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如流(여류)
신계 객잔에 도착하자 조양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한 무리의 호위대였다. 그는 드디어 올 것이 왔음을 깨달았다. 일이 틀어졌음을 알았을 때, 어쩌면 지금 이 장면을 머릿속에 그렸던 것도 같았다. 입맛을 쩝 다시니, 쓴 물이 목구멍으로 잔뜩 넘어갔다.
“신(臣) 태보(太保) 조양, 친왕(親王)을 뵈옵니다.”
그가 바닥에 닿을 만큼 허리를 굽히자 반짝이는 무언가가 머리 위로 아른거렸다. 조금만 고개를 들어도 머리카락이 한 움큼 베어나갈 정도로 날카로운 검이었다.
“그래, 실패하셨다지요?”
옥골선풍의 남자는 자신의 잘 다듬어진 손톱을 들여다보며 무심하게 물었다. 말의 끝을 올려 친절함을 가장하였으나, 기실 질책이었다.
“송구합니다.”
바닥을 내려다보는 조양의 눈에는 분노의 빛이 빠르게 지나갔다. 고작 주먹 한 번이면 으스러질 상대지만 또한 주군의 귀한 핏줄이었다. 감히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은 상대의 신분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 때문이었다.
“제가 너무 큰 기대를 했나 봅니다. 그러나, 태보께서 못하신 일이라면 다른 이에게 맡겼어도 마찬가지였겠지요.”
차라리 매섭게 문책을 했더라면 덜 자존심이 상했으련만, 세상 곰살궂게 다가오니 조양에게는 참기 힘든 치욕이었다.
“다음에는 절대로 실수하지 않겠습니다.”
조양은 망설임 없이 무릎을 꿇었다. 고작 이 정도 봉변이라면 빠르게 끝내는 것이 더 나았다. 소위 태어날 때부터 고귀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구태의연한 행동이 잘 먹히는 법이었다. 백날 죄송하다 해봤자, 마음에서 우러나지도 않는 구걸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번 일로 다음이 없게 되었습니다. 서이국과의 문제가 사뭇 커졌단 말입니다. 하여, 당분간 자숙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동안 이어지는 남자의 긴 연설에도 조양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기억에도 남지 않을 말에 일일이 대응할 필요는 없었다.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도 견딜 만하였다.
“위치는 알아내셨습니까?”
불시에 들이닥친 질문에 조양의 어깨가 움찔하였다. 적어도 그의 입에서는 나오면 안 되는 말이었다. 어째서 황제와의 밀약에 대해서 한낱 황자 중 하나인 그가 알고 있는 것인가?
“혹 제가 모르리라 생각하셨습니까? 저를 퍽 얕본 모양입니다. 무림 맹주가 되니 본인의 천한 핏줄을 잊으신 것입니까?”
바닥을 향하던 조양의 고개가 천천히 올라갔다. 나이에 비해 매끄러운 그의 피부에 급격하게 굵은 주름이 접히기 시작했다.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에서는 상대에 대한 혐오감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금(芩)왕야!”
조양이 벌떡 일어나 남자에게 성큼성큼 다가가자 화들짝 놀란 호위무사들이 그에게 시퍼런 칼날을 겨누었다. 그러나 정작 남자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오른손을 버쩍 들었다. 당장이라도 목을 칠 것 같던 무사들이 그 손동작 하나에 빠르게 뒤쪽으로 물러갔다.
“제 도움 없이 무엇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게 누구라도!”
조양의 이글거리는 눈을 마주하던 이금(李芩)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는 듯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다음에는 조양을 검지로 가리키며 마구 흔들다가, 그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주위를 빙빙 돌았다.
“주객전도(主客顚倒)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것이군요. 참으로 가소롭습니다.”
조양의 눈이 점점 가늘어졌다. 그는 황제의 여덟 황자 중에서도 가장 야심이 많고 영악한 둘째, 이금이 늘 불편했다. 어딘지 모르게 음흉한 점이 자신과 똑 닮아 보였다.
