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欲擒故縱(욕금고종)
주운은 이미 나흘 전에 황석산에 도착하였다. 운평표국의 일 이후 그녀는 사부를 따라 구월산으로 돌아갔다. 운선이 반드시 자신을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소식 없는 운선이 그저 야속했다. 사부가 오지 않았더라면 그야말로 죽을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오직 그를 구하겠다는 일념에 몸을 던졌건만, 그 마음을 외면당한 것 같아 심히 괴로웠다.
삼 년째가 되었을 때, 주운은 필시 운선이 위험에 처한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크게 다쳤거나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돌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이리 무기력하게 기다릴 수 없다.’
주운은 무려 달포 전에 갖은 핑계를 대고 구월산에서 내려왔다. 운평 일대를 돌던 그녀는 마침 장은의 장문 취임식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십여 년을 비워뒀던 장문직을 채우는 이유는 단 하나일 터였다.
‘마세풍이 죽었구나.’
문득 운선의 등에 업혀 있던 노인의 얼굴이 생각났다. 이미 맥이 풀린 듯한 사지를 보고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미 예전에 죽었든, 황석파에서 임의대로 죽었다고 믿든, 운선이라면 절대 모른 척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진짜로 죽은 거라면 유해를 돌려주기 위함일 테고, 아직 살아 있다면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일 터였다. 적어도 주운이 아는 운선은 그런 사람이었다.
초대장이 없었기에 객잔에서 나흘을 무료하게 보냈다. 인경이 원용당의 패거리들과 싸울 때도 무심히 지켜볼 뿐이었다. 그때 날아온 은행 두 알. 주운은 자신의 추측이 정확히 들어맞았음을 알았다.
비록 인경이 끼어드는 바람에 운선의 뒤를 놓쳤으나 실망하지 않았다. 그의 다음 행선지를 알고 있었으므로. 하여, 오전부터 황석산에 올라 그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린 것이었다.
“주운, 어떻게 여기에?”
그녀를 바라보는 운선에 눈가가 금세 촉촉해졌다. 운평 산자락에서 숨어 살고 있었지만, 마음은 항상 구월산에 있었다. 마지막까지 자신을 지키던 주운을 어찌 잊을 수 있었겠는가?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녀의 생사를 확인하고 싶었다.
허나, 스승의 생이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함부로 몸을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모두의 표적인 자신이 발각되면 은거지가 드러나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저 그리움을 견디는 일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네가 오지 않으니, 내가 찾아올밖에.”
“주운…….”
가끔은 참을 수 없이 괴로운 날이 있었다. 꿈에서라도 보고 싶어 부러 잠을 청하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마치 꿈처럼 자신의 앞에 나타났으니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사저!”
형진의 오른팔에서 힘이 쭉 빠졌다. 무려 삼 년만이었다. 너무 그녀가 그리워 구월산 초입까지 갔으나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서기를 몇 번이었다. 이제나저제나 강호에 나올까, 소식을 기다렸는데 정말 원치 않은 모습으로 만난 것이었다.
“매번 이 아이를 죽이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형진의 검이 거둬지는 동시에 주운도 검을 내렸다. 어찌나 활인검의 위력이 강했는지 팔목까지 저렸다. 만약 형진이 힘을 빼지 않았다면 자신 역시 크게 다쳤을지 모른다 생각하니 간담이 서늘해졌다.
“왜 이곳에 있는 겁니까?”
“내 발로 가고 싶은 곳에 왔는데 뭐가 문제입니까?”
어느새 얼굴이 하얗게 질린 형진을 향해 주운이 뾰족하게 쏘아붙였다. 그와는 몇 달간 동행한 적이 있었기에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어색함이 없었다. 다만 매번 운선을 죽이려고 드니 화가 치밀어 오를 뿐이었다.
“당신이 끼어들 일이 아닙니다.”
