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72화 (72/209)

#72화. 絶緣(절연)

장로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결국, 용문파의 용송현이 나서 제 문파의 무림인들을 진정시키기에 이르렀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식이 지연되었으니 선후배님들의 양해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정작 본인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운선이 절벽에서 몸을 던지는 현장을 직접 보았기에 더 기가 막히기도 했다.

‘태을신교가 다시 강호를 어지럽히려는가?’

그들만 떠올리면 손발이 덜덜 떨릴 정도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한때는 오대산검의 중심이었던 용문파였으나, 작금에는 황석파에게 조차 기를 펴지 못하게 되었다. 그 원인은 오직 태을신교 때문이었다. 하여, 조상원의 정체가 밝혀진 그 날의 일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강운선, 저 쥐새끼만 없었다면 묵안 사형이 그리 허망하게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조상원은 사형제의 정을 뛰어넘어 핏줄과도 같았다. 비록 반쪽은 려국인이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가족 같았던 그를 잃게 만든 태을신교, 그리고 강운선만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경전 따위는 관심 없다. 강운선, 네 녀석의 목은 반드시 내 손으로 떼겠다.’

반면 선운검파 장문 소소정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그 녀석을 산 채로 잡아 경전의 비밀을 알아내야 했다. 대부분의 강호인이야 경전을 무공 비급 정도로 알고 있을 테지만 자신은 그것의 진정한 가치를 알고 있었다.

‘장은이 그 사실을 모르고 죽일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문득 불안감이 엄습했다. 여기서 멍청하게 기다리느니 의심을 받더라도 뒤를 쫓아 기회를 잡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소소정은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틈타 대청 밖으로 빠르게 몸을 날렸다.

“어디 가십니까?”

“헉! 어째서 길을 막는 것입니까?”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이는 고인경이었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하기도 했거니와, 상대가 너무 하찮기도 해서 짜증이 불끈 치솟았다. 그래도 한 문파의 장문이니 무시할 수는 없어 예를 갖췄으나, 말투에 감정이 고스란히 배어 나왔다. 결국, 주변에 있는 무림인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장문주와 백대협이 이미 움직였으니 굳이 가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소소정은 대거리를 할 수 없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인경이 부러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수년 전, 숙부님과 함께 용문파에서 뵈었지요. 오랜만입니다. 저는 고대산파의 장문 고인경입니다. 우선 이리 분란을 일으킨 점 사과드립니다.”

인경은 최대한 깊이 고개를 숙였다. 비단 앞에 있는 상대가 아닌 대청에 모인 무림인들 모두에게 하는 인사였다.

“……그러게, 오랜만입니다.”

소소정은 상대가 대놓고 신분을 밝히자 차마 무시할 수 없어 같이 묵례를 했다. 성질 같아서는 가슴팍을 확 밀쳐버리고 싶었지만, 장문 체면에 안 될 일이었다.

“우선, 제가 버릇없이 이 일에 끼어든 이유에 대해 밝히고자 합니다. 감히 제게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황석파의 장로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인경을 막아야 한다 생각했다. 장은과 은률이 동시에 없는 이 틈에 뜻하지 않은 상황이 벌어지면 큰일이었다. 심지어 인경은 운평표국 사건의 당사자니 무슨 엉뚱한 말이 튀어나올지 몰랐다. 서둘러 한 장로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저으려 할 때였다.

“그래, 나도 어렴풋이 얼굴이 기억납니다. 고근남 형제의 혈육이라 했었지요. 참으로 세월이 빠르군요. 이왕 일이 이리되었으니 허심탄회하게 물어봅시다. 도대체 고대산파는 태을신교와 무슨 관계입니까?”

황석파보다 먼저 선수를 친 이는 용송현이었다. 그는 사실 운평표국의 진실보다 강운선과 고인경의 관계에 더 흥미가 있었다. 태을신교의 마두가 어째서 고대산파 장문을 도와준 것인가?

“맞습니다. 백대협의 말에 따르면 검귀 성곤이 고대산파만 살려주었다지요. 이에 관해 설명해 보십시오.”

