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77화 (77/209)

#77화. 可欺以方(가기이방)

불과 한 시진 동안 일어난 일이었으나 영인에게는 꼬박 하루를 보낸 기분이었다. 못마땅하게 자신을 노려보는 스승을 보니, 그나마도 이 악몽이 마무리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여, 그 아이를 데려왔느냐?”

“네.”

드디어 데려오라는 명이 떨어지자 영인의 얼굴이 활짝 폈다. 마음의 큰 짐을 내려놓으니 기분이 급격히 좋아졌다.

“저는 약초꾼 가씨의 여식, 은이라 하옵니다. 존경하는 선운검파의 문주님을 뵙습니다.”

예의범절을 제대로 배워본 적 없는 가은은, 그저 몸을 최대한 숙이면 되는 줄 알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흙과 토사물로 범벅이 된 얼굴은 그야말로 거지와 다르지 않았다.

“해윤이 먹은 음식에 독이 있다는 건 어찌 알았나요?”

소정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친절했으나 감정이 담기지 않았다. 묘하게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말투였다. 그러나 가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자신의 꾀가 통했다는 사실에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황석산의 약초꾼이셨습니다. 웬만한 풀들은 싹 다 알려주셨는데 그중에는 독성이 강하다며 주의하라 알려주신 풀이 있었지요. 선자님이 드신 지리강활은 뿌리를 먹으면 경련이 일고 눈동자가 돌아갑니다. 녹두를 푼 물을 마셔 속을 게워내면 해독에 탁월하여 그리 한 것입니다.”

“흐음. 지리강활이라…….”

소정은 생각에 빠진 듯, 옅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 탓에 마음이 급해진 가은이 서둘러 덧붙였다.

“사실 지리강활은 경국의 땅에서는 구하기 어렵답니다. 전 려국 땅, 특히 특정 산에서 잘 자라지요. 하여 그 산의 이름을 따 지리강활이라 부릅니다. 소녀, 감히 추측하건대, 태을신교의 소행이 아닌가 싶습니다.”

뜻밖의 말에 놀란 이는 소정이 아니라 영인이었다. 안 그래도 신교의 소마두가 나타나 심란한 중에, 독살 시도라니? 사뭇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 흐음…….”

반면 소정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가만히 가은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영인아, 전병을 가져온 시동은 찾았느냐?”

“그게…….”

안 그래도 상황이 수습된 후에 가장 먼저 한 일이 그것이었다. 시동을 찾아 어찌 된 연유인지 밝혀야 황석파와 오해가 안 생기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음식을 가져다준 시동은 찾지 못했습니다. 인상착의 또한 특징적이지 않아 한 명씩 대질하여 확인해 보아야 겨우 알아볼 듯합니다. 날이 밝는 대로 찾아내어 보고하겠습니다.”

성과 없는 보고를 하려니 부끄럽고 죄송스러웠다. 영인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차마 들지 못하고 사부의 다음 명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럴 필요 없다.”

“네?”

“시동을 찾을 필요 없다는 뜻이다.”

“허나, 사부님. 이 아이의 말처럼 정말 독살 시도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태을신교가 개입한 게 아닙니까?”

이해할 수 없는 지시에 영인은 자못 당황하였다. 그동안 누구보다 태을신교라면 이를 부득부득 가는 스승이었기에 더 믿기 힘들기도 했다.

“걱정하지 말고 가보아라. 이 아이는 내가 알아서 하마.”

그러나 소소정은 그 이상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이러쿵저러쿵 설명하기도 귀찮아 보였다.

“네.”

영인은 의구심을 풀지 못한 채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스승이 이렇게 정색하며 명할 때는 버텨봐야 소용이 없었다. 평소에 온화한 그녀였지만, 화를 낼 때만큼은 단호하고 매정했다.

‘저 아이는 괜찮은 걸까?’

영인은 물러나는 끝에도 소녀의 뒷모습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사정이 안쓰럽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도울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다. 끝까지 책임지지도 않을 거면서 섣불리 손을 내미는 짓이야말로 오만이요, 가식이었다.

“목적이 무엇입니까?”

“네?”

이윽고 둘만 남게 되자 소정의 태도가 확 바뀌었다. 서늘한 표정으로 툭 던지는 말투는 비아냥 같기도 했다.

“우리를 도운 진짜 목적 말입니다.”

“저는 선운검파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가은은 긴장하여 입안이 바싹 말랐다. 마른 침을 여러 번 꿀꺽 삼켰으나 여전히 목이 말랐다. 원용당 무뢰배 앞에서도 두렵지 않았건만, 소소정의 발밑에서는 마치 자신이 하찮은 벌레가 된 것 같았다.

“이런 일까지 벌였는데도 안 받아주면 그다음엔 무엇을 할 작정입니까?”