“흥, 대청에서 당신들이 하던 대단한 거짓말은 잘 들었습니다. 그 목적도 대강 짐작이 가는데,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주운은 여전히 뒤쪽에 서서 남 일 보듯 하는 장은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그 영악함과 뻔뻔함에 치가 떨렸다. 지금도 형진을 이용하여 이익만 챙기려는 심보가 대놓고 눈에 보였다.
“낭자는 혹 검선의 제자가 아닙니까?”
장은은 여인이 들고 있는 검, 월심과 형진이 부르는 호칭을 듣자마자 정체를 짐작해 냈다. 검선과 검신의 사이가 좋지 않다 들었건만, 제자들의 정은 꽤 깊은 모양이었다.
“이리 싸움을 지속하면 누구 한 명은 크게 다칠지 모릅니다. 일단 사적인 감정은 미뤄두고 대화로 풀어봄이 어떨는지요.”
“흥, 당신 목적은 들어보나 마나 뻔할 테지요. 더 들을 이유가 있습니까? 허나, 운선이 이곳까지 왔을 때는 목적이 있을 터, 두 사람이 먼저 해결을 보시지요.”
“사저!”
형진은 주운의 뜻밖의 말에 퍽 당황하였다. 그렇다고 오랜만에 만난 그녀를 공격할 수도 없으니 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
“주운!”
답답한 마음은 운선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이유가 있었다지만 무려 삼 년이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자신이었다. 그런데도 주운은 그를 도와주려 하고 있었다. 죄책감? 고마움? 아니, 형언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가슴을 쿡쿡 찔러댔다.
“운선아, 네가 여기에 온 이유는 대강 짐작이 간다. 내가 이 자를 막고 있을 테니 장문주와 이야기를 끝내려무나. 우리의 회포는 차후에 풀자꾸나.”
아무 말도 못 하고 입만 벙긋거리는 운선을 내려다보며, 주운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위험천만한 상황에서도 갓난아기 다루듯 내려놓던 저 봇짐. 아마도 마세풍의 마지막 흔적이리라.
“주운, 장문주와의 일이 끝나면 반드시 찾아가겠습니다. 하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운선은 드디어 결심이 섰다. 이리 망설일 시간에 빨리 담판을 짓는 것이 더 낫겠다 싶었다. 비록 주변에 듣는 귀가 많아 정확한 때와 장소를 정하기 어려웠으나 어쨌든 주운이 근방에 있으니 곧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사저, 비키십시오. 이번에는 저도 봐 드리지 않을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주운은 운선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검을 고쳐 잡았다. 상대는 결코 물러설 생각이 없는 듯했다. 하여, 이번에야말로 진지하게 대결에 응할 심산이었다. 사실 긴장이 되기도 하였다. 그의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허투루 상대할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못 본 사이에 내력이 깊어지고 검술이 능숙해졌으니 승패를 미리 짐작하기 어려웠다.
예상치 못한 이의 등장에 형진이 막혀 버리자 장은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최대한 득과 실을 고려하여 현명하게 대처해야 했다. 그때,
“장문주,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언제 일어섰는지 다시 봇짐을 등에 짊어진 운선이 바람처럼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뿔싸!”
장은은 그를 놓칠까 봐 서둘러 내력을 끌어올렸다. 두 다리에 뻗쳐간 기운을 양분으로 삼아 경공을 사용하니 곧 운선의 뒤통수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저 쥐새끼 같은 놈을 족쳐서 경전의 행방을 알아내야지. 연후에 반드시 죽여버리겠다.’
장은은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했다. 이 세상에 영명권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이면 족했다. 더구나 자신보다 더 완성형의 경지에 올랐다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스승에게 버림받은 그 날, 장은은 언젠가 이 치욕을 갚고 스승의 머리 위에 올라서겠다 결심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얻은 이 결실을 고작 려국 버러지 때문에 망칠 수는 없었다.
“장문주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바람을 가르던 운선이 속도를 줄여나갔다. 단지 형진과의 거리를 벌리려고 했던 것이지 도망이 목적이 아니었다. 이쯤 하면 따돌렸다 싶으니 더 힘을 뺄 이유가 없었다.
