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我是他非(아시타비)
때 이른 가을비가 스산하게 내리는 아침이었다. 남들은 가을걷이를 고민하느라 어느 때보다 바빴으나, 운평 외곽의 작은 초가에 사는 노부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한가했다.
사실 그들에게는 낟알 하나 거둘 땅이 없었다. 아니, 땅이 없다기보다는 농사를 지을만한 땅이 없다는 것이 더 적확한 표현이었다. 가씨 부부는 늙고 게을렀으며 그 게으름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것이 평생 가난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였다.
그들에게는 이제 갓 열셋이 된 딸아이가 하나 있었다. 아이를 원한 적은 없었다. 다만 일하지 않아도 돈이 된다는 말에 혹해, 떠맡은 짐이었다. 십여 년 전, 선녀처럼 어여쁜 낭자가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부부를 찾아왔다. 그녀는 가씨 부부가 평생 만져보지도 양의 은자 수십 냥을 쥐여주며 아이를 부탁했다.
“해마다 아이를 보러 올 것입니다. 부디 자식처럼 잘 보살펴 주십시오.”
간곡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여 받은 아이였으나, 그 덕분에 십수 년을 편하게 먹고산 것도 사실이었다. 낭자는 약속대로 매해 찾아왔으나 아이를 만나지는 않았다. 다만 노부부에게 그에 합당한 값을 치렀다. 또한, 아이는 커갈수록 여간 야물지 않아서, 웬만한 집안일은 걱실걱실하게 해냈다. 게으른 부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딸이었다. 적어도 두 해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올해도 소식이 없군요. 아무래도 어디서 콱 죽어버렸나 봅니다. 아니면 얼굴값 하게 생겼으니 아이 따위는 잊고 높으신 분 첩이라도 되었나 보죠.”
가씨 부인의 말에 남편 역시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 말이 참으로 맞소. 애초에 아이를 맡으면 안 될 일이었지. 애 키우는 게 좀 힘이 드냔 말이오. 돈도 어지간히 많이 들지. 이대로 가다간 당장 굶어 죽게 생겼소. 뿐인가? 원용당에 빌린 돈은 어쩌란 말이오.”
“에구, 다 내 몸이 약해서 그러지요. 아이의 잘못이겠습니까? 약값이 워낙에 많이 드니 고리대금이어도 빌릴 수밖에요. 콜록콜록.”
가노인은 뭐가 마려운 듯한 표정으로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더니 드디어 결심이 섰는지, 아내 쪽으로 고개를 잔뜩 수그리고 속삭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소. 이러다 이번 겨울을 나지 못하고 우리 세 식구 송장 치르겠소. 내 원용당에 알아보니 마침 어린 계집아이가 필요하다 합디다. 은이가 퍽 예쁘게 생긴 것을 눈여겨보았는지 값을 꽤 쳐준다고 하지 뭐요?”
“하지만…….”
아내 역시 혹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왠지 죄책감이 들어 선뜻 그러자고 동의하지 못했다. 돈 때문에 자식을 팔아넘긴 짐승들이라 주변에서 손가락질을 받을 일도 두려웠다.
“친자식도 팔아먹는 세상 아니오? 이 정도 키웠으면 충분히 값을 한 것이오. 근래에는 돈도 받지 않았으니 우리는 도리를 다한 게 아니겠소?”
그래도 여전히 아내의 반응이 미적지근 하자, 가노인은 답답하여 덧붙였다.
“나라고 왜 은이를 아끼는 마음이 없겠소? 허나, 그 아이도 이곳에서 배곯으며 사느니, 원용당에 가 예쁜 얼굴 덕 보며 사는 게 낫지 않겠소?”
결국 가씨 부인은 마음을 굳혔다. 몸에 찬 기운이 많아 사시사철 기침을 달고 사는 그녀이기에 다달이 지어먹는 약값을 감당하는 것이 꽤 고역이었다. 게다가 벌써 이리 추우니, 올겨울은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남편의 말처럼 은이에게도 여기보다 나은 삶일지 모를 일이었다.
“그나저나 은이는 어디 갔소?”
“어머니!”
마침 은이가 잔뜩 신이 나서 집 안으로 들어섰다. 아침 일찍 들고 나간 바구니에는 이것저것 볶아먹을 수 있는 나물이 가득 들어있었다.
“당귀를 뜯어왔어요. 비가 그친 뒤라 질기긴 하겠지만 그래도 먹을만한 것들이에요.”
“그래, 기특하기도 하지. 오늘은 나물 반찬을 해보자꾸나. 콜록콜록.”