“당신이 아니어도 저에게는 패(覇)가 많습니다. 그러니 주제도 모르고 함부로 나서서 방해하지 마시란 말입니다.”
이금의 얼굴이 조양의 얼굴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웃음기가 걷히자 과연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인상이 되었다. 웃을 때는 다시 없을 호인이었으나 노려보니 한 마리의 독 오른 살쾡이 같았다.
“다시 뵐 때는 저를 다른 호칭으로 부르게 되실 겁니다. 그러니 그전에 반드시 수수께끼를 푸셔야 할 것입니다. 아니라면 죽음을 각오해야 할 테지요.”
이금은 도포 자락을 펄럭이며 객잔 밖으로 나가버렸다. 손님처럼 앉아있던 십수 명의 무사들도 일시에 일어나더니 그의 뒤를 따라 바람처럼 사라졌다. 혹여 있을지도 모를 만약의 상황에 대비한 모양이었다. 조양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상대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었으므로.
“이금…….”
조양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신의 주군이 아니더라도 저 녀석에게만큼은 절대로 빼앗길 수 없었다. 그렇다면 역시 선택지는 하나,
“그곳을 찾아야 한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반드시…….”
어쩌면 이번 일의 실패가 그에게는 전화위복이 되었는지도 몰랐다. 당분간 한가해졌으니 두문불출하며 방법을 찾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두타산에서 몇 번의 계절을 버티는 사이 반전의 기회가 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조양이었다.
후두둑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에 운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윤설의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오라버니? 정신이 좀 들어요?”
눈꺼풀은 무겁고 머리는 지끈거려 상체를 일으키는데 만도 한참이었다.
“무려 사흘을 자다니, 이러다 굶어 죽겠어요.”
기다렸다는 듯, 윤설이 뜨끈한 어죽 한 그릇을 운선의 손에 쥐여주었다.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도 그가 처음 먹은 것이 바로 이 어죽이었다. 사실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요리였다.
“사부님은? 사백님은?”
정신을 차림과 동시에 수많은 근심 걱정이 운선의 머릿속을 빠르게 채웠다. 허둥지둥 침상에서 내려오려 하자, 설이가 서둘러 그를 눌러 앉혔다. 그러더니 손가락으로 오른 옆쪽을 가리키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드르릉 푸, 드르릉 푸…….”
마세풍이 세상 편안한 얼굴로 지붕이 뚫어져라, 코를 골고 있었다. 운선은 그제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필사의 질주가 소중한 목숨을 구했다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리고 또…….”
윤설이 이번에는 왼쪽 옆을 가리켰다.
“어? 현진 사저?”
현진은 두 손을 다소곳이 가슴에 두고 마치 죽은 사람처럼 누워있었다. 그녀의 가슴 부위에는 온통 하얀 천이 둘둘 감겨 있었는데, 그 위로 여전히 손바닥만 한 크기의 핏자국이 선명했다. 꽤 심각한 상처를 입은 모양이었다.
“오라버니, 움직일 수 있으면 일단 나가서 얘기할까요?”
운선은 어죽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운 후에 조심조심 밖으로 나왔다. 아직 한낮인데도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걸 보니, 이제 가을도 끝 무렵에 다다른 것 같았다. 눈치 빠르게 설이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더니 두꺼운 장포 한 장을 운선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어찌 된 일이야?”
두 사람은 낡은 초가 계단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가끔 마세풍과 성곤이 머물러 바둑을 두던 이곳은 온갖 풍파에 시달려 집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세속과 한껏 멀어져 있기에 누군가에게는 무릉도원과 같은 곳이기도 했다.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는 건 어때요?”
“뭐?”
설이는 당황한 운선의 얼굴을 보며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가장 바라던 삶이었으나 가장 바라지 않는 형태로 맞이하게 된 셈이었다.
“혹, 두 분의 상태가…….”
운선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어쩐지 설이의 태도가 부자연스러운 것이 뭔가를 단단히 숨기고 있는 듯했다. 사백님과 사형들이 보이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사흘이나 잠이 들었다면 한둘은 이곳에 와서 일의 경과를 일러주지 않았을까?
