“따로 원하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저를 도와주셨던 선자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동행해 주시겠습니까?”
“아아, 당연하지요. 너도 함께 가자꾸나.”
장은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흔쾌히 승낙했다. 그리고는 뻣뻣하게 굳은 그의 등을 떠밀어 앞장서는 가은의 뒤에 바짝 붙였다. 이제부터 아주 재밌는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에 몹시 흥분되었다.
‘이 아이가 말하는 선자는 분명 선운검파의 제자일 터. 만약 그들이 부러 소녀를 이용했다면 나를 떠보기 위한 작전일 것이다. 그러나 혹시라도 선운검파의 눈에 들고자 한 이 소녀의 단독 행동이라면……?’
가은의 애처로운 등 뒤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장은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 비자상유과자(飛者上有跨者):
나는 놈 위에 걸터앉는 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