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妙手(묘수)
***
죽평에서 연향으로 가는 길에는 샛길이 많으나 길이 좁아 수레를 운반하기 어려웠다. 반면 연향에서 신화정 사이에는 반드시 지나야 하는 깊은 골짜기가 있어 사방에서 둘러싸면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삼백의 인원을 구하려면 아무래도 골짜기에서 노리는 것이 맞지요.”
늦을수록 려국인들의 고통이 더할 것을 생각하니 썩 내키지 않았으나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이 최선이었다.
“두 번의 기습으로 네 대의 수레를 무너뜨릴 것입니다. 그럼 여섯 대로 움직여야 하니, 못만 제거한다면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 수레가 스스로 무너지겠지요.”
바퀴에 대한 부분은 운선의 의견이었다. 시간을 벌 방법을 고민하던 중, 이미 잠입해 있는 방인범의 정보를 통해 기발한 방법을 떠올린 것이었다.
“퇴로를 막고 고수들과의 격전을 벌이는 동안 수레를 통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 하중을 견딜만한 더 튼튼한 수레를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서문의 질문에 마세풍은 가슴을 툭툭 치며 호언장담했다.
“내가 이 지역에서 벌써 수십 년을 굴러다녔는데 그쯤 못 구하려고?”
또한 표국의 고수들을 막아서야 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예순 명의 표사들이야 그렇다 쳐도 스무 명 남짓한 표두들은 칠원성군이 직접 나서야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들이었다. 여기에 조양이 투입한 고수 몇이 더 개입한다면 승부는 알 수 없었다.
“진입로는 내가, 퇴로는 저 투덜이가 막으면 나머지는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조양이 아무리 대단한 고수를 데려와도 우리 둘은 쉽게 넘어서지 못할 것이야.”
마세풍에게 손가락질을 당한 성곤은 입술을 삐죽거리기는 했으나 딱히 불만을 표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뒷짐 지고 구경할 생각은 전연 없었다.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는다면 제자 중 누구 하나가 크게 다칠지도 몰랐다. 이 와중에 마세풍이 도와준다면 천군만마를 얻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다만 친구의 안위가 걱정되어 선뜻 고맙다고 말할 수 없었던 그는 그저 깊은 한숨만 뱉어냈다.
어느 정도 계획이 마무리되어 갈 때쯤, 운선이 무슨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괜히 분위기를 망칠까 망설이는 눈치였다.
“오라버니, 기탄없이 말해 보세요.”
눈치가 빠른 윤설이 기어코 묻고 나서야, 그는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그런데 만약 어떤 변수가 생긴다면…….”
윤설을 비롯한 모두의 얼굴이 일순 어두워졌다. 워낙에 성공이 힘든 작전이니만큼 최악의 상황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군가의 죽음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생각할 수 없겠지.”
여태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던 성곤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차마 제자들의 사기를 떨어뜨릴까 봐 자신이 먼저 말할 수 없었으나 반드시 고려해야 할 부분이었다. 가장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은 인범과 운선 중 누구 한 명이라도 정체가 들통난다면 이 모든 계획이 수포가 될 터였다.
“그래서 저는, 차선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봅니다.”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하고 시선을 바닥에 떨군 채,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초가 반쯤 타고나서야 이윽고 운선이 입을 뗐다. 그에게는 처음의 것보다 위험하고 어려운 두 번째 계책이 있었다.
“만약 우리 중에 누군가에게 일이 생기거든…….”
그를 바라보는 윤설의 눈에는 벌써 물기가 가득했다. 한 번 깜빡이면 우르르 쏟아낼 것 같았다. 운선은 안쓰러워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일이 생기면 무조건 계획을 앞당겨야 합니다.”
그는 탁자 위에 펴놓은 지도를 다시 한번 손가락으로 따라 그렸다.
“아까도 말했듯이 죽평 객잔에서 출발하자마자 들어서는 진입로에는 샛길이 무려 네 갈래입니다. 길이 비좁기는 하나 사람을 빼돌리기에 사실 이보다 더한 조건은 없지요.”
성곤은 지그시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예 포기가 아니라면 뭐라도 시도해 보는 것이 나았다.
그러나 서문은 달랐다. 운선의 말이 물론 틀리지 않았으나 워낙에 어려운 조건이다 보니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많은 인원을 옮길 방법이 없다.”
“통으로가 아니라, 나누어서 실으면요?”
어둠 속에서도 운선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오히려 좁은 길이 장점이 될 수도 있었다. 첫 번째 방법의 가장 큰 문제는 수레의 이동이었다. 통으로 수레를 옮기게 되면 이동 작업이 만만치 않았다. 또한, 무거운 수레를 더 무거운 수레 위에 실어야 하니 그 하중 때문에 속도를 높이기 어려울 게 뻔했다. 만약 추격대라도 붙으면 금세 따라잡힐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이동 수단의 크기를 줄인다면?
