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一葉知秋(일엽지추)
세 사람 중 둘의 옷차림은 멀리서 보아도 눈에 확 들어올 정도로 독특했다. 가운데에 서서 간드러지게 웃는 이는 마치 혼례복처럼 화려한 붉은 장포를 입고 있었는데 머리를 올려 묶은 끈과 신발까지도 붉은색으로 맞춰 여간 요란스럽지 않았다. 화장을 짙게 하긴 했으나 목소리로 보나 체형으로 보나 남자가 틀림없었다.
그의 오른쪽에 선 사내는 이 쌀쌀한 날씨에도 맨살에 고작 양단으로 만든 배자(褙子) 하나 달랑 걸치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뻗친 머리는 정돈이 되어 있지 않아 마치 막 자다가 일어난 모양새였다. 게다가 자르지도 않은 수염이 덕지덕지 붙어 있어 심히 지저분한 인상이었다.
“아무리 보아도 사신의 무리로 보이진 않는데요?”
적우의 질문에 서문이 대답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리 속에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십여 년 전의 만남이 눈앞에 그려지듯 떠올랐다. 려국의 왕의 목에 득의양양하게 칼을 겨누던 사내가 이제는 중년의 고수가 되어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청년 이서문은 그 치욕의 순간을 생생히 기억했다.
그는 무리에서 한 발자국 뒤쪽에 물러서 줄곧 팔짱을 끼고 있었다. 소박한 옷차림에 왜소한 체격이라 앞선 두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범해 보였다. 다만 얼굴이 매우 독특하였다. 눈이 양옆으로 쭉 찢어지고 피부가 심하게 얽어서 흉측한 느낌마저 들었다. 시종일관 못마땅한 얼굴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이 상황에 불만이 가득한 듯했다.
“우리가 너무 늦었구나! 아휴, 아쉬워라.”
낭창낭창한 몸짓으로 손부채를 만들어 흔드는 붉은 옷의 사내가 너스레를 떨자 지저분한 수염의 사내가 팔꿈치로 쿡 찌르며 짜증을 냈다.
“봉천아, 적당히 좀 해라. 우리는 놀러 온 게 아니다.”
“금형권! 이 무식한 놈아,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랬잖아!”
봉천이 발을 동동 구르며 화내는 꼴이 꼭 어린 여자아이 같았다. 형권은 그를 통제하는 것이 자신의 능력 밖임을 잘 알고 있었으나 오늘따라 유독 창피한 마음이 들었다. 결국, 뒤를 돌아보며 대사형에게 눈짓을 보냈다.
“내버려 둬라. 앞으로 다시는 안 볼 사람들이니, 이 추태를 기억이나 하겠느냐?”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현진은 인내심이 다 하여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자신들을 원숭이 보듯 세워놓고는 정작 자기네들끼리 말다툼이나 하고 있으니 무시당하는 기분도 들었다. 차라리 빨리 싸움을 시작하는 편이 더 나을 듯싶었다.
“사형, 우리가 먼저 도발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현진의 물음에도 서문은 또 한 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적어도 한 명의 실력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과연 전력으로 붙었을 때, 자신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추이를 지켜보면서도 최대한 사형제들을 다치게 하지 않을 방도를 내내 궁리하고 있었다.
“곡대협, 오랜만입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드디어 서문이 입을 떼자, 투덕거리던 봉천과 형권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그들은 이서문이 낯설었지만 태을신교 칠원성군의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대단한 실력자라는 소문이 있었으나, 자신들의 사형과 친분이 있는 줄은 몰랐던 터였다. 두 사람은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아주 오래전 일인데 기억력이 좋은 편이군요.”
곡해고 역시 어린 서문을 기억했다. 그 분노로 이글거리던 형형한 눈이 한층 깊어진 것 같았다.
“이미 일이 마무리되었으니, 아쉽지만 그냥 돌아가심이 어떻겠습니까?”
서문은 지극히 예의를 다해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형제들은 왜 갑자기 대사형이 이런 행동을 취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진건만은 그의 의중을 눈치챘다.
‘저 세 사람만을 상대한다 해도 우리가 열세로구나. 어차피 가져갈 공물이 없으니 이대로 물러가 준다면 더할 나위 없지.’
곡해고의 찢어진 눈이 한층 더 가늘어졌다. 서문의 얕은수를 모르지 않았으나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기도 했다. 어차피 공물은 틀렸고, 괜히 이들과 싸워 이겨봤자 별 이득도 없었다. 그저 작은 분풀이라면 모를까?
“그러게 말입니다. 나랏일에는 관심이 없다 보니 그다지 아쉽지도 않습니다. 다만,”
곡해고의 큰 입이 귀밑까지 깊게 찢어졌다. 사실 조양의 채근에 이곳까지 부랴부랴 오기는 했지만, 함부로 오라 가라 한 일에 대해서는 꽤 마음이 상했던 차였다. 그러니 그 불쾌함은 풀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아우들이 여러분 중 누구의 목이라도 하나 가져가야 면이 서지 않겠습니까?”
