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有始有終(유시유종)
두 사람은 상대의 정체가 누구인지는 몰랐으나 그의 일 장만으로도 위압감을 느끼기 충분했다. 아무리 기습이라 해도 몸을 비틀어 피했건만, 갈비뼈 두어 개는 부러진 것 같았다. 자기 딴에는 억울하다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으나 사실 제대로 맞붙는다고 해서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이 자리에서 승부를 볼 테냐?”
그래도 봉천은 곧 죽어도 자존심은 세우고 싶어서 일단 허세를 떨어 보았다. 죽는 것은 무섭지 않으나 긍지는 짓밟히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군.”
성곤이 특유의 큰 눈을 가늘게 뜨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태일장을 맞았으니 두 사람이 한꺼번에 덤빈다고 하더라도 별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하여, 어린놈이 발악하는 꼴이 좀 안쓰럽기까지 하였다.
“오늘 일은 여기서 마무리 짓고 싶소.”
우락부락하게 생긴 것과 달리 형권은 이성적인 편이었다. 연달아 여러 고수와 겨루었기에 그들도 지쳐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느 정도 능력치를 가진지도 모르는 상대와 대결을 벌일 만큼 무모하지 않았다.
“금형권!”
형권의 자신 없는 목소리에 봉천은 짜증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무인(武人)이라면 응당 죽음을 불사하는 오기가 있어야지 매번 형세가 불리해질 때마다 도망부터 치려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봉천이 당장이라도 자신의 머리를 다 뜯어놓을 것처럼 신경질을 부리자 형권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변명하기에 바빴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
바닥에 엎어진 채로 말다툼을 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성곤이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조양의 꼼수가 아니었다면 벌어지지 않을 일이었다. 그 역시 더 크게 판을 키우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는 천서국과의 은원도 정리해야겠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자네들 대장이 곡해고인가?”
성곤의 물음에 두 사람 모두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곡해고는 사형이기 이전에 그들에게는 스승 같은 존재였다. 적의 입에 함부로 오르내릴 위인이 아니었다.
“맞는군.”
아무 답도 듣지 못했으나 표정의 변화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곡해고가 관여했다면 천서국이 공물을 요구한 이유도 예상과 다르지 않을 터였다. 성곤은 애써 분노를 억누르며 목소리를 착 내리깔았다.
“돌아가 곡해고에게 이르게. 앞으로 려국 땅을 밟는다면 그 발을, 려국을 거론한다면 그 혀를 잘라가겠노라고!”
“감히!”
성질 급한 봉천은 상체만 일으킨 자세에서 몸을 날려 일 장을 출수했다. 그의 절기(絶技)는 검이었지만 장풍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성곤과의 거리가 수 장이나 떨어져 있었으나 몸을 휘돌려 회전하니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앞에 다다랐다.
퍽!
봉천과 성곤의 손바닥이 마주 닿는 순간, 아주 작은 화화(火花)가 일었다. 적어도 이 일 장만큼은 자신 있었던 봉천은 노인의 기력이 버텨봐야 얼마나 버티겠냐는 생각이었다. 내전 무공인 북창신공(北窓神功)이야말로 겨루어 져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태을신공의 웅혼한 기운이 그의 손바닥을 통과하고 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개구리였는지 깨닫고 말았다.
“욱!”
봉천이 감히 손바닥을 거두지 못하고 격하게 구역질을 하자, 형권은 형세가 기울어졌음을 깨달았다. 서둘러 몸을 일으켜 경공을 사용하니 한달음에 성곤의 안면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제강(提綱)!”
형권이 크게 일갈하며 일 장을 뻗었다. 그 역시 북창신공을 사용한 것인데 상대가 절세고수라 할지라도 한 번에 두 명의 상대를 감당하기란 절대 쉽지 않으리라는 계산이었다.
퍽!
그러나 형권의 손바닥이 맞은 곳은 성곤의 가슴이 아니라 창 미타(彌陀)의 몸통이었다. 성곤이 두 사람을 막고 있는 사이, 드디어 진건이 정신을 차린 것이었다. 손목이 창의 힘을 버텨내지 못하고 툭 부러지자 형권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참으로 가소롭군.”
그와 동시에 성곤이 인상을 크게 쓰며 손바닥을 밀어내었다. 안 그래도 간당간당 버티고 있던 봉천은 반탄력을 이기지 못하고 수 장을 날아가 왼쪽 어깨를 크게 부딪치며 떨어졌다.
“으헉!”