“작은 마차 오십 대를 구할 수 있으십니까?”
운선의 시선이 마세풍을 향하자 나머지 셋의 시선도 한곳으로 모였다.
“기한이 짧아 쉽진 않겠지만 또 못할 것이 뭐 있나?”
운선의 기가 막힌 생각에 신이 난 마세풍은 의자 위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이번에야말로 부끄럽지 않은 제자를 구했다고 생각하니 절로 어깨춤이 춰지는 것이었다.
“한 마차당 두 명의 교도들이 여섯의 려국인을 싣는다면 큰 수레를 한 번에 옮기는 것보다 기동력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허나, 여덟 대의 수레는 못을 빼는 것만으로 무너뜨릴 수 없다.”
서문이 또다시 우려를 표하자 이번에는 운선이 미간을 찌푸리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이 부분이 작전의 가장 큰 단점이었다. 각각의 수레의 하중을 늘릴만한 방법이 필요했다. 그때 운선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번뜩 스쳤다.
“마사형의 보법 중에 만근지보(萬斤之步)가 있지 않습니까? 사형의 체중보다 세 곱절 이상의 중량을 더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다리에 무게가 있는 추를 단다면 어떨까요? 수레 위로 올라가 보법을 사용하여 맨 앞쪽부터 차례로 밟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결국, 두 번째 방법도 운선의 주도 아래 마무리를 지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차선책이었다. 변수도 많고 시간도 절대적으로 많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옮기는 과정에서 려국인들이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어디까지나 만약의 경우입니다. 제발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요.”
또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원래의 계획이 변수 없이 잘 흘러가길, 그곳에 있는 다섯 사람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
모두의 시선이 여덟 번째 수레로 쏟아지자 황급히 달려온 마청옥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공물에 대한 비밀을 지키는 것까지가 황제의 하명(下命)이었다. 이미 그의 목숨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정신 차리십시오.”
그나마 좀 더 이성적인 용조가 마청옥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무너진 수레를 복구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출발한 객잔과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점이었다. 날랜 표사들을 보내 바퀴를 수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표두들이 마진건과 태을신교를 막겠습니다. 그 사이에 국주님께서는 표사들을 데리고 죽평 객잔으로 돌아가십시오.”
잔뜩 겁에 질린 마청옥은 용조의 기세에 밀려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말 등에 가까스로 기어오른 그는 선발대에 포함된 표사 일곱을 데리고 뒤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네 이놈!”
용조는 일갈하며 여전히 수레 위에서 한 마리 범처럼 우뚝 서 있는 마진건을 향해 몸을 날렸다. 마국주가 안전하도록 엄호를 해줄 심산이었다. 그는 말 등을 밟고 뛰어오르는 동시에 검집에서 연성검을 힘차게 뽑았다. 차고 올라가는 힘 때문에 반동이 생겨 검이 둥글게 휘었다. 용조가 손목을 오른쪽으로 꺾으니 검이 강하게 회전하면서 상대의 허리를 휘감아 들어갔다.
캉!
딱 한 합이었다. 검과 창이 맞부딪치는 순간 용조는 강한 반탄지공을 느끼며 검을 떨어뜨렸다. 발이 허공에 뜬 상태였으므로 그대로 튀어 나가, 올라온 높이만큼 아래로 추락하였다.
“으억!”
“용표두님!”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혼절한 용조의 주변에 표두 몇이 몰려들었다. 그들 중에는 마진건과 비등하게 싸울 실력이 되는 이가 없었기에 다들 주저하며 선뜻 나서지 못했다.
“보아라!”
용조의 상황을 뒤에서 지켜본 형진은 자신이 뛰쳐 올라가는 것보다 진건을 끌어 내리는 것이 훨씬 유리하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는 부러 마진건의 주의를 끈 다음, 수레의 틈으로 삐쳐 나온 누군가의 다리를 겨냥하여 검을 내리꽂았다. 적의 소중한 대상을 인질로 삼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었다.
“백형진!”
형진의 검을 막은 것은 마진건의 창이 아니라 짐꾼 청년의 묵직한 주먹이었다. 예상치 못한 일격에 차마 맞대응하지 못하고 일단 뒤로 물러난 형진은 그제야 주먹의 주인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운선?”
“그래, 나다!”
형진의 눈앞에 서 있는 그는 운선이었으나 또한 운선이 아니었다. 야리야리한 체격, 예쁘장한 이목구비는 그대로였으나 그저 똘똘하기만 했던 눈에는 살기가 잔뜩 올라 있었다.
“역시 살아 있었구나?”
형진은 자신의 의심이 현실이 된 것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반년 이상 주운과 이 녀석을 찾겠다고 돌아다녔지만,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쥐뿔도 가진 것이 없으면서 잠재적 능력을 지닌 천재인 양 모두에게 주목받는 운선이 몸서리치게 싫었다. 심지어 자신에게는 감정 한 톨도 나눠주지 않는 주운에게도 이 녀석은 특별했다.
