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掩目捕雀(엄목포작)
유달리 끈적끈적한 밤이었다. 안 그래도 생각이 많았는데 날씨까지 도와주지 않으니, 소소정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처소에서 나와 안뜰을 서성거렸다.
‘장은이 운선을 이리 황망하게 놓칠 리 없다. 분명 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은 것이 있을 터.’
오대산검의 제자라면 장은의 천재적인 자질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오죽했으면 이십여 년 전, 마세풍이 은거하고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장은의 장문설이 나돌 정도였다. 그때 그의 나이가 고작 스물이었거늘.
아무리 운선의 실력이 일취월장(日就月將)했다 치더라도, 결코 장은을 이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러 놓아주었다는 말인데, 거기서부터 생각이 막혀 버렸다.
‘마세풍이 행방불명된 지 무려 삼 년이 다 되어가도록 찾지 않았다. 뿐인가? 생사 확인도 없이 장문의 자리까지 올랐으니 이만한 불경이 어디 있겠는가? 고작 마세풍의 망해(亡骸)를 받았다고 살려주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여기까지 생각에 이르자, 슬슬 머리가 아파 왔다. 황석산에 남아 장은을 떠보아야 할지, 서둘러 하산하여 운선의 뒤를 쫓을지 쉬이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다.
“문주님.”
모두가 깊은 잠에 빠질 한밤중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소정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그의 첫째 제자인 영인이었다.
“무슨 일이냐?”
“그게…….”
영인은 어쩐지 이 상황이 난감하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니까?”
“저, 어린 낭자가 한 명 찾아와 문주님을 뵙고자 합니다.”
“뭐라?”
이 야심한 밤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었다. 눈을 끔뻑거리며 제자의 멀건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사실은 찾아온 지는 벌써 한참 전입니다.”
영인은 혹여 스승에게 크게 혼이 날까 머뭇거렸다. 불안한지 연신 손으로 손톱을 뜯어내고 있었다.
슬그머니 노을이 내려앉은 저녁이었다. 선운산을 떠나온 지 벌써 달포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제자들은 모처럼 얻은 휴식에 각자의 처소에 널브러졌다.
“이왕 운평까지 왔으니 천천히 돌아갔으면 좋겠다.”
영인의 넋두리에 너도나도 한숨을 내쉬었다. 소소정은 관곡한 성격이면서도 공정하여, 모든 제자가 존경하는 장문이었다. 허나, 흠결 없는 사람은 없는 법. 그녀에게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한 가지 원칙이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문파가 우선일 것. 하여, 수련은 고됐고, 대의를 위한 희생이 강요되었다. 사명감이 별로 없는 제자들에게는 버거운 책임일 수밖에 없었다.
“열흘이라도 쉬면 다행이지요. 사나흘이면 또 행장을 꾸려야 할 텐데 벌써 몸과 마음이 지치는군요.”
“게다가 그 소마두가 다시 나타났으니 문주님께서 그냥 지나칠 리 없습니다. 차라리 선운산으로 돌아가는 게 낫지, 태을신교와 맞붙어 싸우게 되면 어찌합니까?”
영인은 누구보다 소소정을 믿고 따랐지만, 이번 여정에서만큼은 불만이 많았다. 그녀는 원래도 욕심이 없는 편이었다. 그저 일신의 안위를 지킬 정도의 힘만 있으면 되지, 그 이상의 명예는 필요 없었다. 그러나 장문의 첫 제자로서 그녀가 짊어진 짐은 상상 이상이었다. 훗날 장문의 자리를 이어받을지 모른다 생각하니, 벌써 숨이 턱턱 막혀왔다.
“우리끼리 떠들어 봤자 무슨 소용입니까? 어차피 문주님의 결정에 따라야 하니, 괜한 불만은 지워버리십시오. 그래도 사흘 안에는 떠나지 않겠다 하셨습니다. 운평은 볼거리가 많으니 짝을 이뤄 구경도 다니고 여독도 푸십시오.”
다들 동의하는 바였으므로, 더 이상의 볼멘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유달리 습한 날씨 때문에 피곤한 탓도 있었다. 그때,
“실례합니다.”
가늘고 여리지만, 꽤 당찬 목소리가 장지문 밖에서 들려왔다.
“필요한 게 없으니 돌아가십시오.”
시동(侍童)인 줄 알았던 영인은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여인들끼리 얇은 옷만 걸치고 쉬고 있으므로, 별일이 아니면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귀찮게도 소녀의 여린 목소리는 문 앞을 떠날 줄 몰랐다. 세 번이나 문을 두드리자, 결국 침상에서 일어나 어기적어기적 문 앞까지 걸어갔다. 짜증이 잔뜩 올라온 참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열넷은 되었을까? 한 어여쁜 소녀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영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시동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다른 문파의 소속된 제자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얼굴은 귀해 보였으나, 행색은 몹시 초라했다.
