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54화 (54/209)

#54화. 奮義忘身(분의망신)

연향 객잔에서 기다리고 있는 조양에게 전서구가 도착한 것은 노을이 한창 지고 있을 때였다. 어쩐지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 자신이 직접 운평표국 무리에 합류했으며 축시(丑時)가 넘으면 이쪽으로 출발한다는 형진의 보고였다.

“이런 멍청한…….”

서신을 읽는 조양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더는 참지 못하고 구겨서 박박 찢어 버리더니 한동안 머리를 싸매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곧 다른 서신을 한 장 써서 들고 부리나케 연향표국으로 달려갔다.

“지금 당장 이 서신을 서이국(천서국)에 전달할 전령이 필요합니다.”

그의 얼굴에는 침착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연향표국의 국주는 처음 보는 맹주의 황망한 모습에 사뭇 당황하였다. 그러나 조양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체면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일이 잘못된다면 지금껏 지켜왔던 모든 것이 무너질 터였다.

“또한, 튼튼한 말 한 마리를 빌리겠소.”

서이국에서 한 무리의 무사들을 이끌고 국경 인접까지 마중을 나온다는 확답을 받은 지 불과 한나절이 지나지 않았다. 서신을 무리 없이 받는다고 해도 오는 데까지 하루가 꼬박 걸릴 것이었다. 일단은 직접 가서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했다.

‘제발, 버텨라, 버텨야 한다.’

어둠을 가르는 조양의 모습을 지켜보기라도 하는 듯, 달빛이 유난히 깊은 밤이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용조의 앞은 그야말로 지옥도였다. 수십 명의 복면인이 수레의 포로들을 마차로 옮기는 사이로, 무자비한 참극의 현장이 벌어지고 있었다.

자신의 바로 앞에서는 검은 직부사자(直符使者)가 구 척이 넘는 창을 휘두르며 반경 안에 들어온 이들을 거침없이 베고 있었다. 그 옆에는 야리야리한 꽃잎 같은 여인이 양손에 하나씩 특이한 모양의 검을 쥐고 무자비한 살육을 벌이는 중이었다.

이쪽은 글렀다 싶어 이번에는 건너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허리가 심하게 삐어 몸을 일으키지는 못하고 네발로 기어 움직였다. 그러는 사이 진득하고 검붉은 피가 잔뜩 묻었고, 역겨운 냄새가 온몸에서 진동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건너편은 더하면 더했지 나을 것이 없었다. 양표두를 위시한 다섯 명의 표사들이 신명 나게 부채를 휘두르는 이서문을 상대로 진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다행히 양표두의 실력이 출중하여 어찌어찌 치명상은 면하고 있었으나 매번 사혈만을 찌르고 들어오는 상대의 공격을 피하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국주님은?’

불현듯 국주의 안위가 걱정된 용조는 최대한 몸을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혹시나 했던 희망은 지푸라기 한 올 남기지 않고 절망으로 돌아왔다. 함께 따랐던 표사 일곱은 퇴로에 순서대로 널브러져 있었으며 그의 주인이자 오랜 친구인 마청옥은 뇌수가 터져 절명하였다. 그 앞에 명부의 시왕과 같은 모습으로 거대한 덩치의 백발 노인이 형형한 눈빛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용조는 참담한 심정으로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포로를 구하고 있는 복면인들을 제외하면 적은 겨우 넷에 불과했다. 적 하나에 무려 십수 명의 아군이 상대하고 있었으나 그조차도 버거워 보였다. 모두 죽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탈출구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분노와 투지는 이내 공포심이 되었다. 공물이고 뭐고 일단 목숨을 구하는 것이 순서였다. 용조는 뼛속까지 밀려오는 통증을 참아내며 허리를 일으켰다. 그리고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앞쪽으로 뚫고 나간다.’