“오늘 진짜로 죽여주마!”
양순한 표정을 싹 비워낸 형진의 얼굴에는 대신 질투와 분노가 가득 담겼다. 역설적이게도 그 모습이 오히려 인간적이었다.
“너희가 과연 사람이더냐?”
운선은 울부짖으며 재빨리 두 주먹을 가운데로 모아 휘돌렸다. 신공의 기운을 단전에 집중하자 주먹 사이의 공간에서 미세하게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영명권 2절 영명우수(靈名雨水)”
운선의 오른 주먹에서부터 서늘하고 습한 기운이 형진의 안면으로 쏟아졌다.
“뚫고 나가자!”
마청옥은 쓰러진 용조를 흘끗 보았을 뿐, 살필 생각은 없었다. 그대로 말을 몰아, 들어온 길목을 향했다. 저 숲길을 통과하면 객잔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수레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조맹주가 올 테니 그때까지만 버티면 될 것이었다. 일곱 명의 표사가 주위에서 몰려드는 태을신교의 복면인들을 맞서고 있는 사이, 그는 막 소나무 숲길로 접어들었다.
“어딜 그리 급히 가십니까?”
마청옥은 나뭇잎이 덜덜 떨릴 정도의 웅굉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그만 말 등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네 발로 엉금엉금 기어 상체를 겨우 일으키니 누군가의 거대한 발이 눈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그 발을 따라 고개를 조금씩 들어 위를 보았다. 기골이 장대한 백발의 노인이 검은 장포를 휘날리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누…구?”
“흥!”
퍽!
노인은 질문에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듯 크게 콧방귀를 뀌더니 손바닥을 들어 그대로 마청옥의 이마를 찍어 눌렀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차마 눈도 감지 못하고 운평표국의 국주 대도청마 마청옥은 그렇게 절명하였다. 심지어 자신을 죽인 이가 그 악명 높은 검귀 성곤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우지끈!
뚝!
아래쪽 사정은 그저 남 일이라는 듯, 마진건은 무표정한 얼굴로 창을 들어 수레의 한쪽 면을 뜯어냈다. 좁은 틈으로 보이던 악몽 같은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흐읍.”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이 나았으리라. 인경을 둘러싼 고대산파의 제자들은 모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겨우 숨만 붙어 있을 뿐, 시체처럼 널브러진 수십 명의 사람이 오물을 뒤집어쓴 채로 꽁꽁 묶여 있었다. 그중에는 그저 대충 보아도 열 살이나 됐을까 싶은 어린아이도 있었다.
여전히 올라오는 구역감을 애써 삼키며 인경은 수레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나둘 수레의 내부가 드러날 때마다 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의문만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도대체 누가 악인인가?’
“그래봤자 고수는 한 명이다. 마진건 하나 어쩌지 못하겠느냐?”
양총표두의 외침이 남은 표두들에게 새로운 의지를 심어주었다. 위쪽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마진건을 제외하면 사실 상대하기 어렵지 않은 적들이었다. 표사들이 복면인들을 처리하는 동안 표두들은 대열을 정비하는 한편, 각자 맡은 수레를 둘러싸고 다음 공격에 대비했다. 기습에 놀랐을 뿐, 수적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그들에게 훨씬 유리한 싸움이었다.
끼이익!
쿵!
그때, 마진건의 마지막 작업이 막 끝났다. 드디어 여덞 개의 수레가 모두 열렸다. 표두들은 당연히 아래로 내려올 적을 향해 각자의 병장기를 겨누었다. 아무리 창을 든 악귀 마진건도 수십 대 일의 싸움에는 당할 재간이 없을 터였다.
“으아아아아!”
그러나 또 한 번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어디선가 우렁찬 함성이 들리더니 조금씩 그들 쪽으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표두들이 놀라 사방을 살피니 무려 네 군데의 샛길에서 요란하게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그 사이로 곧 수십 개의 마차가 파도처럼 밀려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밤은 다행히 달이 밝군요.”
어떻게든 수레를 지키려 했던 수십 명의 표두와 표사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옅은 신음을 뱉어냈다. 그들의 앞쪽에서 사뿐히 걸어오는 이는 하얀 도포를 입은 중년의 서생이었다. 밤 산책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유유자적 주변을 둘러보더니, 우아한 몸짓으로 부채를 펼쳐 들었다. 부채를 앞뒤로 흔들 때마다 거기에 그려진 검은 강물이 잔잔하게 흔들렸다.
“이서문이다!”
누군가의 외침이 시작이었다. 유난히 달빛이 밝은 가을밤, 진정으로 자신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모르는 백여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담보로 뒤엉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