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善遊者溺(선유자익)
인경은 무심하게 곶감 꼭지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고마움을 넘어서 무서울 지경이었다. 자신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운선이 나타나니, 마치 수호령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형제라 믿던 오대산검은 칼을 꽂는데, 태을신교는 매번 나를 살리는구나.’
이 혼란스러운 마음을 어찌해야 할까? 인연이 거듭될수록 정체 모를 감정이 몰려들어 머릿속을 온통 헤집어 놓는 것 같았다.
“쥐새끼처럼 숨어있지 말고 사내답게 모습을 드러내라!”
은률은 허공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떨어져 나간 손가락이 아니라 수치심 때문에 더 고통스러웠다. 비겁하게 숨어서 던졌기에 당한 것이지,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공격이었다. 생각할수록 약이 바짝 올랐다.
“그 말이 과연 맞다. 강운선, 이곳까지 왔다면 필시 이유가 있을 터, 숨지 말고 나와서 시시비비를 가리자.”
형진은 말을 뱉음과 동시에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웠다. 그가 단 한 마디만 더하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기척을 숨겨도 그의 예민한 청력이 소리의 출처를 알아내지 못할 리 없었다.
“…….”
눈치를 챈 모양인지 한동안 묵묵부답이었다. 하긴, 아무리 무공에 자신이 있다 한들, 백이 넘는 수의 무림인들 앞에 나서기는 쉽지 않으리라.
“강대협, 제 스승님과 좋은 인연이 있다 들었습니다. 다른 일들은 다 미뤄두더라도 저와는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은이 앞으로 나서며 두 손을 모아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근저에서 손가락을 잃은 은률이 식식거리고 있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이미 떨어져 나간 손가락이야 다시 붙일 수 없으니 거론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 가지 목적만이 가득했다.
‘사부님의 시신을 수습한 이가 저 애송이라 했지. 아무래도 정이 깊었던 모양이니 그 부분을 자극하면 방도가 생길 것이다.’
장은은 음흉한 속내를 감추고는 세상 불쌍한 표정으로 읍소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청승맞은지, 여러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장문주님,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본의 아니게 싸움에 끼어들었으니 송구할 따름입니다. 하여, 지금은 물러나고 다시 기회를 보아 찾아오겠습니다.”
“아니, 강대협!”
운선의 후퇴에 다급해진 장은은 서둘러 단상에서 내려왔다. 다시 오겠다고 했으나 어디까지나 일방적인 약속일 뿐이었다. 이번에 그를 놓치면 또 언제 찾아올지 장담할 수 없었다.
“흥, 찾았다.”
그때, 운선의 다음 말만 기다리던 형진이 가볍게 몸을 날렸다. 소리가 들려온 쪽은 우측 대나무숲 방향.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았으나 대략적인 위치는 파악할 수 있었다.
휘익!
형진의 뒤를 빠르게 쫓아가는 또 하나의 인영이 있었다. 장은이었다. 운선을 놓치는 것도 낭패지만 형진에게 뺏기는 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다.
뜻밖의 상황에 마음이 몽글몽글해진 무림인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히 저들의 싸움에 낄 배짱은 없었으나 운선을 놓칠까 심히 염려되었다. 둘 중 누구라도 저 소마두를 사로잡는다면, 자동으로 경전의 행방을 찾게 되리라. 운이 좋으면 내용을 알아낼지도 몰랐다. 그야말로 어부지리가 따로 없었다.
챙!
형진이 어림짐작으로 판단한 위치에 칼을 쭉 뻗치자 경쾌한 충돌음이 들렸다.
“잡았다.”
그는 자신감이 붙어 더 과감한 공격을 시도했다. 묵직한 검 끝이 회전하더니 전방에 있는 목표물을 향해 날카로운 검기를 내뿜었다. 얼핏 보면 다소 뭉툭해 보이는 초식이었지만 이것이야말로 활인검의 정수, ‘활인양생(活人養生) ’이었다.
“백사형, 안 본 사이에 실력이 일취월장하셨습니다.”
상대를 약 올리는 듯한 말투였으나, 기실 운선은 형진의 공격에 놀란 참이었다. 물론 수년을 한 문파에서 동문수학했으니 검법에 관해 뻔히 알고 있었다. 허나 무공이란 원래 누가 시연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그 대단한 매월검도 인경이 사용할 때는 범상한 검법에 지나지 않는 것이 그러했다.
