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74화 (74/209)

#74화. 物以類聚(물이유취)

용송현이 쉴 새 없이 질문을 쏟아내자 장은은 자못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습니다. 하여 차근차근 대답해도 되겠습니까?”

“아아, 죄송합니다.”

장은은 용송현이 민망해하자 충분히 예의를 갖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예측불허의 난장으로 혼란스러웠던 대청은 장은의 존재감만으로도 삽시간에 안정되었다. 한 문파의 장문으로서 탁월한 자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고대산파의 장문은 어디 계십니까?”

이쯤 되면 그 천둥벌거숭이를 달래놓아야겠다 싶어 던진 말이었다. 사실 크게 경계가 되는 존재는 아니었으나 조그마한 의심의 불씨라도 심어놓을까 봐, 살짝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의문이 되는 일을 몇 가지 물었을 뿐인데, 심히 노여워하며 하산하였습니다. 앞섬까지 자르고 떠나버리니, 기가 막혀 잡지도 못했답니다. 어린 나이에 너무 높은 자리에 올라 예의와 상식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게지요.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소소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까의 상황을 대강 설명했다. 그녀는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한참 어린 후배에게 들은 질책에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 이참에 고대산파와 영영 등지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하아, 제가 나중에 찾아가 잘 달래보겠습니다. 그보다 백형제가 돌아오지 않았다니 난감하군요.”

장은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되도록 자신이 의심받지 않으려면 섬세한 감정 연기가 중요했다.

“그는 강운선이 맞았습니다. 우리는 함께 그를 뒤따랐으나 백형제는 또 다른 적을 만나 발이 묶였습니다. 무사히 돌아와야 할 텐데요.”

눈물까지 글썽이는 장은의 모습은 생불(生佛)과 다름없었다. 인자한 성품과 형제를 대하는 의리에 무림인들은 사뭇 감동했다.

“그는 이곳에 여러 명망 있는 강호인들이 모인다는 사실을 입수하고는 몰래 잠입했습니다. 정확한 목적은 모르겠으나 오대산검의 결속을 깨려 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고대산파를 부러 도움으로써 우리를 이간질한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장은이 자초지종을 풀어놓자 그제야 무림인들은 무릎을 ‘탁’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뿔싸! 내가 고문주를 오해하여 일을 그르쳤구나. 삼 년 전 성곤은 이 상황을 예견하고 우리를 갈라놓기 위해 고대산파를 구해주었나보다. 에잇, 간교한 놈들!’

용송현 역시 깨달은 바가 있었다. 자신이 어리석게 나서는 바람에 마교의 간악한 꾀에 놀아난 것을. 아직 강호 경험이 미천한 고인경을 노린 꼼수였음을.

“그러나 정정당당한 우리 정파의 협객들이 그들의 간교한 속셈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다만 운이 좋게도 그 소마두를 잡아 음모를 일부 밝혀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지요. 물론 백형제가 옆에 없었더라면 절대로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잠깐 말을 끊은 장은은 매우 과장된 몸짓으로 두타공파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두타공파의 제자들은 왠지 형진을 폄훼하는 것 같아 떨떠름했으나, 분위기에 압도되어 얼렁뚱땅 인사를 받고 말았다.

장은의 이후 설명은 이러했다. 힘들게 운선을 잡았더니 웬 백자를 들고 자신을 위협하더라. 어쩐지 가슴이 끔찍하여 애지중지 단지를 받아드니 다름 아닌 유골함이었다. 운선이 그 틈을 노려 도망치는 바람에 차마 잡을 여력이 없었다.

“눈치채셨겠지만, 이 망해(亡骸)는……, 황석파의 전(前) 장문이자 저의 사부님이신……, 흑…….”

장은은 마지막 한 마디를 뱉어내지 못하고 단상 위에 주저앉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처량 맞고 애절한지 보는 이들마저 목이 메는 것 같았다.

