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67화 (67/209)

#67화. 欺罔(기망)

백형진의 등장에 대한 반응은 반가움보다는 놀라움에 가까웠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초대객들 대부분은 황석파 장문의 숨은 의도를 눈치챈 터였다. 조맹주의 공석을 겨냥한 정치질. 따라서 두타공파에서 아무도 오지 않은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 와중에 두타공파가 나타났으니 어찌 놀라지 않았겠는가?

“더위가 극심하여 늦어졌습니다. 설마 일부러 오지 않았다 오해하지는 않으셨지요?”

얼핏 정중해 보였으나, 뼈가 있는 말이었다. 장은은 그보다 한참 어린 후배의 뻣뻣한 태도가 불쾌했지만, 평소처럼 친절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럴 리가요. 이리 왕림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허나 아직 조맹주님께서는…….”

“네. 폐관 수련이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상대가 우울한 표정을 짓는 바람에 장은은 더 깊이 묻지 못하고 두타공파를 자리로 안내했다. 형진이 반대편에 앉은 용송현을 바라보며 정중하게 묵례를 하자 그 역시 공수하여 예를 갖췄다.

‘묵안 조상원이 죽고 나서는 용문파와 두타공파가 더욱 두터운 관계가 되었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가 보군.’

인경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왠지 모르게 착잡해졌다. 한편으로는 이 와중에도 고대산파의 불참을 거론하지 않는 것이 퍽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기필코 이들이 무시할 수 없는 문파로 성장하리라.’

그러나 과연 자신의 미천한 실력으로 가당키나 한 일일까? 인경은 복잡한 속내를 숨기지 못하고 입소리를 쩍하고 냈다. 목구멍으로 쓴 물이 넘어가 한참 동안 따끔거렸다.

“더는 이견이 없으시니, 마저 이야기를 진행하겠습니다.”

장내의 어수선함이 가라앉자, 장은은 다시금 단상 위로 올라갔다. 아까보다 더욱 엄숙한 표정과 진중한 목소리였다.

“황석파는 그 참혹한 새벽, 너무나 위대하고 소중한 두 분을 잃었습니다. 오대산검을 이끌어오셨던 팔마 마세풍과 비월 부능파.”

그들의 죽음이 운평표국과 관련이 있다는 말은 지금까지 그저 낭설에 불과했다.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하자, 무림인들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보다 더 확실한 증언이 어디 있겠는가? 그의 제자이자 황석파 장문이 직접 시인한 격이었다.

“아무리 태을신교가 강하다 한들, 절세고수라 추앙받는 두 분이 모두 돌아가실 수 있단 말입니까?”

여전히 진위를 헷갈리는 누군가의 질문이었다. 그리고 선뜻 무시하기에는 매우 공감이 가는 의문이기도 했다.

눈을 잃은 부능파는 논외로 두더라도 팔마도사가 누구인가? 속세를 떠났다고 하나,  강호에서 그의 영명권을 이겨본 이가 없었다. 하물며 그는 조맹주의 시묵공을 받아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태을신교의 무서움이 그와 같습니다. 정당하게 싸워봤자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 그들이, 계략을 쓴 것입니다. 운평표국 내부에는 세작이 있었고 그의 농간에 공물을 실은 마차가 주저앉고 말았지요.”

장은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운평표국을 엄호하며 뒤따르던 황석파의 두 고수는 협곡에 갇힌 공물 수레를 지키려 했다. 그러나 칠원성군은 이미 표국 내부에 심어둔 세작과 내통하여 진입로와 퇴로를 모두 막았다. 이쪽보다 세 곱절이 넘는 교도들을 이용하여 공물을 다 빼돌린 그들이, 이번에는 황석파의 고수들을 공격했다.

“아시다시피 저의 스승이신 마문주님은 태을신교의 대마두 검귀 성곤과 오랜 친분이 있었지요. 공물만으로 만족하겠다 안심시킨 그는 도리어 그 믿음을 이용해 스승님께 치명상을 입히고 말았습니다.”

여기까지 말을 마친 장은은 긴 소매를 들어 올려 눈에 맺힌 물기를 찍어 눌렀다. 통탄을 감추지 못하는 장문의 눈물에 황석파의 백여 명의 장로와 제자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인경의 꼭 쥔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황석파의 장문은 거짓을 지어 말하고 있었다. 물론 인경 역시 완벽하게 전후 상황을 파악하지는 못했다. 워낙에 끔찍하고 참혹했기에 내 편, 네 편조차 분간이 되지 않는 난장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했다.