“허튼소리 말고 경전을 내놓아라.”
“역시 목적은 그것이었군요.”
운선은 코웃음을 치며 형진의 공격을 묵묵히 받아내었다. 어차피 경공에 있어서는 그를 따라가지 못했으므로 도망친다 해서 길이 열릴 것 같지 않았다.
‘하아, 괜한 오지랖을 떨다 일이 틀어졌구나.’
운선이 황석파 내부에 잠입한 때는 막 취임식이 끝난 직후였다. 장은의 됨됨이를 알아보고자 몰래 엿듣자 한 것이 이 사달의 시작이었다.
만약 인경의 일을 모른체했더라면 어땠을까? 장은에게 스승의 유골함을 맡기려던 계획이 차질 없이 성공했을 터였다. 그러나, 좌중을 향한 인경의 발언은 운선의 가슴에 작은 울림을 주었다. 스승님의 뜻을 지키려는 그 모습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참으로 바른 심성을 가진 협객이다.’
운선은 인경을 구해낸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 이 위기의 순간을 넘기는 것이 최대 난제가 되었을 뿐.
“강대협!”
형진의 화려한 초식을 막아내기도 벅찰 무렵, 이번에는 바람을 가르는 권풍이 눈앞으로 불어닥쳤다. 이 또한 운선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영명권의 초식이었다.
“장문주, 저는 당신과 오늘 처음 만났는데 어찌 이리 매서운 공격을 하십니까?”
이미 좀전의 연설로 그에게 크게 실망한 운선은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그가 구사한 공격은 ‘영명소한’으로 상대를 힘으로 제압할 때 사용하는 공격 일변도의 초식이었다.
“강대협께서 워낙에 무공이 출중하시니 혹여 제가 다칠까 염려되었기 때문입니다. 악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말과 달리 장은이 내지르는 주먹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애초에 그는 운선과 대화할 생각이 없었다. 되도록 빨리 상대를 제압하여 걸리적거리는 형진을 떼어내고 싶을 뿐이었다.
‘참으로 표리부동한 사람이구나.’
운선은 자신도 모르게 혀를 끌끌 찼다. 마세풍은 자신의 제자에 관한 이야기를 함부로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다만 술이 거나하게 취하는 날이면 주정처럼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내 무공 전부를 전수할 진정한 제자가 생겼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구나.”
이제는 스승이 왜 그런 넋두리를 했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그가 영리하고 실력이 출중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모든 언행에 진실성이 없었다.
“영명소한(小寒)!”
장은은 상대가 한눈을 판다고 느끼자마자 여지없이 잔악무도하게 주먹을 휘둘렀다. 계속 피하고만 있어 실력을 가늠하기는 어려웠으나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자신보다 나을 성싶지는 않았다. 더구나 반대편에서 형진의 예리한 검날이 번쩍이고 있으니 운선을 굴복시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어쩔 수 없군.’
운선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 모두 그에게는 사형과 다르지 않아서 섣불리 공격하지 못한 면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시시콜콜한 사정을 봐줄 때가 아니었다. 계속 이러다가는 목숨이 위험해질 것 같았다.
부드러운 기운이 손바닥에 가득 모이자 운선은 주먹을 그러쥐고 한 바퀴를 돌렸다. 곧 손가락 사이로 바람이 새어 나와 주변 공기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영명우수(雨水)”
왼쪽에서 치고 들어오는 장은의 공격을 피하는 동시에 오른쪽의 형진을 향에 주먹을 내질렀다. 형진은 충분히 막을 수 있으리라는 판단에 검을 수직으로 세워 권풍을 받아냈다. 그러나 상대는 삼 년 전에 겨뤘던 그때의 운선이 아니었다. 동일한 초식이 분명했으나 그 위력은 확연히 달랐다.
“억!”
형진은 무려 스무 걸음이나 뒤로 물러선 다음에야 자세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그나마도 대나무가 등을 받치지 않았다면 고꾸라질 뻔하였다.
“영명권?”
장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세풍의 새 제자가 운선임은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 완성도를 갖추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아니 오히려 담고 있는 내력은 자신보다 훨씬 웅혼해서 더럭 겁이 났다.
‘힘으로 밀어붙일 일이 아니다.’
