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結草報恩(결초보은)
영준은 화들짝 놀라 인경의 옷소매를 붙잡고 늘어졌으나 이미 늦어버렸다. 그 역시 이 기막힌 촌극에 분노했지만, 그렇다고 이리 나설 만큼 무모하지는 않았다. 하여 당연히 인경도 잘 참겠거니 했던 것인데, 이 사달이 나고 말았다.
“아니, 고문주께서는 어찌 그리 엉뚱한 곳에서 나타나신 겁니까?”
삼 년 전, 그를 만난 적이 있던 형진이 퍼뜩 달려 나와 인경의 손을 마주 잡았다. 눈치 빠른 장은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아뿔싸, 고대산파가 참석하리라 예상하지 못한 것이 패착이구나.’
그러나 한편으로는 요행히 잘 넘어갈 수 있겠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들었다. 그래봤자 다 무너져가는 문파의 어린 조무래기일 뿐이지 않은가?
“제가 어디에서 나타나든 그건 상관없습니다. 허나, 어째서 두 분은 이 많은 강호인 앞에서 거짓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형진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물끄러미 상대의 눈을 바라보았다. 순수한 정의감. 하찮고 어리석었으나 눈망울만큼은 무시할 수 없이 순수하고 맑았다.
“고문주님, 그날 보지 못한 이면의 사건이 매우 많았습니다. 하여 이제 와 진실을 밝히려는 의도일 뿐, 한 치의 거짓도 없습니다.”
“백대협! 그 공물이 무엇이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지 않습니까?”
인경은 뻔뻔한 형진의 태도에 소름이 쪽 끼쳤다. 방금까지만 해도 강호에서 가장 존경했던 협객이 바로 이 사람이었다. 그런데 진실을 왜곡하고 의협을 짓밟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자신의 목숨을 수차례 구해준 강운선을 그저 사기꾼, 협잡꾼으로 몰아가는 이가 과연 선한 정의인가?
결연한 의지의 동공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어떻게든 인경을 설득하려 했던 형진은 진득한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는 이 어린 후배를 포기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하아, 고문주님. 형제와 같은 정리를 생각하여 굳이 꺼내지 않으려 했으나 이리 나오시니 어쩔 수 없겠습니다.”
좌중을 돌아보는 그의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끝까지 의리를 지키려 했음을 보여주기 위한 혼신의 연기였다.
“고문주는 그날 새벽, 운평표국의 표두와 표사들을 두고 현장을 빠져나갔습니다. 물론 실전 경험이 부족한 어린 소협들이 그 참극을 겪어내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겠지요.”
“백대협!”
예상치 못한 전개에 놀란 인경은 서둘러 반격하려 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인경 일행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실망과 배신감이 가득했다.
“그러나 제가 굳이 고대산파의 치부를 드러낸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형진은 고개를 휙 돌려 인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분명 검귀 성곤이 퇴로를 막고 있었건만, 어찌 빠져나가셨을까요? 고대산파 그 누구도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말입니다.”
“그건, 그건…….”
인경은 그만 입이 턱 막혀 버렸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성곤은 뜬구름 같은 질문만 던지고는 쉬이 탈출로를 열어주었다. 마치 같은 편에게 길을 내어주듯이.
“혹 그들과 모종의 관계가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아…….”
형진이 일방적으로 몰아붙이자 인경의 입은 딱 붙어버리고 말았다. 이곳에 모인 강호인들 모두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에 대한 가치 판단이 끝난 상태였다. 누구나 존경해마지 않는 두타공파의 주장이니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역시…….’
형진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별 볼 일 없는 애송이 하나 뭉개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사실 너무 싱거워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이쯤에서 물러나 잠자코 있겠다면 그만둘 생각도 있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물러서지 않겠다.’
인경은 굳게 다문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물론 고대산파 장문으로서의 책임감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양심을 지키고 싶었다. 어째서 마세풍은 자신의 문파와 척을 지면서까지 태을신교를 도왔는가? 언제나 약자를 보호하고 의를 중시하는 그의 신념이 그리할 수밖에 없도록 이끈 것이었다.
