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必死卽生(필사즉생)
노을이 한차례 강렬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는 서서히 내려앉았다. 그동안 무려 백여 합이 훌쩍 지났으나 두 사람은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고유생의 얼굴이 점점 거무죽죽해지며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데 반해, 이무영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정도로 생생했다.
무영은 내내 강가장에서 주워온 종연의 수월검(水月劍)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녀가 굳이 남의 검을 사용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검의 고수인 고유생과 싸워 우위를 점하려면 수월심검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검법을 가장 완전하게 구현할 수 있는 검은 이 세상에 수월과 월심 단 두 개이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주운이었다.
“수월검은 부드러운 검이니 초식을 사용할 때, 절대로 손목에 힘을 주면 안 된다.”
사실 무영은 주운을 앞에 앉혀 놓고 1초식부터 차례로 펼쳐 보이며 검법을 시연하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무공이 답보 상태인 제자에게 실전 무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전력으로 대응하던 고유생은 딱 열 개의 초식이 지나고 나서야 상대가 자신을 조롱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잔월효성(殘月曉星)”
수월심검 12초식을 구사하는 무영의 모습은 한 마리 나비와 같았다. 고유생을 가운데 두고 사방에서 휘어져 들어가는 검의 현란함이 자못 화려했다. 검 끝이 상대의 요혈을 무려 12군데 찌르는 동안 전혀 방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쾌검이었다. 마지막 열두 번째 혈을 찔리는 순간, 고유생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자신의 월산검을 바닥에 내던져 버렸다.
“내가 졌으니 관두시오!”
그는 자존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실력의 차이는 차치하더라도 진지하게 대결하지 않는 태도에 극도의 모멸감을 느꼈다. 검과 함께 한 지난 세월을 오늘 만난 두 사람에게 철저하게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바닥에 앉아 엉엉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만하실 겁니까?”
무영의 호흡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대로 밤을 꼬박 새워 싸운다고 하더라도 불리한 쪽은 고유생이었다.
“그만합시다.”
기실 무영이 고유생과 싸울 이유는 딱히 없었다.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목적이 겹치지도 않았다. 그가 혹시라도 운선을 계속 뒤쫓겠다 하더라도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다만, 주운이 계속 그를 보호하겠다면야 얘기가 달라졌다.
“내 제자도, 또 그 아이도 더는 괴롭히지 않겠다 약조하시지요.”
억양이 전혀 없는 메마른 말투였으나 어딘지 모르게 고압적이었다. 고유생은 자신보다 족히 열 살은 어린 여인에게 굽히는 것이 왠지 치욕스러웠으나 일단은 그러마 하고 대답했다.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무영은 터덜터덜 걸어가는 고유생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저 능구렁이 같은 늙은이는 능력보다 욕심이 과도하게 많았다. 언제 또 갑자기 돌변하여 심술을 부릴지 알 수 없었기에 끝까지 긴장을 놓칠 수 없었다. 그가 운선과는 상관없는 방향으로 접어드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수월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주운아, 이만 구월산으로 돌아가자.”
“하지만 운선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제자의 얼굴을 보는 무영은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싸늘해졌다. 그녀의 감정이 이리 발전할 줄 알았더라면 무리해서 옆에 붙여 놓지 않았을 것이었다. 후회막급이었으나 이미 지나간 일이니 또 어쩌겠는가? 남녀의 마음이 타의로 좌지우지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는 무영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시간을 두는 것이 최선이었다.
“네가 저 못난 놈 뒤치다꺼리라도 하려면 그리 약해서야 쓰겠느냐? 보아하니 팔자에 살(殺)이란 살은 다 낀 놈이거늘. 그리 소중하거든 그 운명까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너를 단련해라.”
반은 빈말이고 또 반은 진심이었다. 시간이 지나 잊히는 감정이면 다행일 테고, 그래도 그리움이 남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주운 역시 스승의 의중을 찰떡같이 알아듣고는 더는 무리해서 조르지 않았다.
‘그저 살아 있으니 되었다.’
주운은 소매 끝을 들어 아직 맺혀 있는 눈물을 쓱 닦아내었다.
휘익!
날카로운 소리에 몸을 비틀자, 주운의 콧날 바로 위로 기다란 대침 하나가 지나갔다. 뒤쪽에 서 있던 무영이 소매를 휘저어 받아내니 이번에는 아예 뒤쪽을 겨냥하여 두 개의 대침이 더 날아왔다.
쉭!
무영은 제자가 다칠까 염려하여 주운을 왼손등으로 쳐냄과 동시에 오른손에 든 수월을 크게 휘둘렀다. 양쪽 어깨로 날아오던 대침은 검날에 튕겨 나가 무참히 부러져 버렸다. 그러나 애초에 대침은 무영의 시선을 잡아놓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다.
