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66화 (66/209)

#66화. 羊頭狗肉(양두구육)

수년 만에 열리는 오대산검의 무림대회는 예상보다 훨씬 화려했다. 그저 황석파의 새로운 장문을 맞이하는 축하연 정도로 생각했던 인경은 그 규모에 자못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그간 태을신교가 잠적하다시피 했다고는 하나, 굳이 이렇게 자극할 필요가 있을까?’

하물며 무림 맹주 조양마저 두문불출하고 있는 이때, 황석파가 나서 무림인들을 모으는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장은을 실제로 만나본 일은 없었으나 필시 야망이 가득한 자가 분명했다. 또한, 오대산검의 장문 자격으로 보아도, 묘하게 불쾌했다.

초대받은 손님들이 차례로 황석파의 현문을 통과하였다. 인경 일행 역시 그들 무리에 묻혀 입구를 지나치기로 했다. 그는 부러 신분을 감추기 위해 무기에 새겨진 문파의 표식을 최대한 숨겼다. 자신의 얼굴을 아는 이는 거의 없었으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최대한 숙여, 초대장을 확인하는 이들의 시선을 피했다.

운평 근방의 소규모 문파들도 다수 초대받은 터라 입장객에게 크게 제한을 두지 않는 것 같았다. 다행히 크게 제재를 받지 않고 대청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잔뜩 긴장했던 인경은 아무 자리에나 가서 앉은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두 문파는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많은 인원을 보냈군요.”

영준이 인경만 들을 수 있도록 귓가에 속삭였다. 용문파와 선운검파를 두고 한 말이었다. 그들의 문파에서 달포는 족히 걸리는 먼 거리였음에도 이미 수일 전에 도착한 모양새였다.

용문파는 용가 삼 형제 중 둘째 용송현을 위시하여 강호에서 위명을 떨치는 고수 서너 명과 수십의 제자들을 파견하였다. 심지어 선운검파는 장문인 소소정이 직접 출두하였다. 두 장로와 함께 십수 명의 제자를 대동하고 방문했으니 장은의 위신을 세워주기 위함이었다.

‘참으로 얄궂구나.’

인경은 새삼 몇 년 전의 참극이 생각나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의 백부이자 장문인 고근동이 그리 간절하게 부탁했건만, 그 어느 문파 하나 선뜻 도와준다고 나서지 않았다. 고대산파의 멸문을 예견한 그들은 의리도 우정도 헌신짝처럼 버렸다. 그날의 절망감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 또한 세상의 이치임을 이제는 모르지 않았다. 영향력 있는 문파에게는 갖은 아양을 떨며 눈치를 보아야 하는 것이 이 험난한 강호에서 살아남는 비결이었다. 도리과 의협을 중시하는 장문이야말로 무능하고 무지했다.

“참으로 장관입니다.”

반면 그들의 뒤편에 앉은 가은은 난생처음 보는 화려한 잔치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영준의 어깨를 호들갑스럽게 두드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불과 수일 전만 해도 남루한 옷을 걸치고 남의 집 일이나 해주며 무시 받던 삶이었다. 비단옷을 입고 우아하게 단장한 여인들의 모습을 보니 문득 마음속에 새로운 욕망이 득시글거렸다.

‘나도 저들처럼 살고 싶구나.’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손바닥에 진땀이 배어 나왔다. 특히 그녀의 눈에 들어온 대상은 선운검파의 선자들이었다.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무인 사이에서도 당당한 협객들. 선녀같이 아름다운 모습보다도 그 당당함이 더 멋지고 대단해 보였다.

“저 선녀님들은 대체 어느 문파입니까?”

“선운검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무심한 인경과 달리 영준은 질문에 친절히 대답하였다. 사실 그는 아까부터 가은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모르고 토끼처럼 커다란 눈을 두리번거리는 그녀의 모습이 귀엽고 안쓰러웠다.

‘가난한 소녀가 얼마나 고된 삶을 살았을까?’

영준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 싶었다. 그것이 문파의 규율을 어기는 게 아니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리라 생각하기도 했다.

“저기에 들어가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음, 여인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영준은 손가락을 들어 단상 쪽을 가리켰다. 황석파의 장로들과 인사를 나누는 중년 여인을 가리키기 위함이었다.

“저분이 선운검파의 연성 소소정 장문입니다. 만약 저분의 눈 밖에 난다면 불가하겠지요.”