“아니에요. 그런 거…….”
설이의 차가운 손이 운선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그의 불안한 얼굴이 안쓰러워 자신도 모르게 불쑥 용기가 난 것이었다.
“려국인들은 잘 구했고 할아버지와 사형제들도 무사해요. 현진 언니는 크게 다치기는 했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어요. 물론 무공이 얼마만큼 돌아올지는 모르겠지만…….”
빠르게 둘러대는 설이의 변명을 듣고 나니, 운선은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면서 그저 저 중에 내가 아는 사람이 없기를, 무기력하게 바라기만 하는 마음으로 뛰어온 길이었다. 적어도 그 여정이 후회로 남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마음이었다.
“다만…….”
“어?”
윤설의 눈이 뿌옇게 흐려졌다. 모두가 괜찮다며, 왜? 불길한 예감에 운선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설이의 입술은 달싹거릴 뿐, 소리를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한동안은 속세와 인연을 좀 끊을까 싶구나.”
그때였다. 언제 다가왔는지 가을비를 잔뜩 맞은 성곤이 두 사람 쪽으로 휘적휘적 걸어오고 있었다. 조금 수척해 보이기는 했지만, 평소와 다름없이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운선이 반가운 마음에 뛰어가 성곤의 품에 고개를 푹 박아넣었다. 그의 곁으로 가니 마치 큰 우산을 쓴 것처럼 차가운 비가 조금도 들이닥치지 않았다. 남들에게는 누구보다 냉정한 태을신교의 교주였으나 운선에게는 피를 나눈 가족보다 더한 따뜻한 품이었다.
“사내 녀석이 참…….”
성곤이 멋쩍었는지 코를 킁킁거리더니 운선을 대롱대롱 매단 채로 어기적어기적 움직였다. 귀찮았을 텐데도 떨쳐내지 않는 것을 보면, 그리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윤설이 다시 뜨거운 어죽 한 그릇을 끓여 내오자 성곤은 배가 고팠는지 제대로 씹지도 않고 후루룩 목구멍으로 넘겼다. 따뜻한 기운이 뱃속으로 들어가자 어쩐지 앞으로 모든 일이 잘 흘러갈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운선아, 당분간은 이곳에서 지낼 예정이다. 싫으냐?”
“아니, 저야 좋지만……. 왜?”
성곤은 애써 운선 쪽을 바라보지 않고 먼 봉우리로 시선을 돌렸다. 비안개 때문인지, 그의 눈이 흐릿해져서인지 영 산세가 뿌옇게만 보였다.
“저 돼지가 얼마 안 남은 것 같구나.”
“…….”
운선은 차오르는 감정을 견디기 어려워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흐뭇하게 들리던 마세풍의 코골이 소리가 새삼 서글퍼졌다. 그 역시 어느 정도는 예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등 뒤로 느껴지던 차가운 체온이 결국은 죽음이 문턱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신호임을 어찌 몰랐을까? 다만 저 코골이 소리가, 그의 평온한 얼굴이, 별일 없다는 징조가 되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나도 좀 지치는구나. 너무 쉬지 않고 달려온 것도 같다. 미움도 분노도, 마음에 어떤 감정을 잔뜩 담아두려거든 중간중간에 쉬어줘야 하거늘.”
평소에는 지극히 과묵한 성곤이지만, 슬플 때면 유독 말수가 많아졌다. 려국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도, 윤설의 어미가 죽었을 때도, 딸의 배를 갈라 죽기 직전의 손녀를 꺼냈을 때도, 그는 울지 않았다. 유달리 예뻐하던 유이정이, 또 마음을 털어놓던 벗 조상원이 죽었을 때 또한 울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와의 추억을 밖으로 꺼내놓아 기억 속으로 고이 보내주리라 다짐해 보았다.
“그래도 남은 동안은 즐겁게 보내고 싶구나.”
주절주절 늘어놓는 마지막 말에서 결국 설이의 서글픈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가을비와 섞여 그렇게 한참을, 세 사람은 각각의 방식으로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