드디어 인경을 떨쳐낼 기회를 잡은 소소정은 의심의 분위기를 몰아갔다. 인경이야 어찌 되든 알 바 아니었다. 빨리 운선을 따라가 경전의 행방을 알아내야 했다.

“하하, 진작에 저를 믿을 생각이 없으셨군요.”

이야기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자 인경은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다. 운평표국의 진실을 발설하려 하자 죽이겠다 달려든 황석파, 그 꼴을 방관한 두타공파, 그리고 오직 욕심에 눈이 먼 용문파와 선운검파.

‘이것이 정녕 정파의 의리인가?’

그는 쓸쓸한 눈으로 옆에 선 영준을 돌아보았다. 공허한 눈으로 자신을 마주 보는 동기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인경은 드디어 결심이 섰다.

“아까도 말씀드렸듯, 저는 어째서 태을신교의 교주와 강운선이 저를 살려주었는지 모릅니다. 정말 순수한 측은지심이었는지, 아니면 이렇게 오해와 의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불씨를 던지기 위함인지도 모르지요. 허나, 확실히 깨달은 바는 있습니다.”

인경은 잠시 말을 멈추고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자신이 내뱉을 말의 무게를 알기 때문에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순간이 앞으로는 절대로 오지 않을 기회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저의 태사부님 매월선생 신양선, 그리고 전 장문 고근동 백부님은 일평생 여러분들을 피를 나눈 형제로 여겼습니다. 하여, 멸문을 눈앞에 둔 그날도 무릎을 꿇고 눈물로 읍소하였지요. 부디 고대산파를 져버리지 말아 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곳에 계신 어떤 누구도 그 간절한 외침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네, 고작 열넷이었던 저는 무기력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백부님이, 태사부님이 태을신교에게 살해되는 그날을 똑똑히 기억하는 제가 어찌 그들과 손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또다시 그들과 엮어 고대산파를 욕보이시는군요.”

어느덧 대청은 고요해졌다. 오직 인경의 거친 숨소리와 영준의 흐느낌만이 무림인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었다.

“오대산검의 의리가 고작 이것이라면, 네 저는, 고대산파는 감히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여 오늘로써 위대한 오대산검의 한 축을 내려놓고 일개 문파로 물러나겠습니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인경은 손에 든 하현검의 자루를 힘껏 당겼다. 날이 잠깐 반짝이는가 싶더니 그의 앞섬 한 마디가 후두둑 잘려나갔다.

“아아, 이보게!”

“고문주!”

소소정은 얼굴이 시뻘게져 차마 말리지도 못하고 멀뚱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용송현이 아차다 싶어 재빠르게 이쪽으로 뛰어왔지만, 인경은 일말의 미련도 없이 등을 돌렸다.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건만, 그의 가슴에서는 하염없이 비가 내렸다.

장은의 취임식에 일부러 가지 않은 고유생은 벌써 반나절이 넘도록 안뜰을 서성이고 있었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무려 이십여 년을 갈고 닦은 황석파였다. 그야말로 자신의 한 몸뚱이를 희생하여 이룩해 놓은 영광을 엄한 사람에게 뺏기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이게 다 마세풍 그놈 때문이다.”

느닷없이 운평표국 일에 끼어들어, 황실의 신뢰를 얻으려던 자신의 계획을 완전히 망쳐놓지 않았는가? 어차피 이리 허망하게 갈 거면, 진작에 뒈질 것이지, 꾸역꾸역 산에서 기어 나와 앞길을 방해하니 여간 얄밉지 않았다.

‘그래도 사형인 것을…….’

한때는 누구보다 마세풍을 존경하던 시절도 있었다. 호탕하고 정의로운 그를 본받아 무림의 진정한 협객이 되고 싶었다. 려국에서의 비극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무림의 맹주는 조양 따위가 아니었겠지. 사형이 당당하게 오대산검을 진두지휘하며 무림을 쥐락펴락했을 상상을 하니, 속이 더 뒤집혔다. 이것이 바로 그가 려국인을 소름 끼치게 싫어하는 이유였다.

‘반드시 강운선 그 후레자식을 잡아 갈가리 찢어버리고 말겠다.’