“맞습니다. 태을신교의 교주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고대산파를 공격하지 않았고, 저는 비겁하게 도망쳤습니다. 그 책임은 고대산파가 아니라 오롯이 결정을 내린 저에게 있습니다. 벌을 주신다면 모두의 앞에서 달게 받겠습니다.”
인경은 형진의 어깨너머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장은을 향해 돌아섰다. 한없이 인자한 표정 뒤에는 자신을 향한 무시와 환멸의 감정이 숨겨져 있었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선다면 그날의 진실은 영영 저 깊은 땅속에 묻히고 말겠지요. 저는 마문주님의 희생을 욕보이게 할 수 없습니다. 그분은 결코, 정에 이끌려 태을신교에게 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 큰 뜻을 폄훼해서는 안 됩니다. 천서국에 보내려던 공물의 정체는 바로,”
인경이 말을 다 끝맺기도 전이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섬뜩한 빛을 뿌리며 그의 신주혈을 향해 날아왔다. 그와 동시에 비틀면서 회전하는 형체가 인경의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문주님!”
영준은 몸을 날려 검날을 받아냈다. 겨우 속도는 따라갔으나 압도적인 힘에 눌려 흙바닥에 두 치 정도 발이 박히고 말았다.
“이게 무슨!”
형진 역시 예상치 못한 기습에 놀라 뒤로 두 발자국이나 물러섰다. 또한,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인경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를 귀하기 위함이었다.
“감히 오대산검에 끼워주었더니 주제를 모르는구나!”
그림자의 정체는 풍림 정은률이었다. 그는 인경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다 되어가는 상황에 재를 뿌린 것으로도 모자라, 감히 황석파의 내부 일에 끼어든 죄였다.
“당신들이 오대산검의 실체라면, 나 또한 이 안에 끼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어느새 인경의 손에는 하현검이 들려있었다. 겨우 은률의 검을 받아내고 있는 영준의 뒤를 받치고서 적을 향해 일장을 뻗었다.
급하게 들이닥치느라 어정쩡한 자세로 검부터 내질렀던 은률은 자신도 모르게 손아귀에 힘을 살짝 빼고 말았다.
‘이런.’
그 틈을 노리지 않고 인경은 빠르게 영우(靈雨)의 초식을 사용하여 상대와의 거리를 벌렸다. 고작 숨 한 번 내쉴 정도의 짧은 순간이었다.
“비월강지(飛越剛志)”
그러나 은률의 실력은 애초에 인경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잠시 놀랐을 뿐, 곧 자세를 바로잡은 그는 벼락같이 거센 검광을 쏟아내며 상대의 요혈을 찔러 들어갔다.
‘아아, 목숨을 구하기는 틀렸군.’
형진은 둘 사이에 끼어들 이유가 없었다. 누가 죽든 다치든 그에게 손해될 점이 없기 때문이었다. 운지행을 사용하여 재빨리 장은의 근처로 피신했다.
“아까운 인재가 이렇게 허망하게 사라지는군요.”
“함부로 입을 놀린 대가이지요.”
형진의 안타까움을 담은 한숨에 장은이 차갑게 대답했다. 그 역시 은률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고대산파 따위 강호에서 사라지는 일이 뭐 그리 대수냐 싶었다. 마세풍의 큰 뜻이니 뭐니 지껄이는 저 천둥벌거숭이를 살려둘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하현천무(下弦天武)”
인경은 하현검의 초식을 정석대로 사용하고 있었으나 유효한 공격은 하나도 먹히지 않았다. 수비만으로도 버거울 지경이었다. 아무리 매월검이 대단한 검법이라 할지라도 내공이 거의 실리지 않은 초식이 고수에게 위협이 될 리 없었다.
“고작 이 정도 실력으로 나댔단 말이냐?”
은률은 슬슬 시시해졌다. 이리 가벼운 상대와 여러 합을 맞추자니 어쩐지 자존심이 상했다. 매월검의 초식이 정교하여 섣불리 공격을 시도하지 못했을 뿐, 점점 검법의 반복되는 형식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마무리!”
