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自作自受(자작자수)
캉!
서문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부능파의 비월을 부채로 막았으나 그 힘이 어찌나 센지, 온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눈은 잃었으나 공력은 몇 배로 늘어난 모양이었다. 바로 뒤따라오는 마차가 있었으므로 물러설 곳이 없었다. 어쩌면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손에는 땀이 흥건했다.
“이건 내 일이다.”
그때, 마세풍의 차가운 손이 서문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집안싸움에 남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애써 외면하던 과오를 드디어 청산할 때가 온 것이었다.
서문은 차마 물러서지 못하고 뒤를 돌아 스승의 얼굴을 찾았다. 성곤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친우의 뜻을 지켜주라는 의미였다.
“마세풍! 지금 무얼 하는 건가?”
자신의 대사형을 향해 일갈하는 부능파의 얼굴은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노망난 늙은이가 세상과 격리되어 살다 보니 자신의 국적도 신분도 잊은 모양이었다. 이십여 년 전, 한 문파의 장문이라는 자가 비겁하게 도망친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나라를 배신하고 려국인을 돕고 있으니 같은 문파라는 것이 수치스러울 지경이었다.
“아우야, 오랜만이구나. 몸은 좀 어떠하냐? 누가 보면 눈이 보이는 줄 알겠다.”
마세풍은 조금의 방어 자세도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실실 웃으며 부능파의 곁으로 한 걸음씩 다가갔다. 상대는 언제라도 죽일 준비가 된 채로 살기등등한데 장난스럽게 농담이나 하고 있으니 정말로 미친 사람 같았다.
“흥! 오늘 매국노를 내 손으로 처단하고 말겠다!”
그간 만나지 못했을 뿐, 마음속으로는 이미 사형과 인연을 끊은 지 오래였다. 비록 눈이 안 보이긴 했으나 실력으로만 따지면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었다.
“너는 참, 한결같이 경박하고 경솔하구나. 어찌 그리 사람이 변하지 않누?”
그런 아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세풍은 시종일관 얼굴에 웃음을 띤 채로 거리를 좁혀 나갔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다소 당황했는지 부능파는 자신도 모르게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상대의 실력을 잘 알고 있다 보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마세풍과의 거리는 한 장 정도에 불과했다. 비월을 뻗기만 해도 닿을 거리임을 모르지 않을 텐데 웬일인지 부능파는 선뜻 공격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사제, 대사형은 이제 영명권을 쓰지 못하네.”
어디선가 신경질적이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은 상대의 정체를 바로 눈치챘다. 황석파의 장로 고유생이었다.
“망종(芒種)!”
다시 한번 고유생이 일갈하자, 기다렸다는 듯 부능파의 주먹이 마세풍의 안면을 덮쳐왔다. 오른손으로 뜨거운 바람을 휘몰아 왼손으로 감싸 안으면 주먹 안에서 거대한 회오리가 되는 무시무시한 초식이었다.
“사부님!”
운선의 간절한 외침을 들었는지 마세풍은 허리를 뒤로 확 젖혔다.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상대의 두 주먹이 얼굴 위로 흘러나갔다. 또한, 왼쪽 옆구리 쪽으로 몸을 비틀며 두 발을 차례로 내 뻗으니 자연스럽게 다음 동작인 소만(小滿)에 대비할 수 있었다.
“이것은 망종타구(芒種打球)!”
‘저것이 사부님이 말한 권풍을 파(破)하는 법이로구나.’
초식과 함께 그것을 깨뜨리는 방법도 함께 알려주다니, 참으로 기묘한 가르침이었다. 그런데 인제 보니, 그것까지가 영명권의 완성인 셈이었다.
“운선아! 이번에는 큰 더위를 한번 피해 보자꾸나!”
아니나 다를까, 부능파의 주먹은 이제 대서(大暑)의 초식으로 변하여 마세풍의 단전을 강하게 타격했다. 주변에 있는 서문에게도 뜨거운 바람이 훅 끼쳐왔는데 그 폭발적인 기 때문에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영명권은 날씨의 변화를 본 따 만든 무공이란다. 스물네 개의 절기(絶技)는 실제로 스물네 개의 절기(節氣)와 같다.”
운선은 황당하게도 절체절명의 결전을 바라보면서 가르침을 곱씹는 중이었다. 고작 반밖에 배우지 못했으나 실제로 접하니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도 깨닫는 바가 있었다. 혹여 마세풍이 다칠까 봐 조마조마하면서도 한 동작 한 동작을 따라잡는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초롱초롱했다.
‘타고난 천재구나.’
이 역설적인 상황을 바라보며 서문은 그저 기가 막혔다. 목숨을 걸고 싸우면서도 제자를 가르치는 스승이나, 마치 어미 새가 주는 모이를 받아먹는 새끼처럼 꿀꺽꿀꺽 삼키는 제자나 무섭기는 마찬가지였다.
