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花樣年華(화양연화)
장로 회의에 들어선 고유생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여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자리를 비워놓은 지 한참이라 어쨌든 새로운 장문이 추대되는 것에는 그도 불만이 없었다. 다만 한 표를 제외한 만장일치로 마세풍의 직계 제자 장은이 뽑히자, 실망과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아직 사부님의 생사를 모르니 자리를 비워두는 것이 맞습니다.”
장은은 눈썹을 한껏 겸손하게 내리고는 기어코 손을 내저었다. 사양의 뜻을 내비치는데도 모든 장로가 거듭 권하는 모양새가 여간 고깝지 않았다. 그러나 고유생은 그저 팔짱을 끼고 지켜볼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물론 그 부담스러운 마음을 이해합니다만, 이대로 비워둔다면 황석파의 위상이 땅에 떨어질 것이 자명합니다.”
“맞습니다. 마문주는 려국인을 도와 나랏일을 그르쳤습니다. 사문에서 추방하는 것이 마땅하나, 생사를 알 수 없으니 안타까울 노릇입니다. 차라리 이참에 새로운 장문을 추대하여 우리 황석파가 그와는 전혀 상관없음을 황실에 보여주어 재기를 노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 장로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본 장은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뜻이 그러하다면 따르겠습니다. 허나, 고사숙께서 그간 안팎으로 노력하신 부분이 있으니 응당 장문에 오르셔야 할 것입니다.”
고유생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으나 겉으로는 그저 헛기침만 두어 번 할 뿐이었다. 장은의 저 말이 비록 진심이 아니라 할지라도 장문의 자리만 자신에게 떨어진다면 상관없었다.
그동안 마세풍이 비운 자리를 채우느라 얼마나 노력했던가? 늙은 여우 조양에게 온갖 비위를 다 맞췄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몸이 부르르 떨렸다. 뿐인가? 새파랗게 어린 고근동이나 소소정이 꼴에 장문이랍시고 자신을 하대할 때면 머리에 피가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태 말을 아끼고 있던 정은률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부능파의 제 일 제자로 비월검을 이어받은 유일한 후계였다. 자리에 있는 모든 장로에게 부능파는 그야말로 영웅이었다. 하여, 나이가 어린 은률이 회의에 끼어든 것에 대해 그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그간 고사백님의 노고를 생각한다면 당연한 말씀입니다. 허나, 그래서 더욱 안될 일입니다. 운평표국에 관여한 그 누구도 황실의 화살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물며 조맹주님이 폐관 수련에 들어간 이유가 황제 폐하의 미움을 샀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돈다지요? 우리는 황실의 눈치를 볼 요량으로 새로운 장문을 추대하려는 게 아닙니까? 그렇다면 사백님만은 절대로 아니 됩니다. 차라리 비워두느니만 못하지 않겠습니까?”
“뭐야? 네 이놈!”
결국, 고유생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뺨이라도 때리려는지 한사코 은률의 앞으로 뛰어가려는 그를 막느라 주변의 장로들은 진땀을 뺐다. 물론 노발대발하는 고유생의 심정을 모르지 않았으나, 또한 은률의 의견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음, 그럼 이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수선해진 장내를 정리하며 장은이 나섰다. 그의 얼굴에는 그늘이 없고 피부에 은은한 광택이 돌아 왠지 선한 느낌을 주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인상처럼 차분하고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결론을 내렸다.
“황제께서 마음이 풀리실 때까지 우선, 제가 임시로 장문을 맡겠습니다. 황석파의 위신을 되찾고 진정한 애국의 뜻을 알리게 되면, 그때 원래의 주인인 고사숙님께 장문직을 돌려드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보다 더 합리적일 수 없는 의견이었다. 여전히 못마땅했으나 빈틈이 없으니 고유생 역시 더는 진상을 부리기 민망했다. 만장일치로 장은이 황석파의 새로운 장문이 되었다. 이제 겨우 마흔이 된 젊은 장문이었기에 어린 제자들 역시 누구 하나 불만을 가지는 이가 없었다.
“너무 성급하였다.”