‘공물은 보물 따위가 아니라 삼백의 려국인이었다. 하여 마세풍은 태을신교의 편에 선 것이다. 나 역시 공물의 정체를 알았더라면 결코 수송을 맡지 않았으리라.’

황석파의 위신과 체면을 고려하기 이전에 태을신교가 왜 그런 기습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밝히는 게 먼저여야 했다. 그것은 마세풍이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협객으로서의 양심이었다.

“외람되오나 문주님, 한 말씀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네. 당연하지요.”

숙연한 분위기를 깨고 나선 이는 형진이었다. 그는 장은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우아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내의 분위기를 사로잡는 기술을 익히 아는 이의 몸짓이었다.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은률은 대놓고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이목구비부터가 퍽 마음에 들지 않는 작자였다.

“여차하면 제가 나서 저놈의 주둥아리를 다물게 하겠습니다.”

은률은 장은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조금도 허튼소리가 아니었다. 그는 사형 장은을 스승인 부능파보다 훨씬 더 존경해 마지않았다. 저 애송이가 감히 사형을 욕보인다면 죽음을 불사하더라도 용서치 않을 작정이었다.

“나에게도 생각이 있으니 아직은 나서지 말아라.”

그러나 장은은 침착하고 여유로운 태도로 사제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저 정도 객기는 충분히 예상한 바였다. 하여 그를 끌어들인다면 되레 유리한 입장을 선점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사실 저 또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스승님을 대신하여 일에 책임을 맡았고 당시의 일을 낱낱이 보고 겪었습니다.”

인경은 형진이 나서 진실을 밝히려 하자 안심이 되었다. 여의치 않으면 자신이라도 나서야겠다고 생각하던 차라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형진이 누군가? 활인! 어느 문파보다도 의를 중시하는 두타공파의 차세대 문주였다. 또한, 정의롭고 선하기로는 강호에 견줄 사람이 없다 하였다.

‘장문주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백대협이 있으니 의도대로 무림인들을 선동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인경은 흐뭇한 표정으로 형진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아직은 오대산검에 희망이 있었다. 두타공파와 형진은 믿을 만한 정파의 진정한 협객이었다.

“태을신교가 노린 공물,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인경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태을신교를 감싸려는 마음은 없었다. 다만 시시비비를 가려 더는 선악을 구별하는 일에 혼란을 겪고 싶지 않을 뿐.

“백형제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장은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웃음기가 사라졌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 말을 꺼내는 것인가? 설마 려국인에게 측은지심이라도 생겼단 말인가? 그럴 요량이라면 형진 역시 마세풍과 다르지 않았다.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기 전에 입을 다물게 해야 했다.

장은은 은근히 은률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형진이 허튼소리를 꺼내는 즉시 그를 태을신교의 세작으로 몰아가리라. 그다음은 은률에게 맡기면 될 터였다. 아무리 형진의 실력이 출중하다 한들, 은률의 검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사형의 의중을 읽은 은률이 자신만만하게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의 음모를 아는지 모르는지, 형진은 태연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저는 그곳에서 죽은 줄 알았던 옛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제야 태을신교가 진짜 노리는 목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지요.”

모두의 시선이 쏠리자 그는 부끄럽다는 듯,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펼쳐 천천히 흔들었다. 바람결에 살랑살랑 날리는 머리카락 때문인지 마치 신선과도 같은 자태였다.

은률은 천천히 자신의 검집에 손을 뻗었다. 저 얄미운 주둥아리가 뱉어낼 바로 다음 그 말에 집중하면서.

“사문에 숨어들어 사부님을 농락했던 그 괘씸한 아이가 죽지 않고 그곳에 있더란 말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는 검신의 제자 강운선이었지요.”

“아니, 그럼!”

“설마…….”

다시 한번 장내에 열기가 들끓었다. 강운선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모두의 머릿속에는 딱 한 가지만 생각났다. ‘해심밀경소’ 그의 부활은 영영 소실된 줄 알았던 전설의 비급이 다시금 세상에 나타났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실 그 공물 안에는 해심밀경소가 있었던 것입니다. 태을신교는 팔 년 전 무림대회 날처럼 그 비급을 노린 것이고 운선이 세작이 되어 결국 일에 성공하였습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장문주님!”

