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75화 (75/209)

#75화. 忘我之境(망아지경)

“물론입니다.”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이미 자신도 고대산파도 존재하지 않았다.

“제가 무슨 부탁을 할 줄 알고…….”

상대가 너무 흔쾌히 대답하는 바람에 오히려 당황한 쪽은 운선이었다. 특별한 인연이기는 했으나 고작 서너 번 마주친 게 전부인 관계였다. 이렇게 부탁하기까지도 오랜 고민이 필요했다.

“적어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걱정이 가득한 운선과 달리 인경의 얼굴은 밝고 평온했다. 조금이나마 은혜를 갚을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쁠 뿐이었다.

정작 운선은 아직도 망설이는지 한참 동안 인경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결국, 이 방법밖에 없었다. 가벼운 한숨을 내쉰 그는 드디어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주춤주춤 소매 안쪽에서 거친 종이를 한 장 꺼내 들더니 인경의 손에 쥐여주었다.

“읽어보십시오. 어렵다면 거절해도 괜찮습니다.”

영준이 주변을 경계하는 사이, 인경은 재빨리 서신을 읽었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운선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무엇입니까? 어려운 일입니까?”

영준의 질문에 인경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어떻게 보면 식은 죽 먹기만큼 쉬운 일이었고, 또 다르게 생각하면 몹시 어렵기도 했다. 그러나 약속을 깰 생각은 없었다.

“네 말대로 백대협과 잠시 대화를 나누고 와야겠다. 먼저 올라가 있어라.”

운선의 부탁은 백형진에게 한 가지 대답을 들어오는 것. 그렇다면 상대가 취해 있을 때가 절호의 기회였다. 인경은 거침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에 삐딱하게 앉아있는 백형진에게로 다가갔다. 손에는 운선이 놓고 간 소곡주가 들려있었다.

“백대협이 아닙니까?”

거나하게 취한 형진은 단번에 상대를 알아보지 못했다. 세 번이나 더 부른 후에야 고개를 들더니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고대산파의 고인경입니다.”

인경은 쓴웃음을 지으며 형진의 앞에 멀뚱히 섰다. 불과 한나절 전에 만났던 그 수려하고 단정한 협객은 어디 가고 꾀죄죄한 술주정뱅이가 앉아 있었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잔뜩 흐트러진 그를 보는 게 처음인지라, 인경은 다소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고대산으로 돌아가는 길에 객잔에 들렀습니다. 안 그래도 낮의 일이 걸려 사과를 드리려던 참이었는데 우연히 만난 것입니다. 마침 잘 되었다 싶어 이리 말을 걸었습니다.”

“아니, 무슨. 일단 이리 앉으십시오.”

기실 형진은 인경을 배척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낮에 그를 죽게 할 뻔한 일 때문에 부채감이 있었다. 차라리 이 기회에 오해를 풀면 더 낫겠다 싶기도 했다.

“어찌 이리 빨리 하산하셨습니까? 황석파와의 일은 잘 마무리되었습니까?”

형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인경은 이때다 싶어 최대한 불쌍해 보이도록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백대협께서 그 소마두를 따라간 연후에 작은 다툼이 있었습니다. 어린 객기에 참지 못하고 뛰쳐나왔으니 제 탓도 있지요. 하여, 쓰린 마음을 달래려고 술 한 잔 기울이는 중이었습니다. 괜찮으시면 제가 한 잔 드려도 되겠습니까?”

“좋지요.”

형진은 정신을 차리려는 듯, 스스로 자신의 뺨을 세게 두어 번 내리쳤다. 금세 얼굴이 새빨개진 대신, 발음은 훨씬 또박또박해졌다.

“아까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고대산파를 몰아세우려는 의도는 아니었으나 사정이 있어 그리되었지요.”

인경은 그를 이해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으나, 운선의 부탁이 있는지라 애써 속내를 숨기며 너스레를 떨었다.

“저 또한 그 순간에는 당황하여 무작정 화가 났지마는, 이제 생각해보니 오해받을 수 있겠다 싶더군요. 허나, 저는 여전히 태을신교가 저희를 왜 보내주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알려드릴까요?”