챙!
검은 인영이 거센 바람을 일으키며 다가오자, 주운은 월심을 꺼내 몸을 방어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장력의 간격이 너무 촘촘하여 달아날 틈을 찾을 수 없었다. 날이 어둑해져 상대의 정체조차 알 수 없으니 두려운 마음이 덜컥 들었다.
“누구냐?”
당황하여 뱉은 말에 주운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상대의 손이 그녀의 멱살을 가볍게 낚아챘다. 화들짝 놀라 월하인영(月下人影)의 초식을 사용하여 뿌리치려 했으나 상대의 악력이 너무 세서 어림도 없었다.
퍽!
그리고 다음 순간, 둔탁한 소리와 함께 주운의 몸이 축 처지더니 상대의 품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고작 대침 세 개를 던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무슨 짓이냐?”
무영은 애써 분노를 억누르며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당장이라도 상대의 목덜미를 잡아 흔들고 싶었으나 주운이 잡혀 있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역시, 당신이라면 이 아이를 구하기 위해 나타날 줄 알았습니다.”
검은 그림자는 쓰러진 주운을 한쪽 팔에 걸쳐 놓고는 예의 여유 있는 걸음걸이로 무영 앞에 나섰다.
“조양! 그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위해를 가한다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대침의 모양을 보았을 때, 무영은 상대의 정체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모두의 앞에서는 세상 군자인 척하지만,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온갖 비열한 짓을 마다하지 않는 희대의 흉한. 이 강호에 그만한 이가 또 있을까?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리 결례를 범하게 되어 송구합니다.”
시종일관 예의를 갖추고는 있었지만 어쩐지 경멸하는 빛이 역력했다. 검귀(劍鬼), 검신(劍神), 검선(劍仙). 인물에 비해 이름이 너무 과했다. 뭇사람이 우러러보는 검의 고수들이나, 조양에게는 그저 이름값도 못 하는 망국의 떨거지들에 불과했다. 특히 무영은 셋 중에서도 가장 하찮았다.
“원하는 게 뭡니까?”
조양의 하는 양을 지켜보던 무영은 최대한 흥분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그가 굳이 자신이 아니라 주운을 공격했을 때는 노리는 바가 분명히 있을 터였다. 수년을 지척에 두었는데도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다가 굳이 자신이 나타나기를 기다려 손을 쓴 것을 보면 틀림없었다.
“아시지 않습니까?”
조양은 피식 웃으며 천천히 주운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창현의 아이에게 확인하고 싶었던 그것!”
무영의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물론 알고 있으리라 짐작하긴 했지만, 막상 대놓고 들으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서로 아는 것을 공유하면 정답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형진까지 동원하여 기회를 노린지 벌써 반년이었다. 이무영이라면 자식처럼 아끼는 제자의 위험을 절대로 모른 척할 수 없다. 그러니 자신은 그저 적절한 때에 적절한 위기를 만들면 되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내가 싫다면?”
어차피 먹히지 않을 반항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구태여 물어보았다. 그녀 역시 자신이 완벽하게 당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 무뢰한에게만은 쉬이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조양이 한껏 비웃으며 검 끝으로 주운의 목덜미를 쿡쿡 찌르자 무영은 차라리 눈을 감아 버렸다.
“내가 알아낸 글자는 여덟 자, 이 중 그 깜찍한 녀석이 잘못 알려 준 글자를 바로잡아주면 됩니다.”
무영은 눈을 감은 채로 고개만 까딱 움직였다. 매번 이놈의 악랄한 수에 넘어가는 자신이 한심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무영의 표정을 확인한 조양은 씨익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더니 주운을 향해 겨누던 검 끝을 바닥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일필휘지로 여덟 자를 단숨에 써 내려갔다.
<素那不阿尉九樽水(소나불아위구존수)>
이윽고 눈을 뜬 무영은 조양이 써 내려간 글자를 내려다보았다. 참담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여덟 글자를 본 순간, 그녀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하였다. 일부러 안면 근육을 잔뜩 구겨 겨우 속내를 숨기고는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불과 수가 잘못되었군요.”
무영은 자신의 칼끝으로 두 글자를 각각 ‘佛’과 ‘物’로 고쳤다. 드디어 수수께끼의 단초를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조양은 오히려 더 난해한 글자가 나오자 혼란에 빠졌다. 융통성 없는 무영이 자기 제자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질을 할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게 무슨 뜻입니까?”
무영은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나 또한 잘못 알고 있었던 건지, 아예 길을 잃은 것 같습니다.”