형진은 장은을 돌아보며 두 손을 공손히 모아 물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장은은 여태 보여준 행동들의 의미를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인제 보니 우리 편이군.’

장은은 슬며시 손을 내저어 은률의 다음 행동을 저지시켰다. 저 여우 버금가는 젊은이와는 손을 잡아야겠다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을 이곳에 모이게 한 이유입니다.”

그는 누구보다 순발력 있게 말을 받았다. 애초에 황석파의 비극을 거름 삼으려 했던 계획은 접어두고 빠르게 태세 전환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원래의 전략보다 훨씬 수월하게 강호인들을 부추길 수 있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강운선은 수년 전,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때 그의 품에 분명 해심밀경소가 있었는데 어찌 황실까지 굴러 들어갔단 말입니까?”

여태 미심쩍은 표정으로 앉아있던 소소정이 의문을 제기했다. 그녀는 사실 그 경전의 이름을 듣는 순간부터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저들의 말이 진실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그것은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백형진이 다시 자연스럽게 끼어들자, 장은은 슬며시 그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지금으로서는 누구보다 그의 말이 잘 먹힐 테니 괜히 자신이 나서 일을 그르칠 필요는 없었다. 되레 그와의 신뢰 관계를 잘 쌓아둔다면 추후 일을 도모할 때, 수월할 터였다.

“운선이 가지고 있던 경전은 진짜가 아니었습니다. 강가장을 침입할 당시, 흑접쌍살은 진짜 경전을 탈취했습니다. 그는 사실을 숨기고 두타공파에 잠입하였지요. 스승님의 호의를 이용하여 자신의 하찮은 목숨을 구하고 오대산검을 이간질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다행히 스승님께서는 이를 간파하셨습니다. 운선이 사라진 이후 홀로 흑접쌍살을 수소문해 진짜를 얻게 된 것이지요.”

“아아…….”

드디어 내막을 알게 된 강호인들은 저마다 탄성을 터뜨렸다. 조맹주의 명석함을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역시 오대산검의 수장은 조양밖에 없다는 굳은 선망이 그들의 가슴 속에 자리 잡았다.

“그렇다면 어찌 서이국의 공물로 보내려 한 것입니까?”

용송현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조양은 그 귀한 경전을 타국에 바치려 한 셈이었다. 그것은 명백히 매국 행위였다. 애국심이 강한 그에게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공물은 서이국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번에는 다시 장은이었다. 그는 형진의 어깨를 살짝 눌러 앉히며 앞으로 한발 나섰다. 형진보다 한 뼘 정도 손이 작았으나, 어쩐지 훨씬 더 커다란 사람이 찍어 누르는 형세처럼 보였다.

“황제 폐하의 허락하에 태을신교를 유인하려 했을 뿐입니다. 서이국은 빌미였을 뿐, 애초에 공물을 보낼 생각이 없었습니다. 검귀 성곤을 잡으려던 계획이었으나 일이 틀어지고 만 것이지요. 하여 저는 이 자리를 빌려 여러분께 도움을 청하고자 합니다.”

장은은 쿵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무릎을 꿇었다. 좌중을 돌아보는 충혈된 그의 눈에는 굳은 결의가 가득했다.

“이 위대한 나라 경국에서, 려국의 잔당인 태을신교를 몰아낼 수 있도록 힘을 모읍시다.”

“그럽시다.”

“옳습니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내 못마땅한 표정이던 용송현조차 주먹을 불끈 쥐며 발을 굴렀다. 소소정은 경전의 행방을 안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선운검파 모두 검을 높이 치켜들며 우렁차게 구호를 외쳤다.

장은과 형진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미리 짜고 맞춘 말이 아니었으나 기가 막히게 절묘한 전술이었다. 물론 감추고 있는 속셈은 각각 따로 있었다. 허나, 지금만큼은 누구보다도 최고의 단패가 아닐 수 없었다.

“다 거짓입니다!”

그때였다. 앳되었으나 결기가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청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 소란스러웠던 이들이 기세에 눌려 순식간에 입을 다물 정도였다. 모두의 시선이 단번에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쏠렸다.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단정한 차림새의 이목구비가 고운 청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쪽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고대산파의 장문, 고인경이 황석파의 새로운 장문을 뵙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