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草畵(초화)
장은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고작 마세풍의 유언을 들어주기 위해서, 죽음을 불사하며 지켜냈던 경전을 넘긴다?
‘설마 진심일까?’
어림없는 소리였다. 분명 다른 목적이 있을 터, 적어도 숨은 의도를 간파하기까지는 대꾸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문주님께서 의심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저 또한 같은 상황이라면 쉬이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운선은 장은을 향해 공수하며 크게 머리를 조아렸다. 존경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만큼 상대를 안심시키는 방법은 없었다.
“인정하지 않으시겠지만 저는 문주님의 사제와 다르지 않습니다. 영명권을 이어받은 순간부터 맺어진 인연인 것을요.”
사뭇 간절한 표정으로 읍소하는 운선의 모습에 장은의 의심이 조금씩 옅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신뢰하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이야기를 더 들어볼 가치는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이미 저와 깊은 인연을 맺은 황석파가 위기에 처했는데 어찌 모른 척할 수 있겠습니까?”
“그게 무슨 뜻입니까?”
장은은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언젠가 고유생이 운선에 대해 언급했던 일이 생각났다. 조양에 버금가는 여우 새끼. 저 요망한 입에서 허튼소리가 나오면 바로 공격해야지. 그는 뒷짐 진 손에 작은 회오리를 모았다.
“백형진이 왜 운평표국의 공물에 경전 이야기를 섞었을까요? 두 가지는 완전히 다른 논점인데 말이지요. 바로 황석파의 위신을 깎아내리기 위해서입니다.”
운선은 들고 있는 경전을 손바닥으로 툭툭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상대가 묵묵히 듣는 것을 보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그는 일부러 이곳에 늦게 나타났습니다. 운평표국 일이 공론화되기를 기다렸을 테지요. 문주님은 그때의 진실을 죽으로 다 밝힐 수 없을 테니, 적당히 얼버무리셨지요. 스승님의 체면과 황석파의 위신을 세워야 했으니까요. 백형진은 그때를 노린 겁니다. 모두의 관심을 저와 이 경전에 쏠리게 하여 황석파의 주도권을 뺏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런.’
장은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으나 심히 당황하였다. 그러고 보니 형진이 굳이 그 때에 맞춰 들어온 것이 퍽 의심스러웠다.
“기실 조맹주는 삼 년 전의 일로 내상을 입었습니다. 같은 이유로 태을신교 역시 잠적하게 되었지요. 네, 문주님의 야망처럼, 황석파가 강호를 주도할 때가 왔습니다. 형진이 굳이 찾아와 이 교묘한 이간질을 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지요. 두려움! 지금까지 조맹주가 장악하고 있던 오대산검의 위계가 무너질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겁니다. 하여, 저는 황석파에 힘을 실어주고 싶습니다. 어디까지나 이곳은 사부님의 문파가 아닙니까? 부디 이 진실한 마음을 곡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운선이 말을 끝내자마자 장은은 큰 몸짓으로 내리 손뼉을 쳤다. 호탕한 웃음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이미 운선의 제안에 답을 하였다.
“아아, 강대협. 하마터면 홀딱 속아 넘어갈 뻔했습니다. 뭐, 고사숙이라면 가능했을지도 모를 전략이었어요. 허나, 저에게는 가당치도 않습니다.”
박수를 멈춘 장은은 왼쪽 소매 안에 주먹을 숨겨 조금씩 기를 모았다. 말로 교란하여 방심하게 한 후에 공격을 감행할 참이었다. 경전이 진짜든 가짜든 무력으로 뺏으면 그뿐, 이제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어째서 제가 거짓이라 하십니까?”
운선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믿어주지 않는 이유를 전혀 모르겠다는 태도였다.
“우선, 백형제의 늦은 참석은 충분히 오해할 만하지요. 저 또한 불쾌했으니까요. 허나, 황석파를 망신 주기 위해 허위 사실을 진술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들에게 돌아가는 이익도 없거니와, 굳이 황석파를 깎아내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에요. 뿐입니까? 당신은 태을신교의 제자이며, 그 경전을 훔쳐 간 것 또한 사실이지요. 애초에 검신은 경전을 보관하는 자였습니다. 스승이 주인이 아니거늘, 당신에게 경전을 가질 자격이 있을 리가요. 경국의 것을 찾는다는데 내 편, 네 편이 어디 있습니까? 두타공파와 황석파를 이간질하려는 얕은수는 먹히지 않습니다.”