용조가 달려오는 양을 보고 도와주는 줄로만 알았던 양표두는 그가 자신을 지나쳐 앞으로 나아가자 기가 턱 막혔다.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가는 총표두라니! 어찌나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지 하마터면 이서문의 부채에 신주혈을 찍힐 뻔하였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있는 힘껏 용조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야, 이 후레자식아!”

그러나 용조에게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필생의 내력을 끌어올려 허리와 다리에 집중한 그는 십수 장을 바람처럼 내달렸다. 눈앞에 거슬리는 것들을 검으로 쳐낼 때마다 아군인지 적군인지도 모를 이의 검붉은 피가 얼굴에 튀었다. 그저 사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다.

“아주, 지랄을 하는구나. 너 같은 걸 총표두라고 따르는 수하들이 참으로 불쌍하다.”

그때였다. 통통하고 땅딸한 노인이 혀를 쯧쯧거리며 용조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쳐다보는 양이 자신을 세상 한심하게 보는 표정이었다.

“이 늙은이가 노망이 났나?”

용조는 연성검을 대각선으로 치켜들고 그대로 밀고 나갔다. 저따위 허접한 늙은이에게 초식이고 뭐고 쓸 것도 없었다. 단순하고 무식한 동작이었으나 되도록 일격에 죽이려는 마음에 8할 이상의 공력을 실어 위력이 상당했다.

챙!

“어라?”

어쩐 일인지 불과 서너 장밖에 안 되는 노인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허리춤에서 뜨끈한 열감이 느껴지는 순간, 용조는 자신의 왼쪽에서 검은 옷자락을 나부끼고 있는 덩치 큰 사내의 존재를 깨달았다.

“적…적우……?”

비록 반 토막이 난 행덕이었으나 용조의 옆구리를 꿰뚫는 데에는 조금도 지장이 없었다. 그는 울컥 피를 토하는 동시에 그 자리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연성검이 차마 노인에게 닿기도 전이었다.

“쯧쯧, 잔인하다. 잔인해.”

마세풍은 워낙에 살인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이 참극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늘 피바람이 불어닥치는 강호가 싫어 산속에 은거했건만, 과거의 은원에 발목이 잡혀 또다시 이 역겨운 광경을 목격한 것이었다.

반면 적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용조의 옆구리에서 행덕을 빼냈다. 그리고는 성난 멧돼지처럼 적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가 행덕을 대각선으로 휘두르는 순간, 더운 바람이 뭉쳐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뽀얀 흙먼지가 일어난 틈으로 손을 쭉 뻗으니, 날카로운 행덕의 단면이 표사 둘의 목을 차례로 그어 버렸다.

“이게 다 내 업보려니…….”

이미 자신의 임무는 다한 듯싶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발군의 실력을 자랑하는 네 명의 고수 사이를 빠져나갈 놈이 과연 있을까? 굳이 이 앞을 지키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

큰 한숨을 뱉어낸 마세풍은 문득 다른 쪽 상황이 궁금해졌다. 과연 운선이 보름 만에 배운 솜씨로 얼마나 잘 대처하고 있을까? 다치지는 않았을지 염려도 되었다. 어느새 그는 사랑하는 제자를 찾기 위해 시체 사이를 겅중겅중 뛰기 시작했다.

“영명 6절 곡우(穀雨)!”

무려 여섯 개의 절기를 펼쳐 보았지만, 운선은 여전히 형진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위력은 모자라지 않았으나 상대의 빠른 보법을 따라가지 못하고 매번 한 치 정도 옆으로 권풍이 빗겨나갔기 때문이었다. 또한, 여러 차례 내력을 모으면서 장기전이 되는 바람에 체력적으로 한계에 도달했다.

“활인검 12초식!”

형진은 몸을 비틀어 운선의 권풍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동시에 상대방의 요혈을 향해 검을 네 번이나 찔러댔다. 그러나 벌써 반 시진이 넘게 이어진 격전으로 그 역시 집중력을 잃은 지 오래였다. 네 번 중 운선에게 치명상을 줄만 한 출수는 단 한 번도 없었다.

