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仰天而唾(앙천이타)
휘적휘적 걸어가는 인경에게는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았다. 말리는 시늉만 냈을 뿐, 오대산검 제자 중 그 누구도 쫓아 나오지 않았다.
‘저 심정이야 오죽하겠냐만…….’
뒤따르는 영준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무려 백여 년이 넘게 형제의 관계를 지켜온 오대산검이었다. 고작 옷자락을 잘라내는 정도로 갈라설 사이였다는 게 분노를 넘어서 슬프기까지 했다.
“혹여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느끼신다면, 전혀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런 모욕적인 상황에서 참았다면 땅속에 누워 계신 태사부님이 벌떡 일어나셨을 겁니다. 문주님이 돌아서 나오실 때는 제가 다 뿌듯하더이다.”
영준이 일부러 더 호들갑을 떨었으나 인경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 복잡한 감정이 무엇인지 가늠해 보고 있었다. 죄책감? 아쉬움? 아니, 이것은 오히려 후련함에 가까웠다.
“지난 몇 년간, 가슴을 답답하게 했던 난제가 오늘에서야 풀린 것 같구나.”
정파와 사파, 선과 악, 의와 협, 그들의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이 드디어 결론에 이르렀다. 소속과 출신은 그 기준을 정하는 데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다. 그와는 접점이 하나 없는 운선이야말로 일평생의 은인인 것처럼.
“저, 고문주님.”
황석산 입구에 다다랐을 때였다. 여태 잠자코 뒤따르던 가은이 드디어 인경을 불러세웠다. 진작 말하려고 했거늘, 눈치를 보느라 너무 늦어버린 감이 없지 않았다.
“제가 높으신 분을 몰라뵙고 버릇없이 굴었네요. 죄송합니다.”
뜬금없는 가은의 사과에 인경은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사실 그는 황석산을 다 내려올 때까지도 가은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오히려 미안한 쪽은 자신이었다.
“아, 가은 낭자 죄송합니다. 보셨다시피 상황이 여의치 않아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이제 저희는 다시 고대산으로 돌아갈 예정인데 낭자를 어찌 도와드려야 할까요?”
“지금까지 도와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하니, 이제 염려 마십시오.”
가은이 작별 인사를 건네자, 마음이 급해진 사람은 영준이었다. 늘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자랐던 그에게 가은은 그야말로 맑은 이슬 같았다. 이대로 헤어지면 영영 다시 못 본다 생각하니 손발이 저릿저릿했다.
“가은 낭자, 우리 고대산파는 딱한 처지에 놓인 이웃을 모른 체하지 않습니다. 비록 여유로운 환경은 아니겠으나 일단 동행하면서 차차 뒷일을 고민해 보심이 어떻겠습니까? 네? 문주님도 그리 생각하시지요?”
영준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계속 인경에게 눈치를 보냈다. 어릴 적부터 자라온 사이기에 인경이 이 신호를 못 알아챌 리 없었다.
“운평은 황석파 이전에 원용당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하여 혼자 돌아다니다 또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릅니다. 먼 길이지만 낭자만 괜찮다면 동행하시지요.”
가은은 두 은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예의상 권하는 인경과 달리 자신에 대한 호감을 온몸으로 드러내는 영준을 보니 살짝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닙니다. 고대산파는 여제자를 받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시중을 들 이가 필요하신 것도 아니니 제가 따라간들 짐만 되겠지요. 아까 산 위에서 여러 문파를 보니 여제자를 거두는 곳이 꽤 있더군요. 여기서 기다렸다가 기회를 보아 능력껏 청탁해보겠습니다.”
인경은 과연 그 말이 옳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영준 역시 당찬 그녀의 포부에 차마 더 조를 수 없었다.
“낭자는 나이에 비해 영민하고 눈치가 빠르니 꼭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인경의 깔끔하고 담백한 인사를 끝으로 일행은 헤어지게 되었다. 사흘간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서로에 대한 깊은 인상을 남긴 채로.
“내가 감당하기에는 그릇이 너무 큰 사람이다.”
인경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바라보고 서 있던 가은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챙!
갈수록 숨을 헐떡이는 주운과 달리 고유생은 여유만만이었다. 오히려 더 몰아칠 수 있으면서도, 부러 약 올리듯 강약을 조절하고 있었다.
