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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무십일홍-52화 (52/209)

#52화. 兩單手(양단수)

형진은 원래 연향까지 행렬을 몰래 뒤따라가 결정적인 순간에 혼선을 줄 계획이었다. 그러나 죽평의 기습을 목격한 후, 어쩐지 계속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마진건과 적우는 처음에는 맨 뒤쪽의 수레를 노렸던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표두 하나가 마진건과 붙어 싸우고 나서 갑자기 목표를 바꿨다.’

만약 그 표두가 적우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면 단번에 세작으로 지목했을 터였다.

‘그럼 왜?’

그는 아예 본인이 직접 관여하여 진상을 캐내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조양의 계획과는 사뭇 차이가 있었지만, 이 정도 융통성은 이해하실 거라는 판단에서 무작정 저지른 일이었다. 마침 표두들이 반발하는 순간에 능청스럽게 나타났기에 마국주의 호감을 얻은 것도 운이 좋았다.

‘분명 저들 중 간자가 있다.’

늦은 밤, 출발 준비를 서두르는 표사들과 쟁자수들을 매의 눈으로 노려보며 형진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가운데 수레를 노린 이유는 아직 알아낼 수 없었지만,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고 했음이 분명했다. 그는 확신했다. 마국주와 용조 그리고 죽은 방표두 외에 정보를 아는 사람이 더 있다.

“백대협, 이제 곧 출발하니 말에 오르십시오.”

용조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다가왔다. 사실 그를 잠깐 의심한 적도 있었으나 몇 마디 나눠보고 나니 전혀 그럴 깜냥이 아님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형진은 예의 친절한 태도로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표사와 쟁자수는 모두 몇입니까?”

“중상자를 빼고 나면 표두 열일곱, 표사 쉰넷, 그리고 쟁자수가 스물입니다.”

이 와중에 무슨 인원 파악인가 싶어 용조는 괜히 눈을 깜빡깜빡하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청옥과 달리 그는 백형진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의를 잘 갖춘 듯하였으나 어쩐지 자신을 한참 아래로 보는 느낌이 들었다.

“배치는 총표두님께서 직접 하셨는지요?”

“네, 대부분 제 임의대로 했습죠.”

“혹, 특정한 자리를 원한다거나 급작스럽게 바꾼 이가 있는지요?”

형진이 자꾸 꼬치꼬치 캐묻자 불쾌감을 느낀 용조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졌다. 조맹주의 직계 제자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싫은 티를 냈을 터였다.

“백대협, 표국에는 나름의 위계질서가 있습니다. 감히 총표두의 권한 밖에서 무슨 일을 꾸민다는 게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하니, 저를 의심하는 게 아니거든 더는 엄한 질문 마십시오.”

그제야 자신이 크게 실수했음을 눈치챈 형진은 손사래를 치며 용조를 달랬다. 그러나 이미 마음이 상한 그는 건성으로 인사만 후딱 건네고는 무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참으로 모자란 사람이다.’

형진 역시 불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주변 보기가 민망하여 바닥에 시선을 두고 있을 때였다. 불현듯 쟁자수 한 명의 발이 눈에 들어왔다.

“어?”

분명 저 보법은 두타공파의 내전 무공인 운지행이었다. 운지행은 몸을 가볍게 움직여 먼 거리를 빠르게 이동하는 방법이면서 또한, 몸의 하중을 최대한 줄이는 방법이기도 했다. 어설픈 실력자라면 절대로 따라 하지 못할 보법이었다.

“이보시오!”

형진이 수차례 상대를 부르며 쫓았으나 어쩐 일인지 거리는 좁혀지지 않고 그는 점점 무리 속으로 몸을 감추려 했다. 이쯤 되면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저자가 바로 지금껏 숨어 있었던 간자임이 분명했다.

형진은 자신도 운지행의 보법을 사용하여 뒤쫓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상대의 등에는 무거운 짐이 있었기에 두 사람의 거리는 곧 지척이 되었다. 드디어 정체를 확인할 수 있겠다 싶었을 때, 형진은 옷깃을 낚아채기 위해 손을 쭉 뻗었다.

“아니, 백대협께서 어인 일이십니까?”

뻗은 손이 무색하게 그의 정면으로 웬 소년 하나가 끼어들었다. 고대산파의 장문 고인경이었다. 형진은 차마 일파의 장문을 무시할 수 없어 엉거주춤한 자세로 공수부터 했다.

“아, 고문주 오랜만입니다.”

