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解弦更張(해현경장)
백여 합을 맞부딪쳤을 때, 두 사람은 서로가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깨달았다. 사실 인경은 그간의 성과를 제대로 확인해 볼 상대가 없었던 터라 자신이 얼마나 실력이 늘었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상대가 상대이기에, 매 초식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반면 허윤의 상황은 정반대였다. 건방진 어린 녀석에게 본때를 보여주려던 계획은 어그러진 지 오래였다. 제압은커녕 싸움이 길어지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봐도 매월검법이다.’
이미 망해버린 문파에 뭐 그리 대단한 고수가 남았겠냐 마는, 좀처럼 우위를 점할 수 없자 슬슬 초조해졌다. 게다가 주변에는 당연히 자신이 이기리라 확신하는 구경꾼들도 잔뜩이었다.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마냥 시간을 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용주천무(龍珠天武)”
힘차게 외치며 찌르는 검날에 놀란 인경은 두 발자국을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손목을 비틀어 검을 거둬들였다. 원용당의 용주검은 매우 공격적이었는데 특히 찌를 때 허수가 많아 자칫 덤벼들다가는 함정에 빠지기 쉬웠다. 백여 합을 겨루면서 나름의 규칙을 찾아냈기에 이번에도 마찬가지 수법이라 예상했다.
핑!
그러나 이번에야말로 함정이었다. 평소에도 체면에 목숨을 거는 허윤은 어떤 비겁한 방법을 쓰더라도 이 애송이를 빨리 떼어내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그는 일부러 허수인 척 찔러대어 상대를 적당한 위치에 밀어내고는 암기를 쏘아 보냈다. 스치기만 해도 중상이라는 고독(蠱毒)을 잔뜩 발라놓은 화살촉 모양의 표창이었다.
“아앗!”
인경은 막아내기도 피하기도 어려운 위치에서 암기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실전 경험이 미천하기도 했거니와, 암기를 사용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속수무책이었다.
“쯧쯧, 젊은이가 안 됐네. 안됐어.”
두 사람의 대결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몇몇 무림인들은 응당 청년의 패배를 예상했다. 하긴 그 악명 높은 원용당 부당주와 비등하게 싸운 것만으로도 썩 대단하였다.
퍽!
“으악!”
모두의 눈이 일시에 휘둥그레졌다. 멀뚱히 선 인경의 앞에서, 되레 허윤이 오른손을 부여잡은 채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제 할 일을 끝내지 못한 암기는 세로로 반 토막이 되어 바닥에 널브러졌다.
“누구냐?”
원용당의 수하들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부당주의 필살 암기를 토막 낸 것도 모자라, 그의 손까지 못 쓰게 만들었다면 필시 고수가 분명했다.
“은행?”
허윤이 광인처럼 눈을 희번덕거렸다. 다짜고짜 옆 탁자 위의 술을 상처에 들이붓더니 그제야 자신의 손에 박힌 암기를 확인했다.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 통증으로 일그러졌던 그의 얼굴이 공포심으로 새파랗게 질렸다.
‘그놈이다!’
객잔의 그놈. 수하들의 손에 마늘을 박아넣은 그놈, 단 몇 마디 가르침에 권풍을 익혔던 미친놈. 그때 부러졌던 어금니를 생각하자 극도의 수치심이 밀려왔다.
“으아아악!”
허윤의 손바닥을 확인한 인경 역시 바로 알 수 있었다. 늘 마음속에 응어리처럼 남아 있던 사람. 아직도 풀지 못한, 어쩌면 영원히 풀지 못할 숙제를 남겨두고 떠났던 그 사람이었다.
“영준아, 낭자를 부탁한다.”
대결이고 뭐고 인경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가지 생각만이 가득 찼다. 그를 만나야 한다. 사실 만나야 하는 이유도 몰랐다. 그저 이대로 놓치면 영영 후회할 것 같은 마음이었다.
암기가 날아온 방향은 자신들이 앉아있던 구석의 반대쪽이었다. 탁자에는 국수 한 그릇과 동전 두 개가 올려져 있을 뿐, 사람은 온데간데없었다.
‘어디냐?’