“자! 이제부터 안 배운 부분이니 잘 보아라!”
오십여 합이 넘도록 뜨거운 기운만 뿜어내던 부능파의 주먹은 금세 차가운 기운을 가득 담았다. 아까와 달리 잠잠하고 차분하게 공기를 가라앉히더니 불쑥 몸을 크게 낮추며 마세풍의 다리 쪽으로 두 주먹을 뻗치고 들어왔다.
“이것이 상강(霜降)!”
마세풍은 기다렸다는 듯, 오른발로 부능파의 왼손을 걷어차고 뒤이어 들어오는 오른손을 뛰어넘었다. 상대를 등지게 된 자세에서 뒤로 공중돌기를 하니 부능파의 어깨 위로 마세풍이 올라간 형상이 되었다.
“이건 오늘부터 상강운기(霜降雲氣)라고 부르자.”
자신의 등 뒤로 사뿐하게 내려오며 키득거리자 부능파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두 주먹을 허리 좌우로 끌어당기더니 영명권 최고 단계 영명대한(靈名大寒)을 준비했다.
“아이쿠, 큰일이구나.”
마세풍은 온갖 호들갑을 떨며 부능파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그 모양이 꼭 상대를 조롱하는 것 같아 지켜보던 현진은 그만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고사형!”
“좌삼, 우칠!”
부능파의 외침에 고유생은 출수 방향을 대답했다. 마세풍이 피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부능파의 왼 주먹이 그의 단중혈을 강타한 뒤였다.
“사부님!”
운선이 뛰쳐나가려는 것을 적우가 뒤에서 끌어안아 겨우 말렸다. 그와 동시에 성곤은 경공을 사용하여 소나무 숲 뒤쪽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그는 한 번 더 고유생의 목소리가 들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이 쥐새끼 같은 놈아!”
고유생은 성곤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자마자 빠르게 몸을 날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진정으로 맞붙는다면 이 검 귀신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최대한 조양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면 그뿐, 목숨을 걸고 싶지는 않았다.
“어디 한번 잡아 봐라!”
내공이라면 비할 바가 못 되지만 경공만큼은 성곤에게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혹여 잡히더라도 미리 힘을 빼놓으면 상대가 허점을 보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소 비겁해 보이기는 해도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다면 충분히 해볼 만했다.
거의 수 리는 날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때, 고유생은 갑자기 뒷덜미가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성곤의 태일장(太一掌)이 고유생의 등 뒤로 거세게 불어닥쳤다.
“윽!”
“참으로 얄궂은 놈이구나!”
태을신공을 끌어올려 보법을 강화한 성곤은 불과 반 식경 만에 고유생을 따라잡았다. 평소에도 그를 고깝게 여겼기에 이참에 무참히 밟아줄 생각이었다.
“욕심이 많아 그렇지 심성은 나쁘지 않아.”
늘 성곤이 이죽거리면 나서서 사제를 감싸던 마세풍이었다. 친우의 얼굴을 떠올리니 도저히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그런 사형을 배신하고 죽이려 하다니 더는 용서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 검귀야! 오늘 참 잘 만났다.”
가까스로 몸을 비틀어 성곤의 장풍을 피해낸 고유생은 자신의 보검을 꺼내 공격 자세를 취했다. 빌어먹을 사형 때문에 얼굴은 여러 번 마주쳤으나 실제로 겨루어 본 적은 없었다. 기실 악명만 높을 뿐이지 자신의 실력과 비등할지도 몰랐다. 검에서는 조양에게도 크게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그였다.
“팔마(八魔)야(마세풍의 별호), 네 팔자도 참 더럽다.”
성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신의 보검, 태일검(太一劍)을 꺼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맨손으로 때려죽여도 시원찮았으나 그래도 친우의 사제이니 예의는 갖춰야겠다 싶은 마음이었다.
“월산서풍(月山西風)”
시작은 고유생이 먼저였다. 사제 부능파의 비월검법보다 유명하지 않지만 월산검법의 정교함은 오대산검의 검법 중에서도 최상이었다. 기실 그는 사부에게서 권풍을 배우지 못한 한(恨)을 내공에 쏟았는데, 황석파의 내전 무공인 진헌신장(陳獻神章)과 월산검이 만나면 비월검을 능가하는 검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용을 쓰는구나.”
그러나 성곤은 고유생의 화려한 검법에 방어만 할 뿐, 별다른 공격 자세도 취하지 않았다. 정교하고 화려한 것은 틀림없으나 상하좌우 허점투성이였다.
“태일천하(太一天下)”
월산검이 수십 개의 검기를 내뿜으며 성곤의 요혈에 다다른 순간, 그는 단 두 걸음을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검을 휘두르니 상대가 흩뿌려놓은 검기가 가운데로 모여들었다. 여기에 태을신공의 내력을 5할 이상 쏟아붓자 월산검이 순식간에 검광을 잃었다. 태일검에 꽁꽁 묶여버린 탓이었다.