꾸역꾸역 누르고 있던 울혈이 입 밖으로 울컥 올라왔다. 검붉은 핏덩이를 뱉어내자, 무리해서 끌어올렸던 단전의 기운이 일시에 풀어지면서 봉천은 그대로 혼절하였다.
“곡해고가 묻거든, 려국의 대사성(大司成)이자 태을신교의 교주 성곤이 전하라 했다 하게.”
성곤은 차마 얼굴을 올려다보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형권에게 마지막 말을 전했다. 애초에 이들을 죽이거나 해할 생각은 없었다. 적당히 겁을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동료를 업고 사라지는 형권의 뒷모습을 보면서 성곤 역시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검은 덩어리 하나가 툭 떨어졌다. 그는 다가오는 진건의 눈에 보이지 않게 재빨리 흙으로 덮어 버렸다.
“교주님…….”
진건이 세상 우울한 얼굴로 스승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가만히 제자의 얼굴을 들여다본 성곤은 대충 어떤 상황인지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이 녀석 혼자 남은 것을 보니 분명 다친 아이가 있을 테지. 그 역시 제자에 대한 애정이 없지 않았다. 다만 그 이상의 대의(大意)가 언제나 그를 몰아붙였을 뿐.
“누가 다쳤느냐?”
“현진입니다.”
“마장문은 어찌 되었느냐?”
“운선이 설이에게 데려갔습니다.”
성곤은 무심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일은 비라도 오려는지 별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이었다. 어쨌든 작전은 성공이었다. 그 과정에서 누가 죽고 다쳤든, 중요하지 않았다. 성공의 제물이 설령 자신의 목숨이었어도 마찬가지였다.
“너는…, 괜찮으냐?”
“네.”
성곤은 제자의 쓸쓸한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 저항 없이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던 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차라리 구해주지 않는 것이 나았을까?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직은 진건이 죽으면 안 된다. 대의(大意)를 위해서 가장 쓸모있는 장기 말은 끝까지 살려두어야 했다.
“서문에게 가자.”
“네.”
겨우 물 몇 모금을 마시고 달리는 둘째 날은 정신력만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고꾸라지고 엎어지고, 잠깐 혼절했다가 다시 일어나서 달리는 그 험난한 여정에서 운선을 버티게 하는 힘은 오로지 마세풍에 대한 애정이었다.
“사부님, 오늘 밤에는 당도할 것입니다. 그러니 버티십시오.”
헉헉거리면서도 자신을 위로하는 운선이 안쓰러워 마세풍은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했다. 끔찍한 고통 속에 대부분 의식을 차리지 못하다가도 문득 눈을 뜨면 운선의 꼬질꼬질한 목덜미가 보였다. 그 땀 냄새가, 축축한 체온이, 마세풍에게는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되었다.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몰라.”
“네?”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서도 마세풍은 응어리를 풀어내고 싶었다.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그 말. 죄책감의 근원은 십여 년을 감춰왔던 자신의 추악한 진심이었다.
“려국인이라면 벌레 보듯 했던 부능파를, 어쩐지 감추는 게 많은 것 같은 장은을 나는 부러 모른 척했다.”
그날, 선발대가 먼저 출발했으면 좋겠다는 부능파의 제안을 마세풍은 충분히 거절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있었음에도 방조한 것은 그저 자신의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은 비겁함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경국은 려국인에게 공포를 보여줄 생각이었지. 화친? 우호적 관계? 개뿔……. 나도 알고 있었다. 전쟁이란 그저 죽고 죽이는 것.”
“…….”
운선은 가슴 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쳐 숨이 턱턱 막혔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책임, 의무 그리고 죄책감만이 삶의 버팀목이었다.
“운선아, 비겁해지지 말아라. 눈치 보지 말아라. 잘못이 있다면 스스로 책임지면 되는 거야. 도망치지 말아라…….”
한차례 주절거리던 마세풍이 다시 혼절했을 때, 이미 황석산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운선의 마음은 한층 조급해졌다. 방금까지도 뜨끈뜨끈했던 등에서 조금씩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니다, 아직 아니다.’
유달리 바위가 많은 산이었다. 미끄러지고 구르고 그렇게 또 한참을 올라야 설이가 기다리는 곳에 당도할 수 있었다. 운선의 몸은 엉망진창이었다. 이제 상처가 없는 곳을 찾는 것이 빠를 지경이었다. 눈앞이 가물가물하고 다리가 후들거렸으나 이제 곧이라는 생각에 쉬지도 못했다.