가은의 시선이 영준의 손끝을 따라갔다. 자줏빛 옷을 입은 여인은 눈부시게 화려한 외모는 아니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기품이 느껴졌다. 어쩐지 친근감이 가는 것이 낯설지 않았다.

‘연성 소소정이라.’

이 젊은 협객들을 따라 황석산에 오른 것이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도 몰랐다. 선운검파의 장문을 마주한 순간, 가은은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어느 쪽인지 확실히 가닥을 잡았다. 일단 말단 하녀로라도 선운검파에 입문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로 했다.

가은은 앞에 앉은 두 청년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저 무림을 떠도는 방랑 협객이라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은 이들이었다. 특히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자꾸 얼굴을 감추는 인경의 모습에서 확신이 들었다.

‘분명 귀한 신분일 것이다. 하여 어떻게든 이들을 이용해서 기회를 만들고 말겠다.’

순진한 영준을 꼬드기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저 꼬장꼬장한 샌님을 내 편으로 만들어 기필코 목적을 이루리라. 가은은 인경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야심 찬 미소를 지었다.

“두타공파와 고대산파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흐음…….”

보고를 받는 은률의 표정이 영 탐탁지 않았다. 어떤 답신도 받은 바가 없기에 혹시나 했건만, 역시나 나타나지 않다니 기가 막혔다.

사실 고대산파는 그의 관심 밖이었다. 고작 어린애들 몇으로 명맥을 유지하는 멸문 직전의 문파 따위 알 바 아니었다. 그러나 두타공파의 불참은 이야기가 달랐다.

‘조맹주야 폐관 수련 중이니 어렵다 해도, 그의 애제자 백형진조차 보내지 않은 것은 우리를 무시하는 처사다.’

안 그래도 은률은 매번 두타공파의 눈치를 보는 사백, 사숙들에게 불만이 많았다. 특히 자존심 따위 개나 줘 버리고 조양에게 넙죽 엎드리는 고유생을 볼 때마다 역겹기 그지없었다. 무림에 끼치는 영향력도, 다른 문파에 끼치는 장악력도, 심지어 내전 무공의 수준도 몇 배는 앞서는 황석파였다. 만약 전 장문, 마세풍의 반민족적 행위만 없었더라도 오대산검을 지휘하는 문파는 응당 본파가 되어야 했다.

“시간이 지체되었으니 식을 진행하자꾸나.”

은률은 심통이 불끈 난 얼굴을 애써 감추고는 제자들에게 명을 전했다. 그들이 오지 않았다고 식을 미루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차라리 당당하게 식을 치르고 성대한 잔치를 벌여 오대산검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만천하에 보여주리라.

“드디어 장은 장문을 보게 되는군요.”

영준의 귀엣말에 인경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위대한 마세풍이 모든 무공을 전수한 유일 제자, 어린 나이에 고수의 반열에 오른 무공의 천재. 그에 대한 소문은 어릴 때부터 지겹게 들어왔다. 그저 평범한 자질을 가진 그를 걱정하며 태사부 신양선은 매번 장은의 이야기를 했다.

“장은은 이미 네 나이에 황석파의 내전 무공을 모두 익혔다 한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사부를 능가하는 실력을 갖췄다 하니 참으로 본받을 만하지 않으냐?”

고대산파에도 그와 같은 장문이 나섰더라면 달라졌을까? 인경은 불쑥 불온한 생각이 들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르지 못하는 경지가 있었다. 그것이 장문으로서 가장 큰 흠이 아닐까, 인경은 매번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러나 답이 없는 고민은 해봤자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이리 귀한 걸음을 해주시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간소한 식이 끝나자, 장은이 단상 위에 우뚝 섰다. 훤칠한 키에 이목구비가 해사한 미남자로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가히 강호인의 존경을 받는 협객의 모습이었다.

“사실 여러분을 이 자리에 초대한 이유는 보잘것없는 저를 축하해달라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더욱 큰 뜻이 있기에 용기를 내었으니, 부디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장은은 좌중을 향해 최대한 깊이 몸을 숙여 절을 올렸다. 다시 고개를 든 그는 세상 간절하고 처연한 표정을 하고는 장내를 찬찬히 돌아보았다.