그는 비월검을 높이 들어 허공에 작은 원을 두 개 그렸다. 푸른 검광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쏟아지며 검 주인의 몸을 보호하듯 감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인경의 왼쪽 가슴으로 살기 어린 검기가 쭉 뻗어 들어왔다.
단순한 초식이었으나 화려한 매월검법의 초식을 꿰뚫은 쾌검이었다. 또한, 아직 초식과 초식 사이에 간격이 생기는 인경의 단점을 완전히 파악한 영리한 일격이었다.
“이제 끝이군.”
고작 이십여 합도 겨루지 않고 끝난 싸움에 고수들은 모두 혀를 끌끌 찼다. 고대산파의 몰락을 목격한 것 같아, 씁쓸하기도 했다. 매월 신양선과 함께 강호를 누비던 선배들은 차마 마지막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매월검법의 명맥이 끊긴다 생각하니 더럭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하하.”
은률의 검 끝이 자신의 단중혈에 닿는 순간, 인경은 코웃음이 났다. 참으로 비루한 삶이었다. 모두가 자신을 위해 목숨을 내어주었건만, 이리 망신스럽게 죽게 되었으니 허망하기만 했다.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거짓을 묵인하고 비겁하게 사느니, 꿈틀대기라도 한 게 퍽 자랑스러웠다.
핑!
“억!”
외마디 소리와 함께 은률은 자신의 보검 비월을 놓치고 말았다. 스승님이 돌아가신 후, 단 한 번도 몸에서 떨어뜨려 놓은 적이 없는 검이었다. 웬만한 고수가 아니고서야 그에게서 무기를 앗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누구냐?”
냅다 소리를 지르기는 했으나 손이 저려 검을 바로 집을 수도 없었다. 바닥에는 검뿐만 아니라 그의 검지도 함께 나뒹굴고 있었으므로.
“이것은?”
인경의 단중혈에 검 끝이 닿기 직전, 영준은 다 틀렸다 생각했다. 장문의 죽음은 그야말로 고대산파의 멸문과 다름없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여느 평범한 검객의 수준이겠지만, 남은 고대산파의 제자 중에서는 인경의 실력이 제일이었다. 쭉정이만 남은 고대산파는 이제 일개 소규모 문파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때, 영준의 눈앞으로 불그스름하고 얄팍하게 둥근 무언가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기시감! 벌써 수차례 비슷한 상황을 겪었기에 그것이 인경을 구하기 위한 암기임을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은률의 손가락을 자르고 떨어진 그것의 정체를 알아냈다.
“설마 곶감?”
영준의 입가에 서서히 웃음꽃이 피어났다. 역시 그 사람이 나타났구나. 마치 지켜보고 있었던 것처럼 위기의 순간마다 찾아오는 필생의 은인. 그도 이제 그들의 은인을 더 이상 태을신교의 악당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 버러지 같은…….’
은률은 바닥에 떨어진 손가락과 곶감 꼭지를 확인하고는 강한 모멸감을 느꼈다. 검에 있어서 무림 최강이라고 자부하는 자신을, 저깟 오물로 상대하다니. 살점을 질겅질겅 씹어 삼켜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누구냐?”
분노에 가득 찬 은률이 다시금 소리를 버럭 내지르자, 어디에선가 느릿하고 또박또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스승의 그 제자라더니. 양심 없고 목소리 큰 건 똑같구나.”
내내 심드렁하게 구경하고 있던 형진의 얼굴이 조금씩 상기되었다. 저 태연하고 건방진 목소리를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쥐새끼처럼 빠져나가더니 기어코 돌아와 강호를 들쑤시려함이 틀림없었다. 재고 따질 생각도 없었다. 오직 한 가지 목적만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번에는 결코 살려 보내지 않으리라.
“강운선! 그 파렴치한 낯짝을 좀 보자꾸나!”
형진의 입에서 그 유명한 이름이 불리는 순간, 대청에 있는 모든 무림인의 눈에서 살기가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