“헉, 허억.”

“후우.”

가을 새벽이라 꽤 쌀쌀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모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격렬하게 한 차례씩 공격을 퍼부은 후, 숨을 고르기 위해 잠깐의 소강상태가 찾아왔다. 주변이 온통 비명과 피비린내로 아수라장이었으나 두 사람은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갇힌 것처럼 오직 서로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영명 5절 청명(淸明)”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운선이었다. 다섯 번째 절기 청명(淸明)은 부드러움으로 최고의 공격력을 내는 기술로서, 배운 것 중에는 자신의 내력을 담기에 가장 알맞았다. 빠르게 기공을 열어 맑은 숨을 들이마신 뒤, 쌓아둔 화기와 받아들인 습한의 기운을 섞는 태을신공 2단계와 상생하기 때문이었다. 운선은 단전 아래에서 뜨끈한 기운이 점차 사라지며 가슴이 시원해지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그대로 오른 주먹을 내뻗었다.

“으이구, 이 답답아. 그때는 허리를 좀 더 굽히고 손목을 반 바퀴 휘돌려야 목표물에 정확히 닿을 수 있다.”

어느새 두 사람의 근처에 당도한 마세풍이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턱을 받치고 있었다. 입은 욕을 하고 있었으나 얼굴에는 가득 흐뭇한 표정이었다.

‘이런 낭패가…….’

끼어든 이가 자신의 편이 아님을 깨달은 형진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쪼르륵 흘렀다. 지금도 이리 버거운데 저 노인네까지 거들면 승산이 없었다. 사실 운선의 실력이 자신과 비등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주눅이 든 터였다. 일 년 가까이 여인을 따라다니느라 무공에 진척이 없었기에 더욱 자괴감이 들었다. 조급함이 차오르니 점점 실수가 잦아졌다.

“왼쪽으로 반 발자국 더 나가야 한다.”

하지만 마세풍은 형진의 존재가 너무나 고맙고 기특했다. 무공이라는 것이 그랬다. 아무리 스승이 훌륭해도, 제자의 자질이 뛰어나도 이론만으로는 반도 깨우치기 어려웠다. 출중한 실력의 적을 만나 싸워보는 것이 최선이었다. 하여, 지금 백형진은 운선에게 최고의 교본이었다.

“허허, 어린놈이 내공과 외공 모두 탄탄하구나!”

마세풍은 내심 형진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만큼 기본기가 튼튼하고 허점이 없는 실력이었다. 자질도 자질이지만 본인이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벌써 우리의 시대가 끝나고 있음이야.’

두 젊은이는 싸울수록 실력이 쑥쑥 늘었다. 적으로 만났지만, 여러모로 서로가 서로에게 최고의 적수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두 사람의 대결은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았다. 이미 정신력으로 진 형진의 몸놀림이 현저하게 둔해지고 있었다. 마세풍은 전세가 기울어진 것을 확인하고 수레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무리는 영특한 제자가 알아서 할 테니까.

“헉!”

상대의 왼쪽 팔을 겨냥하여 휘돌린 검이 제자리를 찾아가지 못하고 운선의 뒤쪽에 있던 나무에 박혀 버렸다. 형진은 서둘러 내력을 쏟았으나 단풍나무에 깊이 박힌 검은 나올 줄을 몰랐다.

“영명우수(雨水)”

어쩌면 마지막 일격이 될 것 같았다. 운선은 왼손 가득 신공의 내력을 모으며 형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고문하며 앙칼지게 질문하던 그의 눈빛을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한때는 진짜 사형처럼 존경하고 따르던 때도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배신감은 몇 배가 되어 돌아와 가슴 속에 처절한 상처를 남겼다.

“우리 악연은 여기서 끝냅시다.”

운선의 왼쪽 주먹이 형진의 얼굴 오른쪽 측면을 노리고 크게 돌아 들어갔다. 이대로 힘을 조절하지 않는다면 얼굴이 완전히 뭉개져 숨이 끊어질 것이었다.