어머니의 기침 소리에 걱정이 되었는지 은이의 얼굴이 금세 흐려졌다.
“어머니, 쉬고 계세요. 몸이 허하면 기침이 더 심해진대요. 마침 옆집에 일손이 필요하다 하니, 가서 도와주고 고기라도 좀 얻어올게요.”
은이가 얼른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더니 다시 집을 나섰다. 한나절만 일을 해줘도 닭고기 약간은 얻어올 수 있을 테니 그것으로 오늘 저녁을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 자신이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된다는 사실이 마냥 기쁜지 밖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기만 했다.
부부만 남은 초가는 썰렁한 기운이 느껴질 정도로 추웠다. 아내의 잔기침 소리를 들으며 가노인은 아예 빨리 일을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늘 저녁에 원용당 사람들을 부릅시다. 더 정이 들면 뭐 하겠소? 마침 은이가 고기를 구해온다니 그것으로 대접하면 그들에게도 면이 좀 서지 않겠소. 오는 길에 당신 약재도 사 오리다.”
휘적휘적 밖으로 나가는 남편을 아내는 끝내 말리지 못했다. 가난이 원수지, 은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작아서가 아니었다. 배 아파 나은 자식은 아니었지만 키운 정을 어찌 무시할 수 있겠는가? 빈집에 홀로 남은 가씨 부인은 한동안 소리 죽여 울기만 했다.
“어머니, 닭고기를 얻어왔으니 곧 죽을 끓일게요.”
이른 저녁에 들어온 은이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생각보다 삯을 더 많이 받아온 모양인지 고기의 양이 꽤 넉넉해 보였다.
“오늘 아버지가 손님을 모셔온다고 하니 넉넉히 끓이려무나. 콜록콜록.”
“잘 되었네요.”
은이는 앉을 틈도 없이 주방으로 들어가 저녁을 준비했다. 모처럼 손님들도 오신다고 하니, 실력 발휘를 해볼 심산이었다. 어머니를 일절 주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단단히 일러둔 뒤, 얻어온 닭 한 마리를 야무지게 손질하였다.
한 시진 넘게 푹푹 끓여낼 때쯤, 원용당의 두 사내를 데리고 가노인이 집으로 들어왔다. 밤이 되자 제법 쌀쌀한지 손님들은 두꺼운 옷을 입었는데도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마침 뜨끈한 닭죽이 다 되었습니다.”
곰살맞은 성격의 은이는 낯선 사내들 앞에서도 낯가림 없이 생글생글 웃었다. 어여쁜 소녀가 맛있는 요리와 함께 소곡주를 내오니 경계심 가득했던 그들의 마음이 한순간에 풀어지고 말았다. 음식을 맛보는 내내 가노인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거래가 잘 성사됐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참으로 오길 잘했소.”
“암, 마음 같아서는 은자 몇 개 더 얹어주고 싶구먼.”
혹여 그들의 마음이 바뀔까 전전긍긍하던 가씨 부부는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잔뜩 주름이 진 얼굴이 모처럼 만에 활짝 펴졌다. 돈 걱정 없이 남은 계절을 보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네 사람은 각자 자기 기분에 취해 즐거운 식사시간을 보냈다. 거나하게 취기가 오를 때쯤, 드디어 아이를 데려가기 위해 원용당의 사내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야, 인제 그만 주방에서 나오너라. 오늘부터 좋은 집에서 좋은 옷 입고 사는 거다.”
그러나 주방에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얘야, 나오래두?”
그가 제법 큰 소리를 질렀는데도, 여전히 안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응? 은이야?”
이상한 낌새를 느낀 가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우욱!”
우당탕!
갑자기 가씨 부인이 구역질을 심하게 하더니, 의자에서 데굴데굴 굴러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게 무슨…….”
아내를 일으키려고 고개를 숙인 가노인 역시 속이 급격히 매스꺼워졌다. 아까부터 손끝이 저릿저릿하고 정신이 몽롱해지길래 술 때문인가 하였는데 아무래도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저……, 대인들…. 아무래도…, 윽!”
가노인은 어지러운지 머리를 쥐고 비틀거리더니 결국 아내의 몸 위로 픽 쓰러져 버렸다. 입에 거품을 가득 문 것이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독이다!’
원용당의 두 사내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서둘러 자리에 다시 앉아 운기조식을 했으나 단전에 이미 독성이 가득 차서 숨쉬기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오히려 억지로 기를 운용하면 더 빠르게 독이 퍼질지도 몰랐다.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들은 이번에는 칼을 빼내 들고 사방을 경계하였다.