적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게졌다. 그의 말에는 당연히 실력으로 우위에 있다는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아직 서른이 되지 않았으나 싸움에는 잔뼈가 굵은 그였다. 감히 싸워보지도 않고 함부로 판단하여 얕보는 상대의 태도가 꼴 같지 않았다.
“우리가 보통 인연은 아니지 않습니까? 되도록 평화롭게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대사형!”
그러나 서문은 적우의 마음을 눈치채고 한발 앞서 나섰다. 모두를 위해서 싸움은 피해야 했다. 만약 피할 수 없더라도 자신의 아우들은 살리고 싶었다. 자존심이야 잠깐 상하면 그뿐, 그는 승산 없는 싸움을 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이미 체력도 기력도 소진한 그들이 저 출중한 고수들을 만나 몇 합이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럼, 나는 옛정을 생각해서 수하들을 데리고 돌아가겠소. 허나, 내 아우들을 설득할 자신은 없다오.”
곡해고는 다시 뚱한 표정이 되어서는 미련 없이 뒤로 돌았다. 왼손을 들어 가볍게 손짓하니 에워싸고 있던 군사들 역시 모두 철수하는 것이었다.
“사형, 그럼 우리는?”
봉천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묻자, 곡해고는 피식 웃었다.
“마음이 풀릴 때까지 놀다 오렴.”
몇 걸음 걷지도 않은 것 같은데 그의 인영이 곧 숲속으로 사라졌다.
“자, 그럼 우리 신명 나게 놀아볼까?”
봉천의 분칠한 얼굴이 흥분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얼마나 달렸을까? 제법 쌀쌀한 날씨였으나 마세풍을 업고 달리는 운선은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다. 지난밤부터 그는 수레를 무너뜨리는 밑 작업을 하느라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 게다가 형진과 사투를 벌인 뒤였기에 서 있는 것조차 버거운 몸 상태였다. 오직 사부를 살리겠다는 집념으로 달리고는 있었으나 언젠가부터 눈앞이 가물가물하고 귀가 멍해졌다.
“운선아……. 버틸 수 있다. 그러니 좀 쉬자꾸나.”
마세풍이 가끔 의식이 돌아올 때마다 운선을 설득했으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등 뒤로 느껴지는 사부의 숨결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지체한다면 영영 그의 숨이 멎어버릴 것 같았다.
‘할 수 있다. 해야 한다.’
운선은 비틀거리는 다리로 급경사진 비탈면을 오르기 시작했다. 뒤에서 무엇이 당겨지는 것처럼 자꾸 아래로 미끄러지니, 안 그래도 쥐꼬리만큼 남아 있던 체력이 고갈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다.
“내가 도와주련?”
익숙한 목소리가 운선의 귓등을 때렸다. 날카로운 쇳소리, 한껏 비아냥거리는 말투.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고유생!”
“건방진 녀석, 네놈보다 몇 곱절을 더 산 선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쯧쯧”
고유생은 예의 상대를 잔뜩 비꼬는 얼굴로 운선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다행히 마세풍은 죽음의 문턱을 오락가락하는 것 같으니 이 애송이 하나만 제압하면 될 일이었다.
“어린 것이 재수는 참 없는데 명줄은 또 길구나.”
성곤과 조양의 싸움에 낄 마음이 없었던 그는 기회를 봐서 빠져나왔다. 황석파로 돌아갈 가장 빠른 길로 접어들었는데 운 좋게 강운선을 만난 참이었다. 반년 전,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이가 눈앞에 제 발로 나타나니 까무러치게 놀라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감격스러웠다.
‘이제 비급을 얻을 수 있다!’
그동안 조양에게 수하처럼 부려진 것에 대한 치욕, 성곤에게 당한 모멸감. 숱하게 무너졌던 자존감을 한 방에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닌가? 그는 당장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장문을 돌려주고 비급을 내놓으면 목숨만은 살려 주마.”
물론 그럴 마음은 없었다. 운선이 마세풍을 사부님이라고 부르는 순간부터 반드시 그를 죽여버리겠다 다짐했었다. 감히 사문의 무공을 배운 려국 놈을 어찌 살려두겠는가? 다만 지금은 살살 꼬셔내어 힘들이지 않고 쉽게 물건을 얻고 싶을 뿐이었다.
“사부님은 이제 황석파와 관련이 없다. 또한, 해심밀경소는 당신 같은 소인배가 가질 물건이 아니다.”
운선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대답했다. 그의 배신이 아니었다면 마세풍이 이리 크게 다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사문의 형제를 이처럼 죽음으로 내몰 수는 없었다. 그는 운선이 만난 이들 중에 가장 파렴치한 소인배였다.
“그럼 딱 그 입만 살려두마.”
어린 것에게 험하게 욕을 먹고 나니 고유생 또한 마음을 바뀌었다. 일단 온몸의 힘줄을 다 끊어놓고 다시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그는 월산검을 천천히 검집에서 뽑았다. 그래도 사형에게 배운 게 있을 테니 이십여 합 정도는 버티겠지 싶었다.