곧바로 창밖을 내다보니 행인들 사이로 웬 보따리를 등에 짊어진 사내가 빠르게 사라지는 중이었다. 은인이 맞다. 뒷모습만으로도 확신할 수 있었다. 인경은 그대로 창을 뛰어넘어 남자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허윤은 수하가 내민 손수건으로 손을 대충 둘둘 감쌌다. 소녀를 노려보기는 했지만 더는 건드리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마라.”
무시무시한 얼굴로 으름장을 놓고는 서둘러 객잔을 떠나버렸다. 혹여 또 시비를 붙을까 내심 불안했던 영준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보답으로 제가 음식을 대접해도 될까요?”
소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영준을 졸랐다. 살면서 여인과 대화를 나눠본 적 없는 그로서는 차마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싸움 구경을 끝낸 손님들은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갔다. 객잔 주인이 감사하다며 내온 술과 소녀가 새로 시킨 음식으로 식탁이 가득 차려졌다.
“두 대협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소녀 무슨 짓이라도 해서 은혜를 갚겠습니다. 아, 저는 가씨, 이름은 은이라고 해요.”
예쁘장한 소녀의 눈웃음을 보고 있자니, 영준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말까지 더듬거렸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은은 수다 삼매경이었다.
“두 분은 이제 어디로 가시나요?”
“뭐…….”
“황석파에서 무림대회가 열린다는데, 혹시?”
“아, 뭐…….”
영준이 제대로 대답할 새도 없었다. 가은은 속사포처럼 거취와 목적을 물어대며 그들의 신상을 대강 파악해 냈다. 꽤 대단한 문파에서도 높은 지위의 제자들이 틀림없었다. 원용당의 부당주와 싸워 이 정도로 오래 버틴 것을 보면 자신을 구해준 대협은 웬만한 고수만큼의 수준은 되는 듯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
가은은 이미 이 두 협객을 따라가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여태 결심한 일에 실패한 적이 없는 그녀였다. 하물며, 이 순진한 청년 한 명 구워삶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영대협, 저는 오갈 데도 없는 고아인데 이렇게 정처 없이 떠돌다 험한 일을 당할까 두렵습니다. 혹 수발을 들어줄 아이가 필요치 않으신가요? 제가 이래 봬도 꽤 야무지답니다.”
영준은 화들짝 놀라 두 손을 바쁘게 내저었다. 몰래 대회를 염탐하러 온 것이지 문파 이름을 걸고 온 것이 아니었다. 하물며 젊은 두 사내에게 시종이라니 가당치도 않았다.
“낭자의 마음은 고맙지만, 저희에게 너무 과분한 제안이십니다.”
아무리 졸라도 영준이 끝내 사양하자, 가은의 눈에 금세 또 눈물이 맺혔다.
“그럼 저는 이제 어떡하나요? 여기서 한 발자국만 나서도 또 저놈들이 달려들 텐데요. 결국, 원용당에 팔려 원치도 않은 이들의 시중을 들며 살아야 한답니까? 아니, 더한 끔찍한 일을 겪을지 누가 압니까?”
점점 우는 소리가 커지니, 주변 손님들이 다시금 이쪽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이런 황망한 일을 처음 겪는 영준은 어쩔 줄 몰라 식은땀만 뻘뻘 흘리고 있었다.
“일단 같이 갑시다.”
마침 객잔으로 돌아온 인경이었다. 무심한 말투로 한 마디 툭 뱉으며 자리에 앉으니, 긴장했던 영준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작 그는 은인을 놓치고 돌아오는 길이라 영 마음이 좋지 않았다. 오히려 소녀에 대한 일은 어느 정도 예상한 터였다. 자신보다 강한 자들에게도 배짱 있게 대하는 태도와 나이답지 않은 영악함을 보면 쉽게 떼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대신 운평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남남입니다. 시중을 들 필요는 없습니다. 낭자에게는 숙식만 제공할 뿐, 그 이외의 것들은 스스로 해결하십시오.”
가은은 애써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심 속이 상했다. 세상 인자하게 생겨서 여인의 눈물이 전혀 안 통하다니, 어지간히 매정한 성격이구나 싶었다.
“은인이 맞았습니까? 그래, 만나서 이야기는 나눠보셨습니까?”
가은의 일을 잘 해결하고 나자 영준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제야 인경의 상황을 물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맞아. 그러나 내 경공 실력으로는 옷깃조차 잡지 못하겠더구나.”