한참 동안 무영의 얼굴을 노려보던 조양은 결국 이 자리에서는 아무 해결책도 찾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과연 이 수수께끼를 누가 풀 수 있단 말인가? 숨이 턱 막혀오는 느낌이 들자 명치 끝을 오른손으로 꾹꾹 누르며 진정시켰다.
“인연이 닿으면 또 봅시다.”
차가운 인사만 남겨두고 조양은 그렇게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반년을 기다려 얻은 결과물치고는 너무 보잘것없었다.
“깜찍한 녀석…….”
무영은 바닥에 써진 글자를 발로 쓱쓱 지우며 피식 웃었다. 애초에 운선이 글자를 고치든 안 고치든 수수께끼와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오히려 다른 글자로 바꿨다는 사실로 주의를 돌리는 바람에, 진짜 의미를 영영 감춰버린 것이었다.
“남은 평생을 고민해 보아도 절대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주운의 혈이 풀어질 때까지 기다릴 심산으로 무영은 나무에 기대앉았다. 역설적이게도 조양 덕분에 무려 십사 년 만에 수수께끼의 정답을 알게 된 셈이었다.
“하얀 냇물을 마시는 소와, 그 소의 뿔이 내려다보는 아홉 개의 우물이라.”
세 사람의 혈투는 주위가 어둑어둑해져 앞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마진건의 체력은 이미 한계에 도달한 지 오래였다. 금형권 한 명도 충분히 벅찬데 봉천까지 합세하니 매 순간순간이 죽을 위기였다. 더구나 봉천은 완전히 이성을 잃은 채, 날뛰고 있었다. 이 들소 같은 놈이 혼신을 다해 막는 바람에 서문 일행을 완전히 놓쳐버렸기 때문이었다.
“네놈의 뼈 마디마디를 끊어주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건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는데도 싸우는 내내 신음 한 번을 내지 않았다. 그저 찌르고 휘두르고 막는 세 가지 동작만으로 벌써 삼백여 합을 버티고 있었다.
‘참으로 멋진 사내다!’
봉천과 달리 금형권은 어느새 마진건에게 푹 빠져버렸다. 천서국에도 이런 실력자는 보기 드물었다. 본국으로 데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
“이제 끝내버리겠다!”
창의 회전이 미세하게 느려지자 봉천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왼 손목을 돌려 잡자 붉은 천이 쫙 펼쳐지더니 진건의 얼굴을 숨 쉴 구멍도 없이 감싸버렸다. 한 바퀴, 두 바퀴, 마지막 세 바퀴를 도는 순간, 끝에 달린 칼날이 정확히 진건의 인중을 파고들 것이었다.
“형권! 준비해라!”
어쩔 수 없이 형권은 자신의 철퇴를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들었다. 어차피 이 사내를 우리 편으로 만들 방도는 없었다. 그럴 바에야 최대한 고통스럽게 이놈의 사지를 짓이겨 놓을 작정이었다.
‘참으로 모진 삶이었다.’
진건은 그 짧은 순간에 자신의 지나온 삶을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후회도 미련도 없었지만, 오직 은이에 대한 미안함만은 진하게 남았다. 단 한 번도 안아주지 못한 내 딸. 서서히 숨이 조여왔으나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그에게는 하루하루를 버티는 게 훨씬 더 고역이었으니까.
퍽!
“후아…….”
격렬한 진동이 느껴지더니 진건의 몸이 허공으로 붕 날아올랐다. 얼굴을 꽉 조이던 붉은 천이 갈기갈기 찢어져 마치 꽃잎처럼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놈!”
수 장을 날아간 봉천이 울컥 각혈하자, 이번에는 형권이 철퇴를 크게 돌리며 달려들었다. 그 꼴을 우습다는 듯 지켜보고 서 있던 괴인(怪人)은 다시 한번 오른손으로 원을 그리더니 그대로 장력을 출수하였다. 태일장(太一掌)이었다.
퍽!
철퇴의 자루가 반으로 뚝 부러지며 형권 역시 바닥에 큰 대(大) 자로 널브러졌다. 그는 볼썽사납게 넘어진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부끄러워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버렸다.
“으아아아!”
봉천에게 이런 치욕은 난생처음이었다. 물론 오랜 격전으로 지쳐 있었다고는 하지만 고작 늙은이의 일 장에 날아가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찰 노릇이었다. 결국, 그는 실핏줄이 다 터져 시뻘게진 두 눈을 부릅뜨고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이 비겁한 놈아! 감히 기습해?”
소매를 툭툭 털며 옷매무시를 가다듬던 성곤은 혀를 끌끌 차며 대답했다.
“다 같은 악당끼리 비겁함을 논해 무엇 하겠나?”
*** 필사즉생(必死卽生):
반드시 죽고자 싸우면 그것이 곧 사는 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