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同歸於盡(동귀어진)
양표두는 어느 쪽 편을 들어야 할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응당 천서국의 사신들이 아군이어야 했지만, 하는 양을 보니 그쪽은 자신들을 도울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양표두님, 우리는 어쩔까요?”
안 그래도 같은 생각을 하는 표두들이 불안한 얼굴로 몰려들었다. 곧 큰 싸움이 날 것 같은데 괜히 중간에 끼어 피해를 볼 이유는 없었다.
“기회를 봐서 도망갑시다.”
어림짐작으로 세어보니 대략 스무 명 정도는 걸어서 움직일 수 있을 듯싶었다. 각자 다른 샛길로 움직이면 어찌어찌 목숨을 구할 수 있으리라. 모두 양표두의 신호에 맞춰 움직이기로 합의했다. 이제부터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이었다.
“자, 하나, 둘…….”
“아차!”
넷 중에 누구와 싸울까, 신이 나서 호들갑을 떨던 봉천은 그제야 꿈틀거리는 몇몇 표사들의 움직임을 눈치챘다. 그러고 보니 꽤 귀찮은 존재들이 아닐 수 없었다.
“저놈들이 괜히 나불거려서 좋을 게 없겠지?”
봉천이 옆에 우직하게 서 있는 형권에게 속삭이자, 그 역시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곡해고와 달리 그들은 나랏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저 사형과 같이 가면 재밌는 구경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따라나섰을 뿐이었다. 어차피 맡은 임무는 실패했으니 그저 한탕 즐겨보려는 참에 쓸데없는 증거를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치워!”
봉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금형권의 인영이 감쪽같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지금!”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양표두 역시 동료들에게 신호를 주었다. 최대한 빠르게 흩어지는 것이 목숨을 구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표두로서 산전수전 다 겪어온 그의 남다른 감이었다.
“어딜!”
그러나 수 갈래로 나누어진 표두와 표사들은 몇 걸음 나아가지도 못하고 하나둘 바닥에 쓰러졌다. 가까이에서는 형권이, 멀리서는 봉천이 그들의 발을 꽁꽁 묶어둔 것이었다.
핑!
봉천은 스무 개의 암기를 쉬지 않고 연달아 던졌다. 그의 별 모양 표창은 먼 거리가 무색할 만큼 정확하게, 사방으로 도망가는 표사들의 급소에 꽂혔다. 운이 좋게 치명상을 피한 이들은 고통을 참으며 다시 일어서서 달렸다. 이 지옥만 벗어나면 살아날 방도가 생길지도 몰랐다.
퍽!
이번에는 형권이었다. 열 근이 넘는 거대한 크기의 철퇴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살아남은 이들의 머리를 겨냥하고 있었다. 그는 살인을 위해 태어난 괴물이었다. 표정 없는 얼굴로 그저 목표물을 제거하는데 집중할 따름이었다.
‘빌어먹을…….’
동료들이 하나둘 고꾸라지는 것을 보며 양표두는 자신이 엄청난 착각을 했음을 깨달았다. 애초에 이 임무를 맡은 그 누구도 살아날 방도는 없었다. 차라리 용조처럼 진작에 도망갈 시도라도 해볼걸. 그는 의미 없는 후회만 남긴 채, 생을 마감했다.
“자, 이제 여러분들 차례!”
봉천은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허리를 앞뒤로 꺾으며 자지러지게 웃었다.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다. 그 많은 공물을 끌고 국경까지 가는 따분함을 어찌 견뎠겠는가? 이 네 명은 갖고 노는 재미가 쏠쏠할 것 같았다. 이왕이면 최대한 천천히 즐기고 싶었다.
“사형, 어찌할 겁니까?”
과묵한 진건이 먼저 말을 꺼낼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고작 두 명이었으나 사형제들이 모두 덤벼들어도 과연 승산이 있을까 싶을 정도의 실력자들이었다. 상황과 조건이 같아도 어려울진대, 심지어 지금은 네 명 모두 기력이 쇠한 상태였다.
“진건과 적우가 철퇴를 맡아라.”
붉은 옷은 성정이 괴팍하고 교활하니, 단순한 적우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상대임이 분명했다. 철퇴의 위력이 상당하기는 해도 힘을 위주로 하는 무공이니만큼 진건이 잘 대처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대사형! 저 혼자서도 상대할 수 있습니다.”
이 와중에도 적우는 일대 다수로 싸우겠다는 서문의 말에 쉬이 수긍하지 못하고 투정을 부렸다. 물론 그들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었다. 강호에서 이름 꽤 날리던 표사들이 제대로 대적해 보지도 못하고 나자빠지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했으므로.