운선의 굵은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엄연히 려국의 보물인 것을 경국의 것이라 주장하니 이보다 기막힌 일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지금은 분노를 참아야 했다. 그가 그리는 큰 그림에는 무엇보다 밑그림이 중요했다.
“하아, 문주님은 참으로 순진하십니다. 스승님께서 가끔 큰 제자의 영민함이 지나치다며 애석해하셨는데, 인제 보니 기우였군요.”
“뭐라?”
마세풍의 이야기가 나오자 평온했던 장은의 얼굴이 순식간에 찌그러졌다. 자신을 버린 것도 모자라 뒷담을 하다니, 서운함과 동시에 수치스러움이 밀려왔다.
“해심밀경소의 원본은 조양이 가지고 있습니다. 팔 년 전, 순진한 저는 제 스승 강율천의 유지에 따라 그에게 경전을 넘겼습니다. 하여 제가 절벽에서 떨어질 때는 이미 경전이 없었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당황한 상대를 보며 운선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정도면 충분히 의심의 씨앗을 심은 셈이었다.
“지금 제가 가진 이 경전은 필사본입니다. 때문에, 일부분은 적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마저 채워 완성할 수 있는 이는 오직 장문주뿐입니다. 즉, 황석파에 넘기는 이유는 세 가지! 하나는 마세풍 전 황석파 장문에 대한 보은, 둘은 부족한 경전의 일부 내용을 완성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은 저를 속이고 제 스승 강율천을 죽인 조양에 대한 복수입니다. 비급을 완성하고 무공을 익혀, 부디 두타공파를 무너뜨리십시오.”
장은의 왼쪽 주먹이 스르르 풀려 버렸다. 저 이야기의 반만 진실이어도 운선과 거래를 해볼 만했다. 조양이 그동안 후안무치하게 경전의 행방을 숨겼다 치면, 형진의 행동도 앞뒤가 들어맞았다.
강호인들의 시선을 엉뚱한 데 돌리고, 그 사이 완벽하게 경전을 숨긴다. 여기에 황석파를 이용한다면 조양에게는 금상첨화인 셈이었다.
‘운평 때도 끌어들여 부능파 사숙과 스승님을 죽게 만들더니, 또! 얼마나 우리를 우습게 보는 것이냐?’
이제 그의 분노는 앞에 서 있는 사내가 아니라 백여우 같은 형진과 그 뒤에서 조종하는 조양에게로 향했다.
“그럼 조건은 스승님의 유해를 모시는 것, 한 가지입니까?”
운선은 순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말로 자신의 계획이 맞아들어가니 이보다 더 기쁠 수는 없었다.
“태을신교는 당분간 강호에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조양의 부추김에 잘 대처하시어 지난번과 같은 무모한 싸움이 없었으면 합니다.”
장은은 드디어 운선이 조심스럽게 전해주는 유골함을 받아들었다. 마음이 불편하였으나 한편으로는 당연한 도리라는 생각도 들었으므로 거부감은 없었다.
“우리는 필시 또 만나게 되겠지요. 강대협, 그때는 결코 살려 보내지 않겠습니다.”
장은이 웃으면서 묵례하자, 운선 역시 예를 갖추며 대답했다.
“이것으로 황석파에 대한 보은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제 떳떳하게 본연의 자리로 돌아갈 테니 훗날 적으로 다시 만납시다.”
말을 마치자마자 운선은 대나무 위로 펄쩍 뛰어 올라섰다. 그 몸짓이 어찌나 날랜지 가느다란 대나무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무공이 극묘한 경지에 이르렀으니, 적으로 만나면 참으로 난감하겠구나.’
장은은 돌아서서 천천히 손에 들린 유골함과 경전을 내려다보았다. 이유가 뭐든 손해 볼 게 없는 거래였다. 스승님의 유해를 모셔왔다 하면 자신의 효심을 생색낼 수 있으니 오히려 이득이었다. 그리고,
‘설사 경전이 가짜라고 해도 상관없다. 이걸 빌미로 조양을 떠본다면 진상을 밝힐 수 있을 터, 혹여 그곳의 비밀까지 알아낸다면 더할 나위 없지.’
운선을 보내준 일은 오래도록 마음에 걸렸으나 그 또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분명 그의 영명권은 완성도가 높고 위력적이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권풍 외에는 내세울 무공이 전연 없었다.
‘나와 은률이 함께 나선다면 수십 합에 끝날 실력인 것을…….’