그제야 가은은 깨달았다. 다 꿰뚫어 보고 있구나. 천천히 고개를 들어 소소정의 눈을 보았다. 우물처럼 깊고 검은 눈동자에는 경멸과 조롱의 빛이 담겨 있었다.

‘이제 어떡하지?’

긴장의 끈을 놓치자, 맥이 탁 풀렸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계획이었는데 어떻게 눈치챘는지 이상하기만 했다.

“어찌 아셨습니까?”

가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몸에 묻은 흙을 툭툭 털었다. 어차피 이 사람에게는 신세 한탄 몇 마디 지껄인다 해서 먹힐 것 같지 않았다. 차라리 정면승부가 나을지도 몰랐다. 자신의 비상한 머리와 대범함을 증명하면 어떨까?

“그래도 꽤 그럴듯했어요. 세 가지만 조심했더라면 완벽했을지도 모르죠.”

상대가 생각보다 일찍 본색을 드러내자 소정은 더럭 웃음이 터져 나왔다. 순진한 외모에 그렇지 않은 성격도 꽤 마음에 들었다.

“하나, 시동으로 변장한 점. 음식을 가져온 이는 사라지고 생뚱맞은 인물이 나타났다? 탈이 날 것을 알고 문밖에서 기다렸다는 뜻이지요. 둘, 녹두가루를 꺼내 해독한 점. 세상 어떤 낭자가 녹두가루를 품속에 넣고 다닐까요? 우연이라기에는 너무 공교롭지 않나요? 셋, 려국을 들먹이면 아니 되었어요. 태을신교를 끌어들여 겁을 주고 싶었나 본데 그들이 진짜 독을 쓰려 했다면 지리강활 따위는 생각도 안 했을 겁니다. 그 풀은 독초라고 부르기에도 부끄러우니까요. 무공을 익힌 이들에게는 고작 위경련으로 그칠 독이 아닙니까?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 독살을 계획했다면 완벽하게 죽일 수 있는 독을 사용했겠지요. 뿐입니까? 지리강활은 운평에서도 곧잘 자란답니다. 려국인이 아니어도 누구나 자주 접할 수 있지요.”

“아아.”

가은은 낭패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렇게 듣고 보니 참으로 졸렬하고 유치한 계획이 아닌가? 그나마도 들켰으니 이제 소소정의 눈에 들기는 다 틀린 듯싶었다.

‘어쩐지 나와 닮았구나.’

그러나 정작 소소정은 가은이 마음에 꼭 들었다. 영악하고 대범한 면이 꽤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어디서 만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낯익은 외모도 호감이었다. 곁에 두고 잘 다듬는다면 괜찮은 인재가 되지 않을까?

“그럼 저는 영영 귀파와 인연이 없는 것입니까? 제발 저를 받아주세요.”

가은은 간절함을 담아 소소정의 도포 끝자락을 잡아당겼다. 입문만 허락해준다면 당장 손가락이라도 자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쉽게도 우리는 제자를 받을 형편이 아닙니다. 뭐,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식구가 될 가치가 있다면 모르지만…….”

말끝을 흐렸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거절은 아니었다. 눈치 빠른 가은은 대번에 소정의 의중을 읽어냈다.

“가치를 증명하면 되는 것이지요?”

“그게 쉽겠습니까?”

부러 상대를 떠보는 소정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기대감이 묻어났다. 왠지 모르게 엄청난 무언가를 해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반드시 내일 안에 다시 문주님을 찾아오겠습니다. 제가 얼마나 필요한 인재인지 알게 되실 테고요. 그럼 그때는 허락해주셔야 합니다.”

“그러도록 하지요.”

떨떠름하게 대답하면서도 소정의 눈은 이미 반달이었다.

허리를 반으로 꺾어 인사를 마친 가은은 토끼처럼 펄쩍펄쩍 뛰어나갔다. 그런데 웬걸? 시야에서 사라졌다 싶을 때쯤, 허둥지둥 다시 돌아오는 게 아닌가? 어리둥절한 소정의 앞에 다다른 그녀는, 부끄러움에 새빨개진 얼굴로 물었다.

“혹시 깨끗한 옷 한 벌만 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운선이 다시 황석산으로 돌아온 때는 이미 묘시가 가까워진 시각이었다. 벌써 헤어진 지 너무 오래된 데다가, 누구에게 대놓고 행방을 물어볼 수도 없으니 답답하고 초조했다.

‘나를 따라왔다면, 분명 이쪽 대나무숲과 저편 동산 사이를 지났을 터, 마주치지 않았을 리 없다.’

예상되는 길목을 수차례 돌았지만 주운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하산하여 객잔까지 이르는 길도 이미 훑었으나 마찬가지였다. 잘못된 정보를 주었나 의심도 해보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주운에 관해서 만큼은 형진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중간에 누군가를 만났다면?’