장은은 바로 뻗치려던 내력을 순식간에 거둬들였다. 형진과의 싸움을 관망한 후에 손을 써도 늦지 않았다. 오히려 힘을 어느 정도 빼놓아야 쉽게 승기를 잡으리라 생각했다.
그가 성급하게 달려든 이유는 오직 운선을 얕잡아 보았기 때문이었다. 머뭇거리다 형진에게 선수를 뺏기면 끝이었다. 경전의 지분을 가지고 싸우느니 차라리 자신이 먼저 손을 써 소유권을 주장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인제 보니 형진의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영명권을 어디까지 익혔는지 모르나, 내력은 사부님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하여 굳이 나서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있겠는가?’
장은이 급격히 거리를 두고 물러나자 운선에게 숨 쉴 여유가 생겼다. 등에 메고 있는 유골함이 다칠까 방어에만 급급했기에 두 사람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장은의 권풍은 전력을 다해야 받아낼 수 있는데 반대편의 활인검이 시선을 분산시키니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장문주는 형진을 이용하여 내 힘을 뺄 생각이로군.’
지금까지 파악한 그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그 말이 정답이기도 했다. 형진에게 뒤처질 실력은 아니었으나 쉬이 승기를 잡을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내력은 월등히 높았지만, 검법에서는 자신이 한참 모자랐다.
“네 이놈!”
반면 형진의 분노는 점점 더 불타올랐다. 장은이 팔짱을 끼고 물러나는 모습을 보자, 모멸감까지 느꼈다.
‘네가 감히 나를 얕잡아 보았겠다. 흥, 얼마나 멍청한 생각이었는지 보여주마.’
형진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단전에 힘을 주었다. 묵직하고 뜨거운 기운이 단단하게 뭉쳐졌다. 천천히 검 쪽으로 집중하니 푸른 검광이 주변으로 은은하게 번져갔다.
“활인유심(活人唯心)”
지난 삼 년 동안 밤낮없이 연마한 필살기였다. 시묵공의 기운과 활인검의 묵직함을 조화롭게 규합하여 펼치는 이 초식은 그야말로 두타공파 무공의 정수였다. 설사 배운다 해도 온전히 내력을 싣기 어려우므로,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 이는 오직 조양밖에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운선에게 모욕적인 패배를 당한 이후 형진은 오직 이 초식만 파고들었다. 이것만이 신공을 파할 수 있다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묵직한 검기가 안면으로 뚫고 들어오자 운선은 차마 받아내지 못하고 몸을 비틀어 피했다. 어찌나 위력적인지 공격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게다가 무거운 봇짐을 메고 있으니 영락없이 당하고 말 상황이었다.
검기를 한 치 정도 흘려보내고 나자 잠깐의 틈이 생겼다. 운선은 적어도 한 번은 검을 거둬들일 것이라 짐작하여 서둘러 등에 지고 있던 유골함을 내려놓았다. 내내 완벽한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던 그는 그 잠깐에 허리를 완전히 굽힌 자세가 되고 말았다.
“활인유심!”
형진이 그 찰나의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검을 몸쪽으로 당기지 않고 출수한 채로 방향을 꺾었다. 수직으로 내려오는 검기는 단순했으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운선의 머리로 꽂혔다. 굽힌 자세로 중심이 무너진 운선에게는 차마 피할 수 없는 일격이었다.
‘이런.’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할 수 없이 운선은 두 다리를 쭉 찢어 바닥에 주저앉았다. 비록 자세는 더욱 흐트러졌으나 높이를 낮추니 주먹 하나 들어갈 정도의 여유 공간이 생겼다.
“영명곡우(穀雨)”
태을신공의 뜨거운 기운이 권풍과 만나니 주먹에서 작은 회오리바람이 만들어졌다. 칼날은 피할 수 없겠지만 치명상은 면하는 최선이었다. 주먹이 얼마만큼 활인검의 무게를 견뎌내느냐가 관건이었다.
챙!
“어?”
분명 차가운 검의 촉감이 느껴져야 하는데 맑은 금속성이 들렸다. 운선이 이상하여 고개를 들자 눈앞에서 낯익은 검신이 바르르 떨고 있었다.
“설마……. 주운?”
“찾았다.”
형진의 검을 받아내느라 안간힘을 쓰면서도 주운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
*** 선유자익 선기자추(善游者溺 善騎者墜):
수영 잘하는 사람이 물에 빠지고, 말을 잘 타는 사람이 말에서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