“네?”

형진은 인경이 퍽 안쓰럽기까지 하였다. 그 뻔한 답을 여태 몰랐다니 순진함을 넘어 어리석어 보였다.

“증인!”

“?”

그는 인경이 따라준 소곡주를 단번에 들이키며 말을 이었다.

“공물의 정체는 황석파와 두타공파의 수뇌부만 아는 비밀이었습니다. 문주도 충격받지 않았습니까? 그 끔찍한 현장을 강호인들이 보았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아무리 모국을 위함이라 해도 도덕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겠지요. 네, 하물며 저 또한 죄책감이 생기더군요. 려국인은 그저 나라를 잃은 이들일 뿐, 짐승이 아닌데 말입니다. 태을신교는 언젠가 그 진실을 세상에 알릴 작정으로 당신과 동문들을 살렸습니다. 이리 순진하고 의리 있는 당신이라면 오늘처럼 공물의 정체를 밝히려 할 테니까요.”

술이 너무 많이 들어간 탓일까? 아니, 실연의 상처인 듯도 싶었다. 무슨 이유였든 형진은 평소와 달리 말이 많았다.

“증인…….”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측은지심이랄지, 무시하는 마음일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유는 증인으로서의 쓰임새 때문이었을 것이다. 합리적인 답을 찾아내자 어쩐지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런데 태을신교를 도발하고 해심밀경소를 양지로 꺼내는 일이 어째서 두타공파를 위한 것입니까?”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으나 매우 위험한 질문이기도 했다. 과연 대답해 줄까? 반신반의하며, 인경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것은 스승님의 의도일 뿐, 저는 모릅니다. 오직 운선을 잡아 죽이는 일이 저의 사명이고요.”

‘조양의 의도……?’

깊은 생각에 빠지자 그의 동그란 눈이 길고 가늘어졌다. 사람에 대한 의심이 많지 않은 인경은 이 대단한 선배들의 의중을 조금도 파악할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평생 이해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하여 강운선, 그를 죽이셨습니까?”

그런 후에도 한참이 지나서야 드디어 운선이 바라던 질문까지 도달했다. 제발 의심 없이 대답해주기를. 인경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운선에게 일행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쪽을 상대하느라 그를 놓쳤지요.”

형진의 시야가 다시금 흐려졌다. 주운을 떠올리니 가슴이 저릿저릿하고 숨도 가빠왔다. 불치병이 분명했다.

“이리 무사하신 걸 보니 적을 제압했음이 틀림없는데 어째서 괴로워하십니까?”

“하아…….”

형진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인경의 질문은 애초에 잘못되었다. 상대는 적도 아니고, 원수도 아니었다. 하여, 절대로 이길 수 없었다. 어떻게 연모하는 여인을 다치게 한단 말인가? 아마도 평생 손톱 끝자락도 흠집 낼 수 없을 터였다.

“고문주, 제가 평소와 달리 취하여 실언을 했습니다. 더 추해지기 전에, 이만 헤어짐이 좋겠습니다.”

인경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옷소매를 더럭 부여잡았다. 이대로 대화를 끝내기에는 얻어낸 정보가 너무 없었다.

“저 또한 마음이 울적하여 술 동무가 필요한데 조금만 더 함께 있어 주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고문주?”

그제야 형진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자주 본 적은 없지만, 인경이야말로 평상시와 너무 달랐다. 불과 몇 시진 전만 해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몰아붙이던 자가 아니던가?

‘이상하다.’

그는 주변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여전히 객잔 안은 밤손님으로 가득했다. 딱히 위화감은 느낄 수 없었다.

‘헌데 이 불길한 기분은 무엇인가?’

“아아, 제가 퍽 눈치 없이 군 모양입니다. 이제 인사를 드려야겠군요. 아까도 말했듯, 이리 찾아와 인사를 드린 이유는 낮의 일을 사과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제 처지와 능력에 맞지 않는 장문의 자리에 앉다 보니 열등감에 차 있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백대협을 존경해왔던 터라 더 곡해한 면이 없지 않았습니다.”