“아니, 마문주님은 운평표국 때 성곤에게 살해된 게 아니었습니까?”

문득 얼개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용송현이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는 분명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는 자신의 말 한마디 때문에 분위기가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궁금한 점이 있으면 응당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편이었기에 개의치 않았다.

“그날 사제 부능파는 절명하였으나 사형은 숨을 놓지 않았습니다. 강운선은 다친 마사형을 등에 업고 사라졌지요. 그는 일전에 정체를 감추고 사형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의 연기에 속아 잠깐 무공을 가르쳤는데 나중에 진실을 알고 통탄의 후회를 하셨지요. 강운선은 끝까지 황석파의 무공을 훔치고 싶어 사형을 납치해 간 것입니다.”

다소 거칠고 격양된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드디어 입장을 정한 고유생이 새로운 장문을 지원해주기 위해 나타난 것이었다. 그의 등장으로 인해, 용송현으로 하여금 불어닥쳤던 의심의 불씨가 남김없이 사그라들었다.

“참으로 흉악한 놈이 아닙니까?”

“어째 검귀보다 더욱 잔악무도한 것 같습니다.”

“혹시 검신 강율천도 그놈이 손을 쓴 게 아닙니까?”

비난의 소리는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나 이 사람 저 사람에게로 굴러갔다. 이제 태을신교를 넘어 강운선이라는 희대의 마두가 표적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저는 스승님을 욕보인 강운선과 태을신교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장은은 다시금 주먹을 불끈 쥐며 좌중을 돌아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이미 분노와 열정이 가득했다. 강운선을 잡아 오대산검의 위명을 찾을 뿐만 아니라 강호의 질서를 지키고 모국에 대한 충성을 다하는 것. 그리고 그 이면에는 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는 절세 비급, 해심밀경소에 대한 욕망이 득시글거렸다.

“위대한 오대산검을 받들어 태을신교를 멸하자!”

“멸하자!”

“멸하자!”

누군가의 외침이 시작이었다. 황석파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 또 한 번의 붉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녁이 한참 지났는데도 해금 객잔은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오랜만에 열린 오대산검의 축제인지라,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도 설레기는 마찬가지였다.

“문주님, 오늘은 술이라도 마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준은 자리에 앉자마자 넋두리를 시작했다. 인경의 마음을 살피느라 여태 조용했건만 더는 참기 힘든 모양이었다.

“술도 못 마시는 놈이 입만 살았구나.”

그래도 영준이 옆에 없었더라면 혼자서는 견디기 어려웠을 터였다. 인경은 새삼 그의 심복이자 오랜 친우가 고맙게 느껴졌다.

“그 낭자는 어찌 되었을까요?”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영준은 조심스레 가은의 이야기를 꺼냈다. 기실 계속 마음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글쎄, 워낙에 영특한 소녀라 잘 헤쳐나갈 테지.”

“그래도 원용당 무뢰배들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영준은 시큰둥해 보이는 인경이 퍽 야속했다. 일면식도 없는 거지에게도 친절을 베푸는 그가, 웬일인지 가은에 대해서만은 지나치리만치 무심하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영준아,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란다. 그 소녀는 여리고 어여쁜 외양을 하고 있으나 결코 순수한 마음씨를 가지지는 않았더구나. 그저 좋은 추억으로 담아두어라.”

이미 친우의 속내를 짐작하고 있던 인경은 따끔하게 쓴소리를 던졌다. 지금 마음을 정리하지 않으면 오랫동안 미련이 남아 더 힘들 것이 뻔했다.

“오래 겪어보지 않았으니 모를 일이지요. 그리 따지면 강운선인가 그 작자도 어떤 의도로 문주님을 도왔는지 알 게 뭡니까?”

뾰로통한 마음에 뱉은 말실수였다. 영준은 뒤늦게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으나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틀린 말이 아니다.’