“어?”
저 멀리서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연기가 보였다. 설이가 분명했다.
“설아…, 설아!”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으나 입 주변에서만 맴맴 돌 뿐, 밖으로 뻗어가지 못했다. 그나마 새어 나오던 쉰 목소리도 어느 순간 아예 나오지 않게 되자 이제는 발이 비틀비틀 꼬이기 시작했다.
“설아…….”
결국, 버티지 못하고 넘어지는 운선의 시야에 흐릿하게나마 헐레벌떡 뛰어오는 윤설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살았구나. 그리고는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까아악, 까아악!
서리 까마귀들이 제각기 서글픈 울음소리를 내며 쓰러진 운선의 머리 위를 빙빙 돌았다. 산 사람인지 죽은 사람인지, 영리한 그들도 판가름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
“이제 어쩌실 겁니까?”
인경은 그저 멍하니, 피범벅이 되어 뒤엉킨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의문은 곧 가슴속까지 점령하여 심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우리는 이대로 고대산으로 돌아간다.”
영준을 비롯한 제자 다섯은 장문의 뜬금없는 명(命)에 어안이 벙벙했다. 피비린내 나는 이 끔찍한 싸움에 공포심을 느낀 것인가? 아니면,
“돌아간다.”
영준은 그때, 인경의 얼굴에서 태사부의 단호함을 보았다. 그것은 단순히 두려움이나 걱정 혹은 망설임이 아니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고대산파의 장문으로서 내리는 첫 결단이었다.
“존명(尊命)!”
영준은 두 손을 모아 뜻을 받아들였다. 운평으로 돌아가는 방향으로 움직이며 장문을 엄호하였다. 딱히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들은 없었으나 또한 뚫기 쉽지 않은 길이었다. 바닥에는 칼에 찔리고 베인 시신들이 즐비하여 끊임없이 발길에 차였다. 그리고,
“너는 뭐냐?”
고대산파의 무리를 가로막은 것은 그 악명 높은 태을신교의 교주 성곤이었다. 기실, 그를 본 것은 처음이었으나 인경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부리부리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그 위압감에 몸이 바짝 움츠러들었다.
“저는 고대산파의 장문 고인경입니다.”
“그런데?”
흥미롭다는 듯 입을 삐쭉 내밀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성곤에게 주눅이 들어 인경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일의 진위를 이제 알았으니 돌아가려 합니다.”
“진위가 무엇이냐?”
“모릅니다.”
무심하던 성곤의 눈에 호기심이 잔뜩 들어찼다. 재밌는 녀석이었다. 자신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한데도 쉬이 굽히지 않는 양이, 기개가 있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끌렸다.
“내가 비키지 않겠다면?”
인경은 영준에게 물러서라 눈짓을 보낸 뒤, 재빨리 하현검을 뽑아 들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이 검 귀신에게 쉬이 벗어나기는 틀린 것 같았다. 자신이 몇 합이나 버틸지 알 수 없었지만 그사이 사형제들이 빠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쯧쯧, 주인과 비교해 너무 훌륭한 검이구나.”
성곤이 엄지와 검지를 모았다 펼치며 가볍게 튕기자 칼이 공명하여 윙 소리를 냈다. 그 진동에 손목이 저릿저릿하여 인경은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하였다.
“되었다. 고대산파와의 악연은 이미 끝났다.”
성곤은 한 발을 옆으로 옮겨 인경의 앞을 비켜 주었다. 앞으로 십 년? 아니 이십 년? 무공의 진전은 모르겠으나 한 문파의 장문으로서 얼마나 성장할지 가히 기대되는 녀석이었다.
인경은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거렸으나 주먹을 꽉 그러쥐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를 따르는 다섯의 사형제 역시 지금 당장 스스로 목을 긋고 싶을 만큼 치욕스러웠다. 그러나,
“바둑에 이런 말이 있네. 세고취화(勢孤取和)! 형세가 불리하면 싸우지 않고 평화를 취한다는 뜻이지. 참을 줄도 알아야 진정한 무인이라네.”
그는 객잔에서 들었던 마세풍의 그 말을 절대로 잊지 않았다. 이 치욕을 참는 것이야말로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공격이었다.
“좋은 얼굴이야.”
멀어져가는 인경의 뒷모습을 보는 성곤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신양선 그 융통성 없는 늙은이가 그래도 보물 하나는 남겨두고 떠났으니 그리 억울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
***유시유종(有始有終):
시작한 일을 끝까지 마무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