그의 눈은 인경의 뒤쪽을 훑고 있었으나 이미 수상한 짐꾼은 모습을 감춘 뒤였다.

“조맹주님께서는 일이 있어 함께 하지 못한다 들었습니다. 대신 제 일 제자를 보내셨군요.”

평소에는 자신에게 인사나 겨우 하던 고인경이 웬일로 이리 수다스러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성질 같아서는 획 밀쳐내고 싶었으나 주변 눈치가 보여 그저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출발합니다!”

용조의 외침을 시작으로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형진은 결국 확인을 포기하고 마청옥의 옆으로 돌아왔다. 마음이 계속 떠름했으나 당장은 시간이 촉박하여 추적해 볼 도리가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식은땀을 닦아내는 운선의 옆으로 인경이 다가왔다. 최대한 천천히 말의 속도를 늦춰 자연스럽게 운선을 찾아낸 것이었다. 오다 보니 어느덧 맨 마지막 수레 근처였다.

“네.”

겉으로 보기에 운선의 얼굴은 세상 무표정했으나 속으로는 퍽 당황스러웠다. 그는 인경에게 고마움과 불쾌감이라는 양가의 감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물론 아까의 상황은 다시 생각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형진이 온 것을 보고 최대한 거리를 벌리려 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운지행을 쓴 것인데 그게 의심의 불씨를 지핀 것 같았다. 만약 인경이 아니었다면 정체가 밝혀진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의 계획이 모두 어그러질 뻔하였다.

“왜 도와주었습니까?”

고맙다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아 도리어 불편한 기색을 잔뜩 드러내었다. 우선은 상대가 무슨 의도로 자신을 도와주었는지 알아야 다음을 대비할 수 있으리라.

“당신이 객잔의 그분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저 은혜를 갚았을 뿐입니다.”

인경은 한껏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선발대에서 한참 떨어져 있어 들킬 리는 없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다만 그의 마음속에는 조금씩 불편한 의심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정체가 무엇입니까? 혹, 당신도 태을신교입니까?”

“…….”

운선의 침묵은 긍정과 같았다. 인경은 쥐고 있던 말고삐를 힘줄이 드러나도록 꽉 잡았다. 은인이기도 하지만 또한 원수이기도 한 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라고 하면 믿을 겁니까?”

그제야 운선은 고개를 들어 인경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었다. 인경이 조금이라도 수상한 행동을 보이면 죽일 생각까지도 하고 있었다. 고작 작은 인연 때문에 려국인 삼 백의 목숨을 놓을 수는 없었다.

“무엇이 목적입니까? 당신들은 도대체…….”

“그러는 당신은 무엇이 목적입니까?”

자신의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운선의 질문에 인경은 말문이 턱 막혔다. 온갖 감정이 섞여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오자 입술만 달싹거릴 뿐, 음절이 되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마음을 아는지 운선은 대답을 바라지도 않고 그저 깊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밝힐 겁니까? 그도 아니면 막을 겁니까?”

이어진 운선의 차분한 목소리에는 일말의 다정함도 없었다. 일전에 만났던 그 어리숙한 객잔 주인과 과연 같은 사람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매정한 모습이었다.

“막겠다면요?”

겨우 터진 입에서는 약간의 쇳소리가 섞여 나왔다. 수많은 말을 골라내어 겨우 한 마디 뱉는다는 것이 목구멍을 잔뜩 긁고 터져 나온 탓이었다.

“은원을 따지자면 제가 먼저입니다. 하여 방해가 된다면 아무리 당신이라 해도 주저 없이 벨 것입니다.”

인경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앞을 향하여 가고 있을 뿐, 딱히 무엇을 해야겠다는 의지도 없었다. 그리고,

“태을신교다!”

“으아악!”

끔찍한 비명은 앞쪽에서부터 들려왔다. 마진건이 몰고 온 스무 명 남짓한 태을신교의 교도들은 이번에는 정면으로 들이닥쳤다. 선발대가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는 사이로 마진건의 검은 인영이 번쩍거렸다. 그의 창날은 거침이 없었다. 상대가 누구든 명줄을 끓을 기세로 무작정 뚫고 들어오는 양에, 마청옥을 비롯한 대부분의 표두들은 공포심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도적놈들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용조가 자신의 국주를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앞을 막아서자 마청옥도 어쩔 수 없어 말에 단단히 묶어두었던 대도(大刀)를 꺼내 들었다. 뻑뻑하게 잘 나오지 않는 것을 보니 