쉭!
운선이 어정쩡하게 자세를 잡자마자, 고유생은 망설임 없이 검을 쭉 찔렀다. 좌우로 심하게 움직이는 푸른 검기가 일시에 운선의 눈앞으로 뻗쳐 들어왔다. 안 그래도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던 운선은 도저히 공격을 막을 수가 없었다. 보법을 사용하여 수 장을 뒤로 물러서는 게 최선이었다.
“흥, 생각보다 더 형편없구나.”
이번에는 몸을 크게 비틀어 돌리면서 운선의 옆구리를 공격했다. 방어에만 급급한 상대가 몸을 굽히면 그 반동으로 뒤를 돌아 반대쪽 옆구리를 베어낼 생각이었다. 피는 많이 흘리겠지만 치명상은 아니기 때문에 충분히 고통을 줄 방법이었다.
“머저리 같은…….”
예상대로 운선이 몸을 굽혀 월산검의 칼날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고유생은 피식 웃으며 바로 뒤로 돌아 들어가 검을 수평으로 베어내었다.
캉!
“어라?”
살이 베이는 소리가 아니라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자 고유생은 바로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날려 단풍나무까지 빠르게 이동하고 나니 그제야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너는?”
운선은 검으로는 실전 경험이 미천했기에 고유생의 일격에 조금도 대처할 수 없었다. 옆구리를 베일 뻔한 그 위험천만한 순간에도 혹여 마세풍이 다칠까 봐 앞으로 넘어진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흙투성이가 된 상체를 겨우 일으키고 나서야 자신의 앞을 막아서고 있는 하얀 옷자락을 볼 수 있었다.
“주운?”
“운선아, 괜찮으냐?”
주운의 얼굴은 걱정과 안도의 감정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었다. 늘 심드렁하고 무표정했던 그녀의 낯선 모습에 운선은 내심 깜짝 놀랐다. 무엇보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네 걱정이 되어 따라왔다. 덕분에 도울 수 있게 되었구나.”
주운은 되도록 운선이 걱정하지 않도록 웃어주고 싶었으나 오른팔이 저려 씁쓸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무리해서 고유생의 검을 쳐내는 바람에 근육이 다친 모양이었다.
“여기는 내가 맡을 테니 너는 어서 마문주를 모시고 가라. 대신 일이 끝나면 꼭 나를 보러 와야 한다.”
운선은 자신의 등에 업힌 마세풍과 주운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물만 뚝뚝 흘렸다. 너무나 소중한 두 사람이었기에 누구 하나를 선택할 수 없었다. 이대로 주운과 함께하면 어찌어찌 도망갈 기회는 잡을지도 모르지만 마세풍의 목숨은 끝이었다. 그렇다고 사지(死地)에 주운을 두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멍청이야, 감히 나를 무시하는 거냐? 이래 봬도 검선의 유일 제자란 말이다. 지체 말고 얼른 가!”
주운은 버럭 화를 내며 머뭇거리는 운선을 뒤로 세게 밀어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절대로 자신을 버리고 가지 않을 운선임을 잘 알고 있었다.
“주운, 나는 못 가요. 못 갑니다.”
“지금 가지 않으면 여기서 콱 죽어버릴 테다!”
주운이 월심을 들어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댔다. 그녀는 지금 어떻게든 운선을 살려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꼴값을 떠는구나.”
고유생은 기가 막혀 두 연놈이 하는 양을 팔짱 끼고 지켜보고 있었다. 주운이 대단한 실력자임은 알고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저들 세상에서나 통용될 말이었다. 아직 자신의 급에 덤비기에는 한참 모자랐다. 약 좀 올리다가 죽여버린 후에 운선을 쫓아도 시간은 충분할 터였다.
“주운…….”
“대신 꼭 찾아와. 응?”
운선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그는 주운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가지 않으면 정말로 목을 그어버릴 게 뻔했다.
‘반드시 찾아오겠습니다. 그러니 살아 있어요. 꼭…….’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산등성이를 넘어가고 있었다. 싸늘한 가을바람이 숲을 쓱 훑으며 지나가자 나뭇잎들이 하나둘 앓는 소리를 내었다. 끝까지 떨어지지 않고 버티겠다는 나름의 의지였다.
챙!
챙!
이십여 합이 넘어가자 주운은 자신이 절대로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감히 오대산검의 고수라 불릴만한 실력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열심히 수련할걸. 지금 해봐야 아무 소용도 없는 생각을 하는 자신이 퍽 우스웠다.
“아직도 제자리걸음이구나. 게을러터져서는.”
냉정하고 메마른 목소리가 주운의 등 뒤로 매섭게 꽂혔다. 그녀는 그제야 참았던 눈물을 왈칵 터뜨렸다. 외롭고 고단했던 지난날을 일시에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이제 살았다고 생각하니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사부님…….”
제자가 위험에 처하면 스승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법이었다.
***일엽지추(一葉知秋):
나뭇잎 하나가 떨어짐을 보고 가을이 옴을 안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