둘만 남았을 때, 장은은 자신의 사제, 은률을 점잖게 나무랐다. 이왕이면 고유생을 최대한 자극하라고 지시하긴 했지만 다소 언행이 건방지고 거칠었다. 아우의 충성심을 모르는 바 아니나, 가끔 급하고 격한 성정이 영 마음에 걸렸다.
“사형, 양약고구(良藥苦口)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원래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이지요. 고사백도 쓴소리를 좀 들으셔야 주제 파악을 할 게 아닙니까?”
은률의 입바른 소리에 장은은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어쨌든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바람에 예상보다 일이 쉽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부능파 역시 존재 자체만으로도 버거웠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처리되었으니, 이것이야말로 하늘의 도움이었다.
“태을신교의 동태는 어떠하냐?”
“벌써 두 해가 넘도록 행방이 묘연합니다. 그때 일이 그들에게도 꽤 타격이었겠지요. 교도들이 많이 다친 데다가 칠원성군 중에 부상자가 있다는 소문도…….”
장은은 창밖으로 시선을 두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조양의 세력이 수그러든 지금이 오대산검을 통합할 적절한 때일지도 몰랐다. 고대산파 따위는 이제 문파라 보기도 우습고, 선운산파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소소정이 사리에 밝으니 시류를 잘 따를 터였다. 문제는 용문파였다.
“조만간 오대산검의 무림대회를 열어야겠구나. 이번에야말로 태을신교를 영원히 짓밟아버릴 절호의 기회가 온 것 같다.”
모처럼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붉은 단풍잎이 뒤덮인 황석산의 가을 풍경은 가히 절경이었다.
“스승님, 제자 장은이 이렇게 훌륭하게 자랐습니다.”
그는 소매 끝으로 연신 눈가를 찍어냈다. 그 눈물이 마세풍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기어코 스승을 밀어냈다는 감격 때문인지 본인도 알지 못했다.
황석산에서 보내는 여름은 비가 많아 더욱더 한가로웠다. 한차례 비가 쏟아지면 몇 시간이고 바둑을 두고,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낚싯대를 둘러메고 강가로 나가니 마세풍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시간이었다.
“맑은 강 한 굽이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데 기나긴 여름 강촌은 만사가 한가롭구나. 제비는 마음대로 처마를 들고나고 수중의 갈매기는 가까이 가도 날아갈 줄 모른다네. 늙은 아내는 종이에 바둑판을 그리고 어린 아들은 바늘을 두드려 낚싯바늘을 만드니, 다병한 몸에 필요한 것이란 오직 약물뿐, 미천한 이내 몸이, 달리 또 무엇을 바라리오.”
<두보(杜甫)의 강촌(江村)>
시 한 수를 읊고 나니, 맑은 바람이 머리 위로 살랑살랑 불어왔다. 한쪽에서는 무공 연마에 한창인 운선이, 다른 한쪽에서는 탕약을 달이는 윤설이 보였다. 미천한 몸에 이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을까? 마세풍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운선아, 대한(大寒)은 세찬 눈보라 같은 무공이니라. 마지막 내지를 때에 힘을 모은 채로 두면 네 몸이 상하게 된다. 쯧쯧, 어찌 그리 매번 욕심을 내누?”
말로는 투덜거리면서도 표정은 한없이 너그러웠다. 그의 양손은 내력을 담을 수 없었지만 마치 운선의 몸에 빙의된 것처럼 힘을 가늠해 보았다.
태을신공의 연마는 모든 무공을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을 만드는 과정과 같았다. 음(陰)과 양(陽), 화기(火氣)와 습한(濕寒), 정반대의 기운을 융화하고 그 안에서 중용을 찾는 무공. 그러므로 이미 일곱 번째 단계에 들어선 운선은 그 어떤 외공을 배우더라도 내공과 결합하여 최상의 힘을 끌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어찌 두타공파의 시묵공만은 익히지 못하는 겁니까?”
운선의 질문에 마세풍이 껄껄 웃었다.
“그들이 추구하는 의(義)가 무엇이냐? 활인(活人)! 사람이 도(道)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도(道)를 위해 사람을 갈아 넣는 무공이란 말이지. 오직 하나의 대의(大意)를 위해 다른 무엇도 수용하지 않는 정파의 의지와 닮았어.”