“이런!”
고유생은 화들짝 놀라 자신의 검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월산검에 딱 붙어 있는 태일검까지 같이 당겨져 되레 자신의 명치 끝으로 검날을 꽂아 넣는 꼴이 되었다.
“헉!”
결국, 검을 손에서 놓아버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고유생은 극심한 충격에 고개를 잔뜩 떨궜다. 그래도 한 문파의 장로라는 이가 수십 합을 넘기지 못하고 진 것이 분하고 수치스러웠다.
성곤은 태일검에 붙은 월산검을 신경질적으로 흔들어 털어내더니 바로 고유생에게 다가갔다. 이 정도면 충분히 상대의 위신을 세워준 셈이었다. 더는 시간을 끌 상황도 아니었기에 인제 그만 대결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죽어라!”
캉!
고유생의 목덜미에 칼날이 다다른 찰나, 또 다른 검 하나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태일검에 맞부딪쳤다.
“아직 아닙니다.”
상대를 확인한 성곤의 얼굴이 일순 사나워졌다. 푸른 도포를 휘날리며 여유만만하게 웃고 있는 그는 하룻밤을 꼬박 달려온 무림 맹주 조양이었다.
“제자야, 네 사부는 그렇게 약골이 아니다.”
바닥에 고꾸라졌던 마세풍이 몸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일어섰다. 여전히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보니 적절한 때에 잘 피한 것 같았다. 운선은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이 배신자 놈, 오늘 반드시 네 목을 떼어 주마!”
부능파는 드디어 땅에 꽂아두었던 비월을 뽑아 들었다. 아무래도 함께 배운 영명권으로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하겠다는 판단이었다. 아무리 대단한 사형이라도 비월의 초식을 전부 깨뜨릴 수는 없었다.
“아우야, 인제 그만하자.”
“흥! 네놈이 당할 재간이 없으니 꼼수를 부리는구나! 어림없다!”
처음으로 마세풍의 진지한 목소리가 들리자 드디어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부능파는 의기양양해졌다. 역시 검으로는 세상에 자신을 이길 자가 없었다.
“우리 더는 죄를 짓지 말자.”
마세풍은 치밀어오르는 객혈을 꿀꺽 삼키며 부능파 쪽으로 걸어갔다. 다시 한 장 안으로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지자 이번에도 부능파는 뒤로 조금씩 움직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상대의 기운이 느껴지면 심히 불안해지는 모양이었다.
“고사형!”
부능파가 절실하게 외쳤으나 당연히 고유생의 대답은 없었다.
“네가 눈을 잃은 것처럼 나도 손목을 잃었다.”
어느새 그의 앞까지 한달음에 다가간 마세풍은 두려움에 덜덜 떠는 부능파의 손을 잡아 자신의 오른쪽 손목에 갖다 대었다.
“고유생 말처럼, 나는 이제 영명권을 쓰지 못해. 그러나 전혀 고통스럽지 않다.”
마세풍의 눈에서 한 방울, 두 방울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참으로 오랜 세월을 죄책감과 후회 속에서 살았던 그였다. 아직도 추악한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우를 구해주는 것이 그의 마지막 소망이었다.
“잘 되었소!”
“사부님!”
“마문주님!”
마세풍의 옆구리를 꿰뚫은 비월의 칼날에서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부러 두려움에 떠는 척 연기를 했던 것이 주요했다. 멍청한 자신의 사형은 못난 아우가 진정 반성이라도 한 줄 착각한 모양이었다. 참으로 구역질 나는 인간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대사형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었다. 나라를 배신하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매국노일 뿐이었다.
“으흐흐흐흐흐.”
부능파는 무릎을 꿇고 앉아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그의 소름 끼치는 절규가 깊은 산골짜기에 가득 울려 퍼졌다. 숙원을 풀어낸 것처럼 시원하고 경쾌한 웃음이었다.
퍽!
“윽!”
그러나 둔탁한 격음과 함께 그 오싹한 웃음소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뚝 그쳤다. 부능파의 파랗게 질린 얼굴 앞에는 옆구리에서 빼낸 비월을 지팡이처럼 지탱하고 선 마세풍이 있었다. 주먹을 꽉 쥔 그의 왼손은 한때 가장 아꼈던 자신의 사제 부능파의 이마에 큰 구멍을 만들어 냈다. 그의 필생의 절기 영명대한(靈名大寒)이었다.
“이제 우리의 겨울은 끝났다.”
마세풍은 땅에 꽂은 비월을 뽑아내어 자신의 왼손 힘줄마저 끊어내었다. 그리고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지는 것이었다.
*** 자작자수(自作自受):
자기 스스로 저지른 악은 스스로 그 악과(惡果)를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