“선운검파의 선자님이 맞으시지요?”
“그런데요?”
신분이 낮은 이가 뜬금없이 처소까지 온 게 수상했으나, 그래도 최대한 친절하게 대꾸하려고 노력했다. 명색이 오대산검의 제자인데, 좋은 인상을 주고 싶었다.
“저는 운평 산기슭에 사는 가씨, 은이라고 합니다. 평소 선운검파의 위명을 들어왔는데, 실제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가은은 영인을 향해 무릎을 꿇더니 넙죽 바닥에 몸을 깔았다. 최대한 자신을 낮춰 상대에게 우월감을 느끼게 할 작정이었다. 주영인과 같은 소심한 유형의 사람에게 잘 먹히는 방법이었다.
“아니, 갑자기 무슨. 얼른 일어나십시오.”
아니나 다를까, 영인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가은을 일으키려 했다. 알게 모르게 상대를 업신여기던 마음이 싹 사라지고 말았다.
“얼마 전 불의의 사고로 부모를 잃었습니다. 갈 곳이 없어 헤매던 중 선자님들을 보게 되었고요. 부디 소녀를 불쌍히 여기시어 귀파의 제자로 들어갈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어느새 가은의 목소리는 흐느낌으로 변했다. 굵은 눈물방울이 바닥에 뚝뚝 떨어지니, 바짝 말라 있던 흙 알갱이가 진득진득해졌다.
“아아, 그건 좀…….”
“제자가 아니 되면 몸종이어도 좋습니다.”
가은은 더욱 간절히 머리를 조아렸다. 시간이 지체되자 드디어 영인의 뒤로 하나둘 다른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그녀의 사숙이자 장로급인 해윤도 있었다.
“선운검파는 당분간 제자를 받을 계획이 없다. 또한, 하녀도 필요치 않으니 돌아가게.”
해윤은 융통성이 없고 매정한 성격이었다. 아무래도 영인이 거절하지 못할 것 같아 직접 나선 참이었다.
“제발요.”
가은은 안 되겠다 싶어 이번에는 해윤의 다리를 덥석 잡았다. 예상치 못한 사람의 등장으로 적잖이 당황하여 무리한 수를 둔 셈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낯선 이의 손길이 몸에 닿자 해윤은 신경질이 버럭 났다. 얼마나 본파가 만만했으면 웬 거지 같은 아이까지 들러붙나 싶었다.
“백날, 천날 여기 엎드려 빈다고 해도 어림없다.”
잡힌 오른발을 휘돌려 손을 쳐내니 가은의 몸뚱이가 힘없이 뒤로 날아갔다. 흙바닥에 배를 보이며 자빠지니 그 꼴이 매우 우스꽝스러웠다.
“후훗.”
몇몇 제자들은 결국 웃음을 뱉어냈다. 초라한 옷가지에 흙까지 잔뜩 묻으니 그야말로 거지꼴이었다.
“사숙, 그래도 문주님께 여쭤보는 게…….”
마음이 약한 영인은 슬그머니 해윤을 떠보았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서슬 퍼런 사숙의 눈빛이었다.
“이리 약해빠져서 어찌 큰일을 할 수 있겠느냐? 되었으니 들어가서 쉬어라.”
해윤이 손을 휘휘 내젓자, 몰려들었던 제자들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중 누구도 흙바닥에 뒹굴고 있는 가은을 일으켜주지 않았다. 영인조차도 그저 흘긋 내려다보고는 다시 처소로 쏙 들어가 버렸다.
“생긴 건 선녀들인데 마음씨는 고약하구나.”
가은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소매로 쓱 비볐다. 덕분에 얼굴에도 진흙이 묻어 꼴이 더 가관이 되었다.
‘오히려 잘 되었다. 저 샛노란 오이꽃 같은 할망구가 나대지 못하도록 혼쭐을 내줘야지.’
가은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배시시 웃었다.
사건이 일어난 건, 그로부터 정확히 반 시진이 지난 다음이었다. 어느 정도 여독을 풀자 선운검파의 제자들은 슬슬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영인아, 시동을 불러 요깃거리를 내오라 하여라.”
“네.”
해윤의 지시가 떨어지자 영인이 서둘러 움직였다. 성질이 급한 사숙의 명을 어겼다가는 또 무슨 잔소리를 들을지 알 수 없었다. 사부보다 사숙을 모시는 일이 몇 배는 더 힘들었다.
영인이 문을 여니, 마침 시동이 다과상을 들고 잰걸음으로 오고 있었다. 다행이다 싶어 서둘러 상을 받아들자 시동이 웃으며 덧붙였다.