인경은 여기서 뭐라도 하지 않으면 일을 망칠 것 같은 강한 직감이 들었다. 어떻게 그의 의심을 가라앉힐까 고민하던 차에 문득 태사백 백천의 말이 떠올랐다. 자고로 자신을 숙이고 들어가는 것만큼 최고의 수는 없다. 마음에도 없는 사과였으나 최대한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상대를 안심시킬 요량이었다.

“미안합니다. 제가 잠시 예민해져 오해했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저야말로 낮에 문주를 몰아간 일은 사과하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형진은 인경의 진심 어린 사과에 그만 감동했다. 하긴 이제 고작 열여덟의 청년이었다. 그 이기적인 오대산검의 원로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이는 그가 퍽 불쌍하기도 했다.

“우리 오늘만큼은 직책도, 항렬도 내려놓고 잔을 나눕시다.”

형진은 호쾌하게 웃으며 다시금 술잔을 기울였다. 재차 음식 주문을 했을 때는 인경과 호형호제를 하기로 약속까지 하였다. 사형제들과 함께 별을 보며 마시던 술맛이 그리워지는 밤이었다.

‘그때는 도평도, 운선도, 그리고 주운도 함께였지.’

생각해보면, 운선을 꽤 아꼈던 기억도 있었다. 똘망똘망한 눈으로 자신을 보필하던 그를 가끔은 도평보다 신뢰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주운…….’

소곡주 한 주전자를 들이붓고 나니, 가슴에서 서서히 뜨끈한 기운이 올라왔다. 언제부터인지 운선에 대한 분노와 주운에 대한 그리움이 동시에 커져 버렸다. 통제할 수 없는 크기의 감정은 때때로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때문에, 두 사람을 한 자리에서 만난 오늘이야말로 그에게는 최악의 하루였다.

“왜 끝까지 강운선을 쫓지 않고 하산하셨습니까? 형님의 실력이라면 충분했을 텐데요.”

얼큰하게 취한 형진을 살살 달래며 인경이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야말로 실패하지 않으리라.

“아우님, 그녀는 운선을 찾아 떠나버렸습니다. 저를 단 한 번도 돌아봐 주지 않더군요. 아마도 운선이 황석산을 떠나지 않았다면 벌써 만났겠지요. 그러니 그곳에 남을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형진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더니만 그 자리에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눈가에는 진득한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도움이 되었을까요?”

형진을 숙소에 올려다 놓으니 운선이 변장을 벗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삼 년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수려한 모습이었다.

“네.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운선은 고개를 깊이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도움을 주고받고 나니, 어쩐지 서로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느껴졌다.

“이제 그분을 찾으러 가시는 겁니까?”

“네. 그리해야지요.”

운선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드디어 그녀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자 차분했던 마음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부디 만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 가볍게 묵례를 주고받은 후,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몇 걸음 걷지 않아서 운선이 다시금 뒤를 돌아보았다.

“아, 그리고 문주님.”

“네?”

이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좋을까? 잠깐 고민했던 운선은 결국 마음을 정했다. 이 말이 독이 될지, 약이 될지는 온전히 인경의 마음에 달려 있었다.

“교주님이 당신을 살린 이유는 목격자라서가 아닙니다.”

“네?”

송아지처럼 눈을 끔뻑거리는 인경을 향해 운선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마음에 들었다 하셨습니다. 단지 그것뿐입니다.”

멍하니 서서 자신의 말을 곱씹는 인경을 남겨두고, 운선은 미련 없이 객잔을 나섰다. 언제고 다시 만날 것 같은 예감에 긴 인사는 하지 않았다. 서로가 원수인 동시에 은인인 묘한 인연이었다.

‘한때는 당신도 평생 함께할 인연이라 생각했거늘…….’

어느새 그의 손에는 소곡주 한 병이 들려있었다. 수오당이 안식처라고 생각했던, 그 옆에 앉은 형진이 둘도 없는 친우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날과 같은 후텁지근한 여름밤이었다.

*** 망아지경(忘我之境):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마음을 빼앗겨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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