“작금의 상황은 실로 불안하고 걱정스럽습니다. 표면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이 평화가 언제든 깨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삼 년 전, 운평표국이 멸문당한 일을 모두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그 간악하고 잔인무도한 태을신교의 일당들이 다시금 강호를 쑥대밭으로 만들까 심히 염려됩니다.”

장은은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애처롭고 절실한지 당장이라도 달려나가 등을 쓸어내려 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허나, 태을신교가 강호에서 사라진 지 벌써 삼 년이 넘었습니다. 당시 무리한 기습으로 칠원성군 역시 크게 다쳤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찬물을 확 끼얹은 이는 용문파의 부(副)문주 용송현이었다. 그는 장은이 연설하는 내내 팔짱을 끼고 앉아 고까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결국 그 불편한 마음을 겉으로 내뱉은 참이었다.

“용선배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은 거칠었던 상대의 발언에도 장은은 전혀 발끈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친절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황석파는 그 일에 연루된 유일한 문파입니다. 지난 수년간, 운평표국의 의혈(義血)을 기리고 애도하는 차원에서 말을 아꼈을 뿐, 우리는 감춰진 진실을 알고 있지요. 하여 이 자리를 빌려 그때의 상황을 자세히 전달할까 합니다.”

그의 발언에 장내는 일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그저 그런 무림대회에 불과하겠거니 생각했던 강호인들은 의외의 화제에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사실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이라고는 끔찍한 참상의 결과뿐이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과연 그들이 무엇을 훔쳐 갔는지, 또 재야에 묻혀 지내던 마세풍이 어째서 사건의 중심이 되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문주님!”

영준은 옆에 앉은 인경의 옷소매를 꽉 부여잡았다. 이 황망한 상황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 마음은 인경 역시 다르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운평표국의 멸문, 그 일행을 직접 이끌었던 문파는 바로 고대산파였다. 비록 혈전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오기는 했으나 그 상황에 대해서 그들보다 잘 아는 이는 없었다.

“흥분하지 말아라. 일단은 들어보자꾸나.”

퍼뜩, 한 문파의 장문으로서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경은 차분하고 단호한 말투로 영준을 나무랐다. 그러나 떨리는 손가락은 차마 감출 수 없었다.

“이제라도 그때의 일을 밝힌다니 다행입니다.”

기다렸다는 듯, 선운검파의 소소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우아한 자태로 장은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는데 이미 서로 약속이 되어있는지 눈짓을 주고받는 것도 잊지 않았다.

“허나, 조맹주조차 참석하지 않은 자리에서 이리 중대한 이야기를 꺼내도 되겠습니까?”

용송현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못마땅하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내키지 않은 걸음을 한 이유는 오직, 예의를 다해야 한다는 사형의 부탁 때문이었다. 자신보다 열댓 살은 어린 장은이 문주랍시고 거들먹거리는 것이 내내 불편하던 참이었다. 또한, 두타공파와 고대산파가 참석하지 않았기에 이리 함부로 일을 키우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 말씀이 과연 옳습니다. 그러나 이 많은 강호의 선후배님들을 또 언제 뵐 수 있을까요? 이 말씀을 드리기까지 저도 많은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조맹주께 죄송하지만, 차후 만나 사죄를 드린다면 이해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번에도 장은은 능글맞게 받아내었다. 예의는 지키고 있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무시하는 어감이었다. 또한, 주변에 앉은 다른 문파들까지 그의 편을 들자, 용문파만 괜히 딴지를 거는 꼴이 되어버렸다. 용송현은 조금씩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보시오, 장문주! 아무리 그래도 위아래가 있지 않습니까?”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결맹을 맺은 사이라지만 이제 막, 장문에 오른 이에게 우위를 뺏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예의를 지키십시오.”

이때까지 장은의 옆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은률이 용송현의 앞을 막아섰다. 당장이라도 검을 빼 들 것 같은 험악한 얼굴이었다.

“감히, 새파랗게 어린…….”

용송현이 참지 못하고 욕설을 뱉으려는 찰나였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맑고 청량한 목소리가 장내에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용문파의 난색에 긴장했던 강호인들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티끌 하나 묻지 않은 하얀 장포를 두른 수려한 외모의 사내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대청 안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두타공파 제자, 백의행 백형진이 오대산검의 장문인들을 뵙습니다.”

*** 양두구육(羊頭狗肉) :

양의 대가리를 내어놓고 실은 개고기를 판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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