‘저년의 사부가 했던 것처럼 천천히 약을 올리다 죽여야겠다.’
방금까지도 장은 때문에 가슴이 답답했건만, 싸움이 시작되고부터는 체증이 싹 가라앉았다. 역시 화병을 다스리는 데는 복수만 한 것이 없었다.
‘이 늙은이가 토끼몰이 중이구나.’
십여 합을 부딪쳤을 때, 주운은 고유생의 속내를 완벽하게 파악했다. 평소 그의 행실로 보아 자신은 결코 살아나가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수중월영(水中月影)”
월심의 가늘고 부드러운 검신이 주운의 오른손을 휘감아 돌았다. 회전축을 가볍게 움직이자 그대로 상대의 안면을 향해 작은 회오리를 만들어냈다.
“어이쿠!”
생각지 못한 초식에 놀란 고유생이 뒤로 성큼 물러나자, 드디어 둘 사이에 사람 하나 들어갈 만큼의 공간이 생겼다.
‘지금이다!’
펑!
주운은 소매 춤에서 손톱 크기의 환을 꺼내 바닥에 힘껏 내동댕이쳤다. 마치 폭죽이 터지듯 강한 파열음과 함께 허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응급한 상황에서 쓸 요량으로 가지고 다니던 연막탄이었다.
“가소롭기는.”
그러나 고유생은 당황하기는커녕 실소를 터뜨렸다. 왼팔을 크게 휘둘러 연기를 소매 안에 가둔 후, 오른손에 든 검으로 바닥에 굴러다니는 탄을 가볍게 건져 올렸다. 그 찰나에 연기가 걷히더니 뿌옇던 시야가 금세 맑아졌다.
“흥!”
어느새 한 장 이상 멀어진 주운의 하얀 옷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나름 빨리 뛴다고 서둘렀겠으나 경공에 있어서도 일신의 경지에 오른 대선배를 뛰어넘을 수 없었다.
“아앗!”
고유생은 왼손으로 주운의 묶은 머리를 낚아채었다. 어찌나 세게 당겼는지 관자놀이 쪽에서 수십 가닥의 머리카락이 뽑혀 나왔다.
“그리 쉽게 빠져나갈 성싶으냐?”
주운은 등을 보인 자세에서 단번에 허리를 뒤로 꺾었다. 몸이 한 바퀴 휙 돌자 잡힌 머리카락도 한꺼번에 쑥 빠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발을 뻗어 상대의 명치를 세게 가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중심을 잃게 만든 후, 다시 도망간다.’
운지행을 쓴다면 상대와 내력 차이가 크더라도 충분히 벗어날 수 있으리라. 목적지는 식이 한창인 대청 쪽. 보는 눈이 많으니 자신을 죽이지 못하리라는 계산속이었다.
“꼴값이구나.”
고유생은 혀를 끌끌 차더니만 날아오는 주운의 왼발을 한 손으로 덥석 잡아버렸다. 몸이 기울어진 상태에서 날린 발길질이라 힘이 반도 실리지 않은 탓이었다.
퍽!
“억!”
움직임을 완전히 제압한 후에는 장풍을 날렸다. 내력의 3할도 실리지 않았으나 워낙에 상대가 무방비 상태였으므로, 갈비뼈 서너 대를 단번에 부러뜨릴 수 있었다.
“어른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뛴 대가이니라.”
섬뜩한 고유생의 표정에서 주운은 이미 자신의 운이 다했음을 깨달았다. 그동안 재능만 믿고 허투루 수련한 대가였다. 그래도 이리 허망하게 죽으니 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사숙? 혹시 여기 계십니까?”
“어?”
예상치 못한 이의 등장에 고유생은 적잖이 당황했다. 황급히 주운의 아문(瘂門)혈을 누르고는, 수풀이 울창한 연못 뒤쪽으로 냅다 던져놓았다. 주운은 반항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마치 나무토막처럼 바닥에 널브러졌다.
“사숙?”
반대쪽에서 못마땅한 얼굴로 나타난 이는 장은이었다. 운선과 헤어지고 대청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를 들은 것이었다. 마침 고유생이 머무는 처소 근처였기에 혹시나 했을 뿐, 별다른 용무는 없었다.
