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雨垂穿石(우수천석)
고대산파에 무림대회 초대장이 도착한 건 지금으로부터 석 달 전이었다. 그동안 오직 무공 수련에만 정진했던 고인경은 애초에 참석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진정성이 느껴지는 서신도 아니었다. 더구나 황석파의 주관이라니, 더 꺼려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고문주, 시류를 읽지 못하면 제대로 문파를 이끌어갈 수 없소. 적어도 그들이 어떤 속셈을 가지고 무림대회를 열었는지는 확인해야 할 듯하오. 또한, 황석파의 새로운 장문의 의기가 대단하다 하니 이 기회에 만나보는 것이 좋지 않겠소?”
태사백인 백천의 조언은 일리가 있었다. 굳이 그들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으나 무엇을 하려는지는 알아야 했다. 그래야 지난번처럼 이용당하지 않고 현명하게 고대산파의 입장을 정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럼 저 혼자만 움직이겠습니다. 굳이 간다고 알릴 필요도 없습니다. 누가 알아보는 건 어쩔 수 없으나, 떠들썩하게 정체를 드러낼 이유는 없지요.”
백천은 아흔이 넘는 나이였지만 유연한 사람이었다. 인경이 무엇을 염려하는지 누구보다 잘 이해하였기에 더는 참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친우이자 심복인 영준이 더 걱정을 늘어놓았다.
“그 끔찍한 운평을, 또요? 설사 간다고 해도 최대한 안전하게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혼자라니요? 정 그러시겠다면 저라도 같이 가겠습니다.”
인경은 충성심을 넘어 과한 애정을 보이는 영준을 차마 떼어낼 수 없었다. 이러한 전차로, 두 사람이 운평에 도착한 것은 무림대회가 열리기 달포 전이었다.
“해금 객잔이야말로 경국 최대라더니 과연 그 말이 맞는군요. 온갖 인간 군상들을 다 만나겠습니다.”
영준의 말처럼 객잔은 발 디딜 틈 없이 만원이었다. 겨우 안내받은 곳이 2층 구석이었는데 그나마도 조금만 늦었으면 없을 뻔하였다.
“그래도 나는 그때의 국수 맛이 생각나는구나.”
마침 국수가 나오자 인경은 문득 강운선이 생각났다. 그 후에 어찌 되었을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러게 말입니다. 태을신교의 제자이지만 우리에게는 은인이지요. 참 얄궂은 인연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어색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지난 수 해 동안 운평표국에서의 일은 암묵적인 금기였다. 오직 강해지겠다는 목표만 있었을 뿐, 그날의 상처를 굳이 들춰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상처란 원래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곪아 터지게 마련이었다. 이번 여정은 여전히 낫지 않은 그 상처를 확인하기 위함인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저 낭자는 나이가 꽤 어린데, 혼자 뭘 저리 많이 먹는 겁니까? 동석한 어른이 잠시 자리를 비운 걸까요?”
인경이 얼추 둘러보니 객잔 안에 여인이라고는 둘밖에 없었다. 그중에 한 명은 구석에서 점잖게 국수 한 그릇을 먹고 있었고, 영준이 가리킨 쪽은 어린 낭자였다. 그녀는 몸집에 맞지 않게 기름진 음식을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놓고 게걸스럽게 먹고 있었다. 많이 보아도 고작 열서너 살쯤 되어 보였다. 옷차림이 추레하여, 과연 음식값을 치를 돈은 있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인경과 같은 생각을 한 이들이 많은지 객잔 안의 손님 중 상당수가 소녀 쪽을 흘끗거리며 수군거렸다.
“아무래도 무슨 사달이 날 것 같지요?”
영준의 말에 인경이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자신이 도와주어야 하나 고민도 되었다. 그때,
“이야, 이게 누구야? 아주 낯짝이 두꺼운 년이구나.”
龍(용) 자가 써진 띠를 허리에 두른 푸른 옷의 사내 둘이 소녀의 앞에 털썩 앉으며 시비를 걸었다.
“누가 앉으라 했나요?”
겁을 먹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소녀가 한껏 비아냥거리자, 객잔의 손님들은 저마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리 재밌는 구경이 또 있을까 싶어서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네년이 깜찍하게 손을 쓰는 바람에 지난밤 저승사자를 만나고 왔다.”
한 사내가 소리를 버럭 지르자 객잔 안이 일순 조용해졌다. 아무래도 소녀의 신상에 끔찍한 일이 생길 것 같았다.