황석파의 무공까지 배웠다 하니 죽여야 하는 이유는 충분했다. 감히 려국인 주제에 분수에 맞지 않는 무공을 배웠다면 응당 받아야 할 죗값이었다.

고유생은 장은에게 밀린 서러움을 운선에게 돌리며 그렇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누군가 미워할 대상이 생기니, 수치심도 조금 옅어지는 것 같았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좀 전까지도 중천에 떠 있던 해가 서서히 기울어지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슬슬 끝을 향해 가고 있으리라. 아무래도 끝까지 식을 모른 척할 수는 없으니 이제 대청으로 돌아가 볼까 하던 참이었다.

부스럭

아주 미세한 소리였으나 그의 예민한 귀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외부의 침입자가 분명하다는 생각에 온몸에 털이 빳빳하게 곤두섰다. 그가 있는 안뜰은 황석파 내부에서도 가장 사적이고 은밀한 곳이었다. 고위급 장로들은 모두 대청에 있을 테니 절대로 내부인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누가 들어왔을까? 본능적으로 큰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자신의 기척을 지웠다.

“방향은 이곳이 맞는 것 같은데?”

젊은 여인의 목소리. 내공을 탄탄히 익힌 듯한 보법이었으므로 꽤 실력이 있는 무인임을 쉬이 추측할 수 있었다. 선운검파의 제자가 길을 잃은 것일까? 고유생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낯선 이의 동태를 유심히 살폈다.

“하아!”

주운은 한숨을 크게 뱉어냈다. 자신이 머뭇거린 사이에 또 운선을 놓친 것은 아닐까 불안했다. 용문산에서 헤어진 이후 수년간, 그저 달아나는 그를 쫓아다니기에 바빴다. 겨우 닿을 만하면 방해하는 온갖 장애물 때문에 몇 마디 말을 나눈 게 고작이었다. 이번에도 같은 상황이 될 것 같아 벌써 마음이 저릿저릿했다.

‘분명 장은과 싸울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진작에 볼일은 끝났을 터, 혹시 나를 잊은 건 아닐까?’

주운은 세차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던 운선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눈망울이야말로 자신을 그리워했다는 증거가 아닌가?

‘다시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을지 모른다.’

황석파의 내부는 미로와 같았다. 이쪽으로 오는 동안에도 몇 갈래의 길이 있었다. 만약 운선이 아까의 장소로 되짚어 왔다면 엇갈렸을지도 몰랐다. 마음만 급해 기다리지 못했으니 자신의 불찰이었다.

“돌아가야겠다.”

차라리 산을 내려가 입구에서 기다리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주운은 들어온 방향으로 다시 나가기 위해 지체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런데,

“어어, 이게 누구신가?”

허연 수염을 쓸어내리며 심술궂게 웃는 이는 황석파의 장로 고유생이었다. 살기 등등한 눈을 치켜뜨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양이 마치 먹이를 노리는 짐승과 같았다.

‘이런…….’

주운은 오른손에 들고 있는 월심의 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이미 처참하게 졌던 경험이 있는 상대이기에 두려움이 먼저 치솟았다.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고작 몇 년을 더 수련했다고 해서 그를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설마 이번에도 그 대단한 사부님이 구해주시려나?”

고유생이 능글능글하게 비아냥거리며 소매를 걷어 올렸다. 쭉 찢어진 입술 사이로 누런 이빨이 드러났다. 그는 내부 침입자의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 조금도 상대를 봐줄 생각이 없어졌다. 스승의 명성만 믿고 날뛰는 어린 계집 하나쯤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흥! 그 정도 실력으로 나를 제압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요?”

주운은 일단 큰소리부터 치고 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소리라도 질러 사람을 불러모으고 싶었으나 오히려 상대를 자극할까 저어되기도 하였다.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잘 빠져나갈 수 있을까?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당장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안 그래도 종종 그날의 치욕이 생각나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아주 잘 되었구나. 내 오늘 너를 죽여 수치심을 씻어내야겠다.”

사람 하나쯤 죽어 나가도 모를 최적의 장소에서, 눈엣가시 같은 사냥감을 만나다니. 드디어 장문 자리를 빼앗긴 분노를 풀 방법을 찾은 것 같았다. 고유생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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