운선의 머릿속에 절대로 일어나면 안 되는 그림이 떠올랐다. 너무나 가능한, 그래서 더욱더 무서운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래를 펼쳤다.

‘장은은 나와 헤어진 후 대청 쪽으로 갔으니 제외. 그럼 정은률? 아니다. 그는 주운과 일면식도 없으니 정체를 몰랐을 터. 만났더라도 선운검파의 선자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때는 황석파 사람들도, 손님들도 대부분 대청 안에 있었는데 누구를 만났을까? 게다가 주운보다 실력이 뛰어난 이가 흔치 않은데…….’

대청에서 본 이들을 하나하나 복기하던 그는 어떤 위화감을 느꼈다. 그가 없었다. 황석파의 주요 행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 주운을 알고, 그녀에게 적대적인 사람. 이곳에서 가장 위험한 그자.

“고유생…….”

운선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추론이 맞는다면, 주운의 목숨은 경각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간 장문 대행이었으니 처소는 가장 깊숙한 곳, 내당이나 별채일 공산이 크다.’

결정을 내렸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벌써 어스름한 기운이 걷히고 동이 트려 하고 있었다. 주변이 밝아지면 몸을 숨기기 쉽지 않을 터, 한시라도 빨리 고유생을 찾아내야 했다.

운선은 운지행을 펼쳐 몸의 무게를 줄였다. 전각의 그림자 밑으로 몸을 숨기며 안뜰에 들어섰다. 잘 정돈된 중정을 가운데 두고 서너 채의 단정한 전각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장문의 처소. 양옆 중 하나는 고유생의 것이 분명했다.

‘운에 맡기자.’

운선은 마주 보는 방향에서 왼쪽 전각을 골라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그 뒤에도 허투루 움직이지 않고 숨을 죽였다. 온 신경을 양쪽 귀에 집중했다. 바람 소리,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 그 이상의 소음이 나지 않도록 조금씩 발을 움직였다.

“…….”

전각 지붕 사이로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귀를 가까이 대보니 도란도란 말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운선은 혹시나 몰라 스스로 아문혈을 짚었다. 그리고는 지붕에 몸을 밀착시키기 위해 납작 엎드렸다. 마침 검은 옷을 입은 터라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그저 나무 그림자처럼 보였다.

“……어째서 그놈을 놓아준 겁니까?”

“그럴 만하니, 그런 것이다.”

흥분한 은률과 달리 장은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자세가 거만하기 그지없었다. 과연 낮에 만났던 그 호인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고유생 그 늙은이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습니까?”

하루가 다 지났는데도 은률은 회장에서 장은을 바라보던 무림인들의 눈초리가 잊히지 않았다. 운선을 놓치고 유골함을 받아온 그를 순순히 믿은 이가 과연 몇이나 되었겠는가? 고유생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심각한 상황에 직면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심지어 고사숙의 도움도 내 계획의 일부였다면 믿겠느냐?”

“하, 사형. 제가 아무리 사형을 존경한다 해도 그 말에는 동조하기 어렵습니다. 장문 자리를 뺏겨 심술이 잔뜩 난 고유생이 사형을 도울 줄 어찌 알았습니까? 이번엔 진짜로 운이 좋았던 겁니다.”

장은의 허풍에 기가 막힌다는 듯 은률이 코웃음을 쳤다. 매사 감정에 솔직하고 성질이 급한 그의 성격이 말투에서 고스란히 묻어나왔다.

“이런, 너는 어째 조금도 성장하지 않는 것이냐? 나를 보필하고 이 자리를 이어받기에는 한참 멀었구나. 쯧쯧.”

은률은 뜻밖의 질책에 민망하여 양 볼에 바람을 가득 넣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번 일 만큼은 사형의 객기가 틀림없는데 뭐 저리 허세가 심한가도 싶었다.

“아까 말이다. 내가 대단한 장면을 목격했단다.”

“네?”

장은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는 킥킥대기 시작했다. 얼굴이 점점 붉어지더니 종국에는 꼭 불타는 고구마처럼 시뻘게졌다.

“대청으로 돌아오는 길에 안뜰에서 굉음이 나더구나. 뛰쳐들어가니 글쎄 고유생이 웬 젊은 여인을 숨기더란 말이야. 당황하여 풀숲에 던져버리고는 발로 툭툭 밀어 넣는데 그 꼴이 어찌나 우습던지 하마터면 내색할 뻔했구나.”

운선은 미리 혈을 눌러놓기를 천만다행이다 싶었다. 아니었다면 진즉에 괴성을 지르고 뛰쳐 내려가 장은의 머리를 박살 냈을지도 몰랐다.

*** 가기이방(可欺以方):

그럴듯한 말로써 남을 속일 수 있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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