“문주님, 원용당입니다.”
영준이 속삭이기 전에 인경도 한눈에 그들을 알아보았다. 그때 시비가 붙었던 놈들과는 달랐으나, 분명 원용당 표식이 그려진 복장이 맞았다.
“내가 그랬다는 증거 있나요? 오히려 당신들이 어린 나를 팔아먹으려고 우리 부모님을 죽인 게 아닌가요? 아아, 인제 보니 그게 맞는군요.”
소녀는 당황하기는커녕 사내들을 몰아붙였다. 또한, 주변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갑자기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이제 난 천애 고아가 되었으니 팔자가 참으로 한심하구나. 돈 몇 푼에 기녀로 팔려 가니 이 모진 삶 이대로 포기하고 싶구나.”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몇몇 손님은 마음이 동하여 눈물을 찍어내기까지 하였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자 두 사내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퍽 안되었네요.”
영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였다. 어찌나 안타까운지 돈이 있다면 넉넉히 값을 치러주고 구해줄 마음마저 들었다.
“영준아, 참으로 순진하구나. 방금 부모를 잃은 소녀가 이 큰 객잔에 와서 저리 음식을 시켜 먹을 수 있겠느냐? 또한, 저들이 독을 써 소녀를 납치하려 했다면 굳이 이 사람 많은 곳에서 치부를 드러낼 리 없다. 나 또한 원용당에 원한이 있으나 이번에는 피해자 쪽인 듯싶구나.”
인경의 현명함에 감탄하여 영준이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을 때였다. 이번에는 아주 단정하게 머리를 올려 묶은 중년 남자가 소녀를 향해 다가왔다.
“낭자, 저는 원용당의 부당주 허윤이라 합니다. 우선, 제 수하들의 실례는 사과드리지요. 허니 일단 그만 울고 이야기나 해봅시다.”
허둥지둥 당황하던 두 사내는 부당주가 나타나자 태도가 싹 바뀌었다. 자못 마음이 든든한지,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 허윤은 그들을 뒤로 물린 뒤 소녀의 정면에 서서 말을 이었다.
“부모님의 일은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허나, 낭자의 말과 달리 우리 쪽 사람들도 크게 다쳐왔으니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없으면요?”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소녀가 새초롬하게 물어보았다. 그 모습이 청초하고 애처로워 허윤이 다시 없을 악당처럼 느껴졌다.
“본당으로 함께 가서 시시비비를 가려 봅시다. 낭자가 오해받은 것이라면 억울함을 풀어야 하지 않겠소?”
소녀의 얼굴에 짙은 낭패감이 스쳐 지나갔다. 많은 사람 앞에서 망신을 주어 두 사내를 쫓아낼 생각이었는데 여러모로 여의치 않아진 것이었다. 이리 정중하게 나오니 더는 피할 구실이 없었다.
“그럼 그러시지요. 그러나 제가 어젯밤부터 전혀 먹지를 못해 배가 몹시 고프니 조금만 기다려주시겠어요?”
세상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부탁하는 통에 허윤은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어정쩡한 자세로 소녀의 앞에 앉아있으려니 영 민망하기도 하고 체면이 서지 않아 짜증이 잔뜩 솟아올랐다.
“캑캑!”
허겁지겁 먹던 소녀가 목에 뭐가 걸렸는지 연신 기침을 해댔다. 그러더니, 허윤의 앞에 놓인 주전자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당황한 그는 홀린 듯이 소녀의 손에 주전자의 손잡이를 넘겨주었다.
“아이고, 이제야 살겠네.”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꿀꺽꿀꺽 넘기던 소녀는 요란스럽게 호들갑을 떨었다.
“대인이 아니었다면 음식이 목에 걸려 죽을 뻔했어요. 정말 은인이십니다.”
그까짓 일에 무슨 그리 공치사를 하냐며 허윤이 손사래를 쳤으나 소녀는 연신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주변 손님들은 어린 낭자가 퍽 다정하고 예의가 바른 것 같다며 너도나도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았다.
“이제 일어납시다.”
어느 정도 접시가 비워지자 허윤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영악한 아이가 다음에는 또 어떤 핑계를 댈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데려가 처리하고 싶었다. 그런데,
“네, 그럼요……. 어? 아야…, 아아…….”
자리에서 일어나던 소녀가 갑자기 배를 쥐더니 바닥에 구르기 시작했다.
“아아 나 죽네. 장이 뒤틀리고 꼬이는구나. 아아!”