“누구냐?”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다른 기척은 없었다. 이 집안에는 노부부와 어린 소녀, 그리고 자신들밖에 없었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침입자가 없다면 누가 음식에 독을 탔단 말인가? 세상 순진한 이 노부부가 스스로 중독되면서까지 독을 탈 리는 만무했다. 또한, 여러 차례 불러도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주방에 있던 소녀 역시 중독되었음이 틀림없었다.
“일단 아이는 포기하고 돌아갑시다.”
시간이 지날수록 얼굴이 벌게지고 식은땀이 뻘뻘 나는 것이 더는 버티기 힘들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일단 본당으로 돌아가 해독을 해야겠다 생각했다. 거의 네발로 기다시피 하여 문밖을 나가더니 곧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흠, 생각보다 독성이 강하진 않구나?”
그들이 떠난 뒤에, 멀쩡한 얼굴로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은이였다. 그녀의 손에는 아까 바구니에 담아왔던 나물이 몇 개 들려있었다. 겉으로 보면 당귀였으나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리강활이었다.
원래 그녀는 독을 탈 마음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동안 키워준 은혜에 보답하는 의미로 맛있는 닭죽을 대접할 생각이었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어머니, 이렇게 기침병을 달고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나을 수 있어요.”
이미 토사물에 기도가 막혀 숨이 넘어간 가씨 부인을 내려다보며 은이가 빙긋이 웃었다. 자신이 그렇게 마음을 다해 봉양했건만, 돈 몇 푼에 팔아넘기려 하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 못된 심보에 비해서는 편안한 죽음이었다.
“어라? 아버지는 아직 숨이 붙어있네요?”
가노인은 꺽꺽거리며 은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래도 키운 정이 있으니 목숨은 살려주겠지 하는 작은 희망이었다.
“아버지, 생각해 보면 가난의 이유는 아버지한테 있어요. 설령 저를 판 돈으로 연명한다 한들, 또 배곯는 상황이 오지 않겠어요? 스스로 돈을 벌 궁리를 하셔야지요.”
그녀는 괴로워하는 가노인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부부의 방으로 들어왔다. 이제 남은 일은 하나였다. 분명 어딘가에 있을 자신의 출생에 대한 징표를 찾는 것. 언젠가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등장했던 그것.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랐으나 반드시 찾아야 했다.
“어라?”
이 염치없는 작자들이 혹여 팔아버렸나 싶었을 때, 옷더미 속에서 왠지 값비싸 보이는 비단 주머니 하나가 툭 떨어졌다. 열어보니 영롱한 빛의 옥색 구슬이 하나 달린 목걸이였다.
“이 귀해 보이는 걸, 여태 팔지 않은 게 용하네?”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들어 자세히 보니 구슬에 새겨진 작은 글자가 보였다.
“雲(운)?”
아무래도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해 줄 글자가 틀림없는 듯했다. 은이는 혹여 들고 다니다 잊어버릴까 봐 자신의 목에 줄을 걸었다. 일부러 맞춘 것처럼 길이가 딱 맞으니 괜히 가슴이 콩닥거렸다. 이 문밖을 나서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진짜 부모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 아직이에요?”
행장을 꾸려 밖으로 나오자 가노인이 여전히 꿈틀대고 있었다. 이대로 두고 갔다가 목숨이라도 건지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자신에 대해 나불거릴 것이 뻔했다. 은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가노인의 옆으로 바짝 다가가 앉았다.
“아버지, 웬만하면 직접 손을 쓰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네요.”
그녀는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행주를 들고나왔다. 손에 둘둘 마는가 싶더니만, 그대로 가노인의 코와 입을 잡아 비틀었다. 끈기 있게 기다리니 오래 지나지 않아 가노인의 사지가 축 늘어졌다. 그래도 혹시나 하여, 숨이 끊어진 것을 야무지게 확인한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둘러야겠다.”
원용당 놈들이 살아나갔으니 어쩌면 다시 집으로 들이닥칠지 몰랐다. 은이는 보따리를 꼼꼼하게 어깨에 둘러멘 후, 조심조심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워낙에 외진 곳에 있는 집이지만, 혹시 몰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보았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그동안 키워주셔서 감사했어요.”
집을 향해 두 번 절을 올린 은이는 미련 없이 운평 번화가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동안 몰래 숨겨둔 돈으로 예쁜 옷부터 살 작정이었다. 약간의 죄책감으로 무거웠던 마음은 집에서 멀어질수록 점점 가벼워졌다. 모퉁이를 돌아 완전히 집이 가려지자, 이제는 콧노래까지 부르는 것이었다.
*** 아시타비(我是他非):
나는 옳고 타인은 틀렸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