“대체 왜 아직도 여기 계십니까?”
“아, 네게 인계할 장부를 정리 중이었다.”
고유생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장은의 눈에는 의심의 빛이 가득했지만, 상관없었다. 그저 이 순간만 잘 넘기면 되니까.
“제가 보기 싫어서가 아닙니까?”
“그럴 리가.”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으나 한편으로는 장은의 반응이 퍽 수상하였다. 평소라면 농담조로 가볍게 넘어갈 성격인데 오늘따라 퍽 까칠하게 굴었다. 필시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안쪽 구석까지 온 것이냐? 손님들을 접대하지 않고?”
“하아…….”
막상 고유생의 지적을 듣자. 짜증이 확 솟구쳤다. 강운선, 그 강구 새끼 한 마리 때문에 일정이 지연되고 말았다. 돌아가서 수습할 생각을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게 뭔 줄 아십니까?”
장은은 자신의 손에 들린 하얀 단지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게 대체 뭐냐?”
고유생은 눈을 최대한 가느다랗게 뜨고는 단지를 노려보았다. 무늬 하나 없는 싸구려 백자였으나 얼마나 닦아 놓았는지 반짝반짝 윤이 났다.
“스승님의 유골입니다.”
“뭐?”
고유생은 너무 놀라 입에서 침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세풍이 죽거나 죽기 직전이라고는 생각했으나 자기 눈앞에 유골로 나타날 줄은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이걸 네가……?”
“강운선, 그가 버젓이 두 발로 걸어들어와 주더군요.”
“뭐라?”
그 순간에는 주운이고 뭐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눈을 부릅뜨고 운평 바닥을 뒤질 때는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던 놈이 어떻게 귀신처럼 이곳에 나타났단 말인가? 아니, 그보다 운선이 나타났으니 당장 그 녀석을 잡는 것이 순서였다.
“그래서? 그놈을 그냥 보냈느냐?”
“그럼 제가 목이라도 따야 했을까요?”
장은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이죽거렸다. 복작복작한 잔치 분위기를 틈타 황석산에 잠입하였으니 어찌 보면 자신의 탓도 있었다. 그렇다고 함부로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경전에 대한 의문은 오롯이 그를 죽인 사람에게 쏠릴 테니까.
“그래서 설마 떡 하니 이걸 받았단 말이냐?”
“그럼 어쩔까요?”
고유생이 손가락으로 유골함을 가리키며 질책하자 장은은 기가 탁 막혔다. 뭐 하나 도움도 안 되는 주제에 어른입네 하며 자신을 가르치려는 태도가 영 탐탁지 않았다. 그래도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일단 한 번은 참기로 했다.
“저와 함께 회장으로 가시지요. 스승님의 유골함을 받은 사실을 알리고 강호인들에게 경위를 설명해야지요.”
“꼭 나까지 가야 할까?”
고유생은 가슴이 뜨끔하였다. 고작 스무 걸음도 안 되는 거리에 주운이 누워있었다. 적어도 저 이를 처리한 후에 움직여야 뒤탈이 없을 터였다.
“하아…….”
기어코 고유생이 마지막 남은 인내심을 들쑤시자 장은의 온화한 표정이 싹 걷혔다. 방금까지만 해도 친절함으로 무장했던 눈이 상대에 대한 경멸의 빛으로 바뀌었다.
“사숙,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지요? 허나, 어쩌시겠습니까? 아무쪼록 가늘고 길게 황석파에 살아남으셔야 할 게 아닙니까? 어른으로 대접해 드릴 때, 알아서 잘 처신하십시오. 저라고 언제나 부처님처럼 넘어가진 않을 테니 말입니다.”
고유생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벌게졌다. 얼어붙은 듯, 자리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숙을 남겨두고 장은은 안뜰을 나섰다. 마침 기울어진 해가 그를 따라붙었다. 음흉한 본성을 비춰주기라도 하듯, 붉은 그림자가 길게 늘어났다.
“건방진…….”
그러나 고유생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장문이 된 그에게 해코지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앙천이타(仰天而唾)가 따로 없었다.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도가 필요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운을 집어던진 수풀 쪽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 앙천이타(仰天而唾) :
하늘을 바라보고 침을 뱉는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