객잔 안은 또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점소이들이 뛰어오고 손님들이 자리에서 다 일어나 그들의 주변으로 둥글게 모였다. 소녀는 이제 온몸이 땀 범벅이 되어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차에 독을 탄 모양이구나! 아아, 나 죽네.”
그제야 허윤은 이 꼬맹이에게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래도 성질이 급하고 변덕이 심한 그는 더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이 계집애가 아주 겁을 상실했구나!”
허윤은 손바닥을 들어 내력을 모았다. 원용당의 절기 용수장이었다. 어린 낭자에게 쓰기에는 다소 살기 넘치는 무공이었으나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원래 그는 소녀를 데려가 비싼 값에 팔 생각이었다. 얼굴이 예쁘장하여 꽤 괜찮은 값을 받을 것 같았다. 지난밤 일이야 수하들이 한심하여 당한 것이지 크게 문제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헌데, 자신이 직접 당해보니 당장이라도 머리를 결딴내 버리고 싶을 만큼 약이 바짝 올랐다.
“으악! 이 사람이 저를 죽이려고 해요!”
소녀는 팔짝팔짝 뛰며 사람들 사이로 숨으려고 했다. 적어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 오면 누구 하나쯤 자신을 구해주지 않을까 싶어 던진 승부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은 완전히 패착이었다.
“흥! 멍청한 년, 이 운평 바닥에서 원용당에 대들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허윤의 뒤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원용당의 사내가 비열하게 웃었다. 이제 저 시골뜨기 소녀의 목숨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부당주를 약 올리고도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어쨌든 전날의 복수는 한 셈이니 마음이 아주 통쾌하였다.
“그만하십시오.”
허윤이 일 장을 내지르려는 순간, 푸르스름한 칼날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소녀는 이때다 싶어, 고마운 방해꾼의 등 뒤로 재빠르게 숨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니 지금이 딱 그 상황이었다.
소녀가 안전하게 숨은 것을 확인한 인경은, 다시 허윤을 바라보고 예의 바르게 공수하였다.
“손을 거두시고 저와 이야기하십시오.”
허윤의 눈썹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이 반반하게 생긴 젊은 녀석은 또 뭐란 말인가? 아무래도 오늘 일진이 더럽게 사나운 모양이었다.
“아는 사이가 아니거든 비키시오. 저 아이가 원용당의 체면을 바닥에 떨어뜨렸으니 이대로 살려두진 못하겠소.”
허윤은 조금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수가 틀리면 이 젊은이도 함께 처리해버리면 그뿐. 원용당의 본거지인 이곳에서 그들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 낭자를 해하시겠다면, 참견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객잔 안의 사람들은 대놓고 드러내지는 못했으나 속으로는 모두 청년을 응원하였다. 이 운평 바닥에서 원용당 놈들을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참에 망신을 톡톡히 당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정적이 흘렀던 객잔 안이 청년에 대한 환호로 가득 찼다. 주변 분위기가 저쪽으로 기우는 듯싶으니 허윤은 점점 더 약이 올랐다.
“좋소. 그럼 나와 겨루어서 이기면 저 아이를 포기하고 물러가겠소.”
어차피 결과는 자명하였다. 어디서 굴러온 놈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충 보아도 이제 막 어디 이름 모를 문파에서 수련을 마칠 나이였다. 제대로 대련해 본 적도 없을 테니, 이리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것이 틀림없었다.
스르릉!
구경꾼이 많을 때는 역시 화려한 검술이 나은 법이었다. 허윤은 수하에게 검을 빌려 기본동작을 취했다. 용수장이 특기이기는 했으나 검법에서도 강호에서 그를 당해낼 자가 많지 않았다.
“먼저 시작하십시오.”
인경은 다시 공손하게 인사한 후, 곧바로 방어 자세를 잡았다. 상현검 1초식이었다.
‘건방진! 양보한 것을 평생 후회하게 될 게다!’
허윤은 피식 웃더니 거칠게 초식을 구사하였다. 팔 하나 정도 끊어 놓으면 이 화가 좀 풀릴까? 그가 예상한 그 어떤 경우에도 패배라는 단어는 없었다.
“쯧쯧, 언제는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다고 해 놓고는…….”
생각지도 않은 대결로 인해 해금 객잔은 점점 더 많은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그 꼴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영준이었다.
*** 우수천석(雨垂穿石):
떨어지는 빗방울이 돌을 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