허나, 그 역시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이 있었다. 수적 우위를 점하고 싸우는 건 자존심이 용납지 않았다.
“닥쳐라!”
“이사형…….”
진건은 설명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적우를 입 다물게 하고 묵묵히 의견에 따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서문의 표정에서 굳은 결심을 보았다. 그의 사형은 오늘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작정이었다.
“자, 그럼 우리 시작해볼까요?”
“그리 원한다면 겨뤄봅시다.”
서문이 부채를 쫙 펴서 가볍게 흔들자, 봉천 역시 소매 속에 감춰두었던 왼손을 드러냈다. 손에는 얇고 긴 붉은 천이 칭칭 감겨 있었는데 천 끝에는 한 자 크기의 검고 날카로운 칼날이 달려 있었다.
“화뢰낙무(花蕾落舞)”
봉천은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왼손을 쭉 뻗었다. 그의 손에 감겨 있던 붉은 천이 나풀거리며 수 장을 날아오더니 그대로 부채를 스쳐 지나갔다. 아슬아슬하게 피한 서문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선 다음, 부채를 접어 천 끝에 달린 칼날을 건드리자 천이 부채를 감아 돌았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다시 손목을 빠르게 돌리며 부채를 던져 올리는 한편 왼발로 사뿐히 쳐냈다.
“호오!”
그러나 서문을 향한 공격은 허수에 불과했다. 봉천은 아까부터 오직 현진만 바라보았다. 서문이 칼날을 피하는 사이 그는 이미 그녀의 눈앞에 당도해 있었다. 다행히 미리 대비하고 있던 현진이 쌍검을 들어 봉천의 오른손 초식을 모두 막아내었다.
“어머! 이 언니 너무 예쁘다.”
상대의 간드러진 목소리와 몸짓에 놀라 현진이 뒤로 수 발 물러나자 봉천이 다시 바짝 얼굴을 들이댔다. 뒤늦게 눈치챈 서문이 빠르게 쫓아와 부채로 상하좌우 찔러댔으나 봉천은 아주 여유롭게 전부 피해 버렸다.
“이 얼굴 갖고 싶네?”
봉천의 손가락이 얼굴에 닿자 현진은 온몸에 소름이 쪽 돋았다. 가까이서 보니 상대의 얼굴은 괴기스럽기 그지없었다. 하얀 분칠이 갈라져 얼굴 곳곳에 골이 패었는데 눈은 시커멓게 입은 시뻘겋게 칠해 꼭 사당패의 광대와 같았다. 그런 그가 얼굴을 들이밀고 혀를 날름거리니 죽을 맛이었다.
“조심해라!”
서문은 현진에게 신호하는 즉시 부채를 휘둘러 세침 여섯 개를 날려 보냈다. 그의 암기는 작지만, 매우 정확하여 피하기 쉽지 않았다. 더욱이 상대가 근저에 있었으므로 적어도 하나 이상은 적중하리라 예상했다.
“아!”
그러나 봉천은 피하기는커녕 세침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손바닥을 쫙 펴더니 그대로 여섯 개를 다 받아내었다. 세침은 마치 의도한 것처럼 그의 손바닥에 원 모양을 그리며 차례로 박혔다.
“재밌는 암기를 쓰네?”
봉천이 웃으며 몸을 뒤로 꺾자 왼손에 돌아왔던 칼날이 다시금 서문을 향했다. 붉은 천은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곧장 서문의 얼굴을 감싸듯이 날아갔다.
챙!
상대가 한눈을 판 사이 현진은 공중으로 살짝 날아오르며 거리를 벌렸다. 왼손 검으로 다음 공격을 방어함과 동시에 서문 쪽으로 날아드는 붉은 천을 자르기 위해 오른손 검을 날렸다.
“흥!”
그러나 봉천의 몸놀림이 좀 더 빨랐다. 현진의 검이 붉은 천에 닿으려는 찰나 천을 거둬들이더니 다음에는 검 끝을 단검처럼 잡아챘다. 한 합에 무려 세 개의 초식을 사용하여 서문의 부채를 공격하는 한편, 다른 손으로는 순식간에 표창 세 개를 현진에게 던졌다.
“악!”
“현진아!”
두 개의 표창은 쳐냈으나 나머지 하나는 결국 그녀의 왼쪽 가슴 위쪽에 적중하고 말았다. 마음이 급해진 서문이 다시 바늘을 날리며 기회를 엿보았으나 봉천은 붉은 천을 휘둘러 가볍게 막아내는 것이었다.