옆에서 금(琴)을 타던 성곤이 인상을 팍 쓰더니 자신의 친우를 나무랐다.
“정파의 장문이라는 자가 할 소리는 아니지. 본인 얼굴에 침을 뱉는 꼴이 아닌가?”
“그러니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게 아닌가?”
두 사람은 서로를 한껏 노려보더니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고개를 뒤로 젖히며 호탕하게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쭉, 몇 마디 말이 필요치 않았다. 그저 툭 던진 말에도 속을 들여다보는 벗이기에 숨 쉬는 것마냥 함께 있는 것이 편했다.
“그래, 오늘의 요리는 뭐냐?”
마세풍이 탁자에 팔을 대고 앉아 침을 꼴깍 삼켰다. 제자의 요리는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깔끔하고 정성스러운 손맛이 일품이었다.
“오늘은 채소볶음과 생선찜입니다.”
운선이 접시를 가져오자 세 사람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유독 배가 고팠던 설이는 두 할아버지가 젓가락을 들자마자 허겁지겁 음식을 덜어 먹기 시작했다. 편식이 심해 삐쩍 말랐던 아이는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제 통통하게 살이 올라 제법 여인의 티가 났다. 성곤은 먹는 둥 마는 둥 손녀의 모습만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지금처럼 여유롭고 행복했던 적이 있었던가? 굳이 따져 볼 필요도 없었다.
“내일은 악보를 만들어 보자고.”
마세풍이 제안하자 성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럴싸한 곡이 만들어지면 마세풍이 가사를 붙이고 설이가 노래를 부르자. 운선은 음악을 모르니 좋은 관객이 되어주면 되겠다. 두 노인은 신이 나서 수다를 그칠 줄 몰랐다.
“대신 저녁엔 바둑을 두세나. 이번엔 반드시 내가 이길 테니.”
“어림없는 소리!”
네 사람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막 활동을 시작한 풀벌레들의 울음에 조금씩 묻혔다. 오랜만에 별빛이 반짝이는 한여름의 고요한 밤이었다.
“영명대한(靈名大寒)”
새벽부터 시작한 연습이 드디어 결실을 보았다. 땀이 비 오듯 흐르는 와중에도 운선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웃음이 가득 번졌다. 마지막에 힘을 풀어내라는 말의 의미를 무려 달포나 걸려 이해했으니, 그럴 만도 하였다.
“사부님!”
운선은 신이 나서 마세풍이 누워있는 방으로 달려갔다. 아침잠이 많은 사부님을 깨우는 게 영 미안했지만, 얼른 이 기쁜 소식을 알려드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사부님!”
아니나 다를까, 마세풍은 여전히 침상에 누워 해가 뜬 줄도 모르고, 자는 중이었다. 깜짝 놀라게 해줄 요량으로 살금살금 다가가 마세풍의 팔을 확 잡아챘다.
“사부님!”
딱딱한 스승의 몸을 만진 순간, 운선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저 멍하니 서서 마세풍을 내려다보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몸에는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사부님?”
운선은 떨리는 손으로 그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오르락내리락 요동쳐야 하는 심장이 고요하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지붕을 뚫을 것 같은 코골이 소리도 오늘은 잠잠했다.
“오라버니! 일어났어요? 그만 할아버지 깨워요. 오늘은 제가 어죽을 끓였답니다.”
마침 설이가 방문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젯밤에 약속한 것들을 할 생각에 신이 나 평소보다 빨리 일어나 달려온 터였다. 그러나 멍하니 서 있는 운선의 뒷모습을 마주하자,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오라버니…….”
윤설은 운선에게 천천히 걸어와 그의 등을 꽉 안아주었다. 꽁꽁 얼어붙었던 몸에 온기가 닿자 바닥으로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사부님…….”
두 사람의 서글픈 울음소리가 빼꼼하게 열어놓은 방문 밖으로 조금씩 새어나갔다. 그 앞에는 어쩐지 불길하여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서성였던 성곤이 있었다. 일흔이 다 되어가는 그의 눈에서 처음으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저 하루만 더, 하루만 더 간절히 바라던 시간이었다. 그 작은 소망이 끝내 어그러진 아침, 황석산에서 맞는 세 번째 여름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