“운선아!”

퍽!

마지막 순간에, 운선은 모아놓은 신공의 힘을 맥없이 풀어버렸다. 공력의 반도 실리지 않은 주먹은 정확히 상대의 안면을 향했으나 강한 타박상에 그치고 말았다. 대신 관자놀이를 정확히 타격하는 바람에 형진은 그대로 쓰러져 혼절하였다.

“운선아!”

착각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목소리. 자신의 처지 때문에 차마 찾아가지는 못하고 마음에만 담고 있던 그녀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주운…….”

주운이 한달음에 달려와 품에 쓰러지듯 안겼다. 뛸 듯이 반가웠으나 감히 손으로 끌어안지는 못했다. 그저 엉거주춤 서서 진정할 때까지 기다릴 뿐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닿은 가슴 부분이 조금씩 뜨끈해졌다. 아무래도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살아 있을 줄 알았다.”

울먹이는 주운의 목소리를 들으니 이제야 실감이 났다. 얼마나 그리웠던 사람인가? 그러나 지금은 같이 울 수도, 안아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일이 끝나면 꼭 구월산으로 찾아가겠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보내주세요.”

주운은 드디어 운선에게서 떨어져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작 반년이 지났을 뿐인데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운선아…….”

운선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그녀를 그 자리에 놓아둔 채, 자신의 무리 곁으로 뛰어갔다. 어느새 동쪽 하늘에서는 붉은 기운이 진해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위험해진다는 것은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표두들은 거의 죽거나 중상을 입어 더 이상 방해가 되지 않았다. 스무 명 남짓한 표사만으로는 태을신교의 고수들을 막을 수 없었다. 눈앞의 적을 모두 정리한 서문은 한창 분주한 수하에게 다가가 상황을 물었다.

“얼마나 옮겼느냐?”

“이제 한 대 남았습니다.”

왼쪽 팔에 깊은 자상을 입은 교도는 숨을 헐떡였다. 축 늘어져 의식이 없는 사람을 옮기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표사들의 공격까지 막으려니 모두 탈진 직전이었다. 그래도 오직 동족을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힘든 줄도 몰랐다.

“이제 곧 해가 뜬다.”

서문의 신호로 나머지 셋도 수레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사형제들이 힘을 합쳐 남은 려국인들을 실어 나르고 교주인 성곤이 뒤에서 엄호하니 속도가 곱절로 빨라졌다. 해가 완전히 뜨기 전에는 얼추 일이 갈무리될 듯싶었다.

그로부터 반 시진쯤 지난 후에, 드디어 서른 대의 마차가 네 군데의 방향으로 나누어져 이동을 시작했다. 길이 좁고 거칠어 수레가 유난히 통통거렸다. 그래도 속도가 빠르므로 이 길로 한나절만 꼬박 가면 약속한 장소까지 충분히 도착할 수 있었다.

쾅!

숲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굉음에 모두의 동작이 일시에 정지했다. 고개를 빠르게 넘어가던 좌측 첫 번째 마차가 공중에 붕 뜨더니 그 안에 탄 사람들을 모두 뱉어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서문이 재빨리 뛰어갔으나 마차를 몰던 수하를 비롯해 여덟 명이 그대로 즉사하였다.

“감히!”

우렁찬 일갈이 메아리가 되어 귓속을 파고들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누런 수염이 지저분하게 얼굴을 덮고 있어 마치 갈기로 뒤덮인 한 마리 맹수와 같았다.

“이런…….”

마세풍은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가장 정확히 상대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조양, 이 여우 같은 놈이 절대 나서면 안 되는 사람까지 꼬드겨 일을 벌인 것을 알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온몸에 퍼져 나갔다.

“부능파, 이 어리석은 놈…….”

*** 분의망신(奮義忘身):

의(義)를 떨쳐 몸을 돌보지 아니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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