깊은 한숨에서 온갖 복잡한 감정이 다 묻어나왔다. 그 마음을 모르지 않기에 영준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되도록 만나지 않는 것이 좋을지도 몰랐다. 우리에게는 은인이지만 고대산파에게는 철천지원수, 태을신교 사람이 아닌가? 안타깝지만 이쯤에서 인연을 끝내는 것이 서로에게 좋았다.
“그분은 이번에도 구해주었구나.”
그가 먹지도 못한 국수 위에는 고명으로 은행알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때처럼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진 모양이었다. 언제 보아도 대단한 무공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나타났다는 건, 무림대회에 또다시 태을신교가 개입하겠다는 말인가?’
또 다른 생각에 빠진 인경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젓가락을 들고 있는 오른손이 살짝 떨리는 듯도 했다. 그는 아직도 성곤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상태였다. 선과 악의 구분, 오대산검과 태을신교 사이에 얽힌 은원의 진위. 이번 무림대회에서는 과연 그 답을 찾을 수 있을지, 그것조차도 알 수 없었다.
인경을 따돌리느라 생각지도 않게 경공을 사용한 운선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뒤에 짊어진 스승의 유골단지가 최대한 흔들리지 않도록 신경을 온통 곤두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저 녀석은 늘 아슬아슬하단 말이지.”
매번 뜻하지 않은 곳에서 마주치는 것을 보면 그 아이와 보통 인연은 아닌 듯했다. 그리고 매번 도와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도 그의 재주라면 재주였다.
‘그나저나 때를 잘못 골랐구나. 하필 무림대회라니…….’
아무래도 쉬운 길로 가는 방법은 틀린 듯했다. 운선은 작은 한숨을 쉬더니 보따리를 풀어 단지를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혹여 단지에 흠이라도 생기면 큰일이었다. 적어도 황석파로 갈 때까지는 최선을 다해 모시고 싶었다.
벌써 마세풍을 떠나보낸 지 보름이 넘어가고 있었다. 슬픔이 잦아들 무렵, 운선은 스승에 대한 마지막 보은을 결심했다.
***
“스승님을 황석파로 모시고 싶습니다.”
운선의 뜻밖의 제안에 성곤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그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너무 무모한 행동이었다. 고유생을 비롯하여 운선을 보면 득달같이 달려들 놈들이 버티고 있는 그곳이었다. 어찌어찌 찾아간다 해도 이미 사문과 나라를 배반한 것과 다름없는 마세풍의 유골을 반겨줄지 의문이었다.
“황석파의 새 장문인이 스승님의 직계 제자라 들었습니다. 적어도 그분만은 스승님을 모른 체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황석파로 돌아가 묻히는 것이야말로 평생을 유유자적하게 살았던 마세풍의 유일한 욕심이었다.
“이왕이면 시작과 끝을 같이 하고 싶구나. 황석파는 내 근본이오, 꿈이오, 그리고 전부였다.”
늘 밝고 긍정적인 스승님이었으나, 언제나 노을이 질 때면 멍하니 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 마음이 유언과 다르지 않음을 운선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차라리 내가 가는 것이 어떨까요? 그들은 나를 모르고, 그나마도 여인이니 경계하거나 겁박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나 이번에도 운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만큼은 내 손으로 보내드리고 싶어.”
운선은 문득 강율천과 종연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의 가족이었던 두 사람을 차디찬 강가장의 마당에 버려두고 온 일이 그에게는 두고두고 후회요, 눈물이었다. 후에 적우가 잘 묻어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결국 자신의 도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마음에 큰 상처가 되었다.
“그럼 어찌할 생각이냐?”
어차피 말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성곤이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 그 역시 친우의 소원을 알고 있기에 내심 고마운 마음이 컸다.
“가능하다면 잠입하여 장은 장문을 만나는 것이 좋겠지요. 허나, 불가능하다면…….”
윤설의 얼굴이 걱정으로 발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가끔 운선이 일부러 위험을 즐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금도 그는 어쩐지 퍽 신나 보였다.
“정문으로 당당하게 들어가 고유생을 만나야지요. 아주 괜찮은 거래를 할 생각입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운선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무려 세 번의 여름 만에 그의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 해현경장(解弦更張):
거문고의 줄을 바꾸어 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