다소 풀어졌던 인경의 얼굴이 다시금 딱딱하게 굳었다. 강운선은 과연 선인인가? 하물며 지금껏 협객이라 생각했던 백형진조차도 협잡꾼과 다르지 않았다. 태을신교의 교도인 그를 믿었다가 또 다른 함정에 빠지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는 나를 구해주었다.’

심지어 절대로 자신의 위치가 들키면 안 되는 상황에서도 그는 주저 없이 약자의 편에 섰다. 그 수 번의 상황이 모두 철저한 계획하에 의도한 일이었을까? 상식적으로 불가능했다.

“어?”

인경의 안색을 살피며 초조해하던 영준의 시야에 익숙한 사람이 들어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를 만나자, 자신도 모르게 소매를 들어 한참 눈을 비벼댔다.

“문주님, 저쪽을 보십시오. 백대협이 아닙니까?”

술기운에 알딸딸해진 인경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영준이 가리킨 방향을 쳐다보니 과연 백형진이었다. 홀로 술잔을 들이키고 있었는데 벌써 한참 전부터 이곳에 있었는지 거나하게 취한 모습이었다.

‘강운선을 따라갔는데 어째서 여기 있는 것인가? 혹시 그를 잡았나?’

그러나 금세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랬다면 저리 상심한 표정일 리가 없었다. 졌거나, 놓쳤다는 뜻일 터,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아는 체를 해볼까요? 백대협은 아까 그 소란이 있을 때, 자리에 없었으니 우리의 상황을 모르지 않습니까? 슬쩍 속내를 떠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우리와 비교도 안 될 만큼 영리한 이다. 괜히 경거망동하지 말아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편으로는 물어볼 말이 많았다. 장은과 짝짜꿍이 되어 사기를 친 이유는 차치하더라도, 운선을 따라간 이후의 일은 몹시 궁금했다.

“소곡주입니다.”

심란한 마음에 허공에 젓가락질만 하고 있을 때였다. 언제 왔는지 점소이가 허리를 굽신거리며 술주전자 하나를 올려두었다.

“아아, 주문이 잘못된 모양입니다. 저희는 술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영준은 예의 친절한 말투로 점소이를 돌려보내려 했다. 그러나,

“소곡주 주문하셨습니다.”

돌아가기는커녕 점소이는 장승처럼 그들 앞에 딱 버티고 움직이지 않았다. 여전히 주전자의 손잡이를 잡은 채였다.

“허허, 아니라는 데도?”

영준은 살짝 불쾌했으나, 여전히 예의를 갖춰 상대를 대했다. 아마도 손님이 많아 헷갈렸겠거니 싶어, 주전자를 받아 들었다. 그런데,

“어?”

그제야 두 사람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주전자가 허공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땀을 뻘뻘 흘리는 영준과 달리 점소이는 뚱한 표정 그대로였다.

“소곡주입니다.”

인경은 앵무새처럼 말을 반복하는 점소이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으나 어쩐지 낯이 익은 듯싶었다.

“제가 생각하는 그분이 맞습니까?”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물은 까닭은 상대가 계속 정체를 감추려 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의 추측이 맞는다면, 섣불리 아는 체를 해서는 안 되는 존재일 터.

“아마도?”

점소이는 반대쪽 손을 들어 인경의 눈 밑으로 가져갔다. 손가락을 순서대로 하나씩 펼치자 손바닥에는 이미 말라비틀어진 곶감 꼭지가 하나 놓여 있었다.

“아아.”

인경은 본능적으로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다행히 이쪽을 주목하는 이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괜찮으십니까?”

인경의 물음에 운선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최대한 목소리를 덜 내고 싶었다. 굳이 인피면구를 써 얼굴을 가린 이유는 딱 하나였다. 형진에게 들키지 않을 것. 그러기 위해서는 인경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고문주님,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 물이유취(物以類聚):

물건은 종류대로 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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