장은은 가슴 춤에 경전을 고이 감추고는 두 손으로 유골함을 감싸 들었다. 이대로 대청으로 나아가 또 한차례 연기를 보일 예정이었다. 비록 스승에게 외면받았으나 끝까지 의를 지키고 효를 다하는 군자의 면모를 만인에게 보여주리라. 안 그래도 훤한 그의 이마가 여름 햇살을 받아 더 반짝반짝 빛이 났다.
주운과 형진은 벌써 수십 합을 주고받았으나 승패가 나지 않았다. 옛정이 있어 필사적으로 공격하지 않으니 싸움이 끝날 리가 없었다. 더구나 형진에게 주운은 남다른 존재인지라 칼끝이 점점 무뎌졌다.
“사저, 운선은 이미 도망간 것 같으니 그만합시다.”
형진이 먼저 칼을 거두자 주운 역시 더 공격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 실력으로만 보면 형진이 좀 더 앞서 있었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아직도 운선을 죽이려 하다니 대체 무슨 원한이 그리 쌓인 것입니까?”
같이 운선을 찾으러 다닐 때만 해도 그의 의중을 전혀 모르던 주운이었다. 하여, 그가 운평표국 때 태도를 확 바꾸자 적잖이 충격을 받았더랬다. 그때의 배신감을 잊지 않았으나, 적어도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친절만큼은 진심이라 생각했기에 그나마 이리 마주 보고 대화라도 나눌 마음이 남아 있었다.
“운선은 스승님을 속이고 사제 곽도평을 죽게 만든 원수입니다. 그 원한을 차마 잊을 수 없으니 저를 비난하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의연하게 대답했지만, 주운의 질책에 쓰라린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주운에게는 누구보다 진심이었으나 그녀의 마음속에는 오직 운선만이 존재했다.
“그저 개인적 원한이라면 어째서 거짓을 폭로하여 마장문을 욕보인 것입니까? 그분의 큰 뜻을 왜곡한 이유를 해명해 보십시오.”
그래도 주운은 형진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어쩐지 그의 위선을 눈감아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완전한 거짓은 아닙니다. 운선이 사부님께 건넨 비급은 온전하지 않으니까요. 당신도 그 경전을 노렸으니 기탄없이 제가 아는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영악한 놈이 도평을 이용하여 도망친 뒤, 사부님은 경전의 비밀을 연구했습니다. 그러나 도통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애초에 거짓 내용이었기 때문이지요. 지난 삼 년간, 폐관 수련을 핑계 삼아 비밀을 밝힐 방법을 연구했답니다. 하여 겨우 단서를 찾으셨지요.”
“단서?”
주운은 좀 전에 대청에서 연설하던 형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의 거짓말 중, 유독 거슬리던 대목이 있었다. 잊었던 이름이 튀어나왔을 때, 굳이 저들을 왜 언급하나 의아하기만 했다.
“혹시, 흑접쌍살을 찾았습니까?”
“네. 좌영이 죽고 나서 우영이 영영 사라진 줄 알았으나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더군요. 얼마 전 흑접영의 부단장을 잡아들였으므로 우영을 찾는 일은 시간문제입니다.”
주운은 어쩐지 일이 더 복잡하게 꼬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게는 우영의 안위야 의미 없지만, 운선에게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게다가 그가 잡힌다면 경전에 숨겨진 비밀이 밝혀질 가능성도 있었다.
“우리 사이에 남은 이야기는 없으니 이만 헤어지지요. 앞으로 다시는 마주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주운은 최대한 빨리 이 소식을 운선에게 전해야겠다 생각했다. 영민한 그라면 대책을 마련할 테니, 사전에 심각한 사태를 막을 수 있을 터였다.
“사저, 당신은 경국인이 아닙니까?”
“네?”
형진의 뜬금없는 질문에 주운이 휙 고개를 돌렸다.
“운선은 려국인입니다. 당신이 이리 감싸고 지켜줄 이유가 없단 말입니다.”
“…….”
태을신교에 들어갔다고 했을 때 짐작했건만, 다른 누군가의 입으로 확인을 하고 나니,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주운의 맥 빠진 모습을 지켜보던 형진이 간절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려국인은 당신의 철천지원수가 아닙니까? 그가 결국 려국을 재건한다고 해도 끝까지 곁에 남을 수 있습니까?”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서는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주운은 줄곧 외면하고 있던 일을 강제로 끄집어낸 형진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이 또한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진실이기도 했다.
“아직은 아닙니다. 그때가 되면 차차 생각해 봐야지요.”
“주운!”
형진의 간절한 외침을 무시하고 주운은 곧장 몸을 돌려 대나무숲을 바람처럼 빠져나갔다. 운선이 사라졌던 그 방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