진건의 쪽도 고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형권의 철퇴는 힘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 위력 면에서는 진건의 창과 비등하였다. 그러나 초식의 변화는 훨씬 복잡 미묘하였다. 적우와 합을 맞춰 좌우를 번갈아 베어냈지만, 그때마다 철퇴의 회전에 막혀 버려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또한, 둥근 쇠구슬 사이사이 박힌 톱날처럼 생긴 돌기는 날카롭기 그지없어, 스치기만 해도 깊은 자상을 남겼다. 초반 몇 합을 부딪칠 때 함부로 달려들었던 적우는 벌써 온몸이 긁혀 피투성이가 되었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힘들다.’
진건이 서문 쪽을 흘끗 보니 서로 도울 방법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현진과 적우의 상처도 만만치 않았다. 아무래도 최후의 수단을 써야 할 것 같았다.
“형님!”
진건의 걸걸한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숲속을 울렸다. 다친 현진을 걱정하랴, 몰아치는 적의 공격을 막으랴 혼이 쏙 빠져있던 서문은 그 부름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자신을 사형 이외의 호칭으로 부른 적 없는 진건의 낯선 행동은 그들 사이의 오랜 약속 때문이었다.
***
“마지막 초식은 동귀어진(同歸於盡)이다.”
아마도 첫 임무를 마친 날이었을 것이다. 한겨울 추위에 작은 모닥불 하나 피워놓고는 뜬구름 잡듯이 갑자기 서문이 말을 꺼냈다. 온몸에 상처로 피투성이가 된 진건은 그저 타닥거리는 모닥불만 진득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먼저 상대를 부르는 쪽이 남는다.”
결코, 이길 수 없는 적을 만났을 때는 최소한의 피해로 막는다. 슬프지만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누군가의 희생이 남은 동료들의 목숨을 구하는 최선이었다.
“대신 마지막이니 평소 진짜 부르고 싶었던 호칭으로 부르도록 하자.”
서문은 언젠가는 반드시 올 그날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찌릿해졌다. 그래도 가능하다면 남는 쪽이 자신이기를 바라면서 그는 가장 믿을 만한 형제이자 친구에게 미소를 지었다.
“제가 먼저 부를 겁니다.”
한참을 묵묵부답이던 진건이 이윽고 서문을 바라보았다.
“그때는 군말 없이 떠나십시오.”
***
“형님! 약속 지키십시오!”
진건의 고함에 서문의 눈이 금세 뿌옇게 흐려졌다. 앞에서 빙글빙글 웃고 있는 적은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그러나 현진의 상태는 언제 숨이 끊어질지도 모를 것처럼 위중해 보였다. 결국, 다른 방도는 없었다.
“간다!”
서문의 대답을 들은 진건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지나갔다. 그는 왼발로 적우를 크게 차내는 한편, 창을 양손으로 마주 들어 상대의 철퇴를 강하게 밀어냈다. 형권이 불시의 공격에 놀라 움찔하자 그대로 공중으로 돌아 그의 어깨를 세 번 찍어 눌렀다.
퍽!
어깨에 가해진 진건의 무게 때문에 형권의 발목이 그대로 땅에 박혀 버렸다. 몸을 비틀었으나 주변에 지탱할 만한 도구가 없으니 빠져나오기 쉽지 않았다.
그 사이 진건은 창을 오른손으로 바꿔 들고는 몸을 날려 서문의 앞으로 달려왔다. 갑자기 거대한 덩치가 시야를 가리자 봉천 역시 당황하여 붉은 천을 자신의 쪽으로 당겨 방어했다. 그 틈을 노리지 않고 진건이 창을 돌려 봉천의 가슴팍을 찔러 들어가니 순식간에 서문과의 거리가 수 장 가까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놈!”
봉천이 자세를 가다듬고 공격을 취하려 할 때는 이미 진건을 제외한 모든 적이 사라진 후였다. 서문은 오른쪽 옆구리에 현진을, 왼쪽 옆구리에 적우를 각각 끼고 벌써 샛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겨우 발목을 빼낸 형권이 약이 바짝 올라 진건을 향해 달려왔다. 한 번 바닥을 디딜 때마다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 봉천 역시 현진을 놓친 것이 아까워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이 들소 같은 놈을 토막 내 죽여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덤벼라!”
양쪽에서 날아오는 적들을 태연하게 바라보며 진건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어느덧 노을이 숲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