“다시 한번 인사드립니다. 저는 검신의 제자이자 태을신교의 제자 강운선입니다.”
“황석파의 장문, 장은입니다.”
운선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니 장은 역시 예의를 갖춰 공수했다. 죽이는 것은 나중 일이고 지금은 잘 어르고 달래 마음을 얻어낼 작정이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용건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음이 급한 운선은 빨리 일을 매듭짓고 싶었다. 장은과 독대하는 와중에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상대가 워낙에 간교하니 괜히 오래 끌었다가 교묘한 덫에 걸려 낭패를 볼지도 모를 일이었다.
“제가 인연이 닿아 황석파의 전 장문 팔마도사님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보셨다시피 영명권을 이어받았으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평생 보은을 해도 모자랄진대, 감히 황석파에 해를 끼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장은은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 없어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을 죽이지 못해 오른 손목의 힘줄도 끊어냈던 마세풍이었다. 평생 무공을 폐하겠다던 그가 결심을 깨고 다시 키워낸 제자라니. 가히 얼마나 깊은 애정을 주었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운평표국의 일로 크게 다치신 스승님께서는 보름 전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드디어 마세풍의 죽음을 전하자 잠시 잊고 있었던 비통한 감정이 다시금 치받쳐 올라왔다. 평온한 그의 마지막 얼굴이 떠오르니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그러셨군요.”
그러나 장은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이미 이십여 년 전에 그의 마음속에서 마세풍은 죽은 것과 다름없었다. 실체도 없는 존재의 죽음에 애통할 이유가 있겠는가?
장은의 태연한 표정에 자못 당황하였으나 운선은 용기를 내어 말을 이었다.
“스승님은 늘 속세의 일에 초월하셨지만, 오직 한 가지 미련이 있으셨습니다. 태어난 곳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
주섬주섬 봇짐을 풀어 내리는 운선의 손이 조심스러웠다. 혹여 유골함에 생채기라도 날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몇 겹으로 싼 두툼한 천을 벗겨내자 영롱한 빛깔의 백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아.”
장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 풍채 좋던 스승이 저 작은 단지에 담겨 있다고 생각하자, 가슴속에 큰 파도가 들이쳤다. 인생무상, 외면하고 싶지만 언제나 맞닥뜨리게 되는 인생의 진리였다.
‘한때는 천하제일이라 불리던 이가 얻은 것이 고작 손바닥만 한 항아리라니.’
그러나 그는 곧 불편한 속내를 감추고 친절한 말투로 운선에게 물었다.
“혹, 이 유골함을 황석파 사당에 안치해달라는 부탁입니까?”
“네.”
운선은 돌려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한때 끈끈한 사제의 정을 맺었던 사이니 모른체하지는 않으리라. 장은의 실낱같은 양심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건 아니 될 말입니다. 물론 저야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비록 연이 끊어진 지 오래이나, 한때는 부모보다 더 중요한 분이기도 했지요. 오히려 옆에 모시고 못다 한 효를 다하고 싶습니다. 허나,”
운선은 미묘한 감정을 느끼며 장은의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어쩐지 그가 조양을 닮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마문주님은 태을신교를 돕는다며 경국을 배신하였습니다. 일국의 백성으로서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요. 하여 응당 그 죗값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인면수심이 따로 없구나.’
대청에서 스승님의 결백을 외치며 눈물을 짜내던 이는 어디 갔는가? 어느 정도 예상을 했건만, 막상 그의 위선을 목격하니 구역질이 올라올 지경이었다.
“그럼 스승님의 유골함에 문주님이 원하는 무엇을 얹어도 아니 되겠습니까?”
“하하,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제가 임의로 결정할 일이 아니니 안될 말입니다.”
여전히 단호한 장은의 얼굴을 요리조리 살피던 운선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결심이 선 듯, 소매 속에서 작은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해심밀경소를 넘겨주어도 말입니까?”
*** 욕금고종(欲擒故縱):
큰 이득을 위해 작은 것은 과감하게 내어준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