“마침 야식을 드리러 오던 길이었습니다. 특별히 귀한 재료로 만들었으니 맛있게 드십시오.”
“아, 고마워요.”
워낙에 마음이 급했던 영인은 별 의심 없이 사숙에게로 음식을 가져갔다. 일단 어른을 먼저 챙겨 드린 후에 나머지의 허기를 채울 생각이었다.
“시동이 어찌 알고 전병을 내어왔습니다. 먼저 드셔보십시오.”
해윤은 몹시 배가 고팠으나 짐짓 점잖은 체하며 우아하게 젓가락을 들었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한입 베어 물자 고소하고 단 채소의 맛이 일품이었다. 체면이고 뭐고 남이 뺏어갈세라 꿀꺽꿀꺽 집어삼켰다.
얼마나 맛깔나게 먹는지 배가 고프지 않던 영인조차 군침이 돌았다. 어쨌든 제일 어른인 해윤이 젓가락을 내려놓아야 다음 순서가 있었다. 다들 이제나저제나 얼른 식사가 끝나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억!”
전병 두 개를 막 목구멍으로 넘기는 순간, 해윤은 갑자기 속이 매스꺼웠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눈앞이 흐릿해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전혀 느끼지 못했던 몸의 이상인지라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설마……?’
자연스럽게 의심은 전병으로 쏟아졌다. 그녀는 움식물이 위장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재빨리 전중혈을 찍었다. 완전히는 아니어도 속도는 늦출 수 있을지 몰랐다. 한편으로는 손가락을 입에 넣어 구역질을 시도했다.
“어억!”
“사숙?”
영인은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억지로 토하려는 사숙의 등을 두드리는 동시에 다른 동문들에게 위급한 상황을 알렸다.
“으허어…….”
해윤은 구토 대신에 희뿌연 거품을 뱉어냈다. 손발이 급격히 차가워지더니 이제는 몸을 비틀며 바닥에 나뒹굴기 시작했다.
“중독이다.”
영인은 다른 이에게 해윤을 맡기고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일단 소소정에게 사실을 고하고 사숙을 구해야 했다. 오늘따라 달빛도 없어 앞이 깜깜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너는?”
그때였다. 어두컴컴한 안뜰 쪽에서 작고 아담한 인영이 툭 튀어나왔다. 아까 전 그들에게 사정하러 온 소녀가 아직 돌아가지 않은 듯했다.
“지금은 일이 있으니 나중에요.”
“저, 혹시 중독된 것이라면 제가 도와드려도 될까요? 아버지가 약초꾼이셨기에 웬만한 해독이 가능합니다.”
가은은 영인의 뒤쪽으로 고개를 비쭉 내밀어 보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제안했다. 벌어진 문틈으로 해윤의 모습을 본 모양이었다.
“하지만…….”
얼른 가서 사부님을 모셔오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고작 열네댓 살 된 소녀에게 장로의 생사를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황석파 내부는 워낙 넓어서 오며 가며 의원을 모셔오면 늦습니다. 한시가 급해 보이는데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소소정에게 보고하고 장은에게까지 소식이 닿으려면 한세월이었다.
“그럼…….”
영인은 뭐에 홀린 듯이 막고 있던 문을 비켜섰다. 가은이 들어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면서도 어쩐지 마음 한편이 서늘해졌다.
‘혹 잘못된 선택이 아닐까?’
그러나 그녀의 근심은 일각도 지나지 않아 해결되었다. 가은은 해윤의 눈을 까뒤집고, 전병의 속을 뜯어보더니만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지리강활입니다. 제가 마침 해독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 이후는 그야말로 신속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가은은 품에서 꺼낸 길쭉한 대나무 통에서 녹색 가루를 털어내더니 찬물에 진득하게 풀었다. 해윤의 얼굴을 돌려 물고 있는 거품을 빼낸 뒤에는 그 물을 거칠게 들이부었다.
“흐억!”
처음에는 이 사이로 물을 흘려보내더니 네댓 번의 시도를 더 하자 드디어 해윤이 음식물을 뱉어내었다. 환자가 몹시 괴로워하였으나 가은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 번 더 가득 녹색 물을 들이부었다.
“이제 괜찮을 겁니다.”
온몸에 토사물과 약물을 뒤집어쓰고도 가은은 해맑게 웃었다. 반면 선운검파의 제자들은 그 짧은 순간에 저승에라도 갔다 온 양,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혹 바라는 게 있다면…….”
영인의 인사치레에 가은의 눈이 반짝 빛났다. 저 말이 쏙 들어가기 전에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
“소소정 장문을 뵙게 해주십시오. 그거면 됩니다.”
*** 엄목포작(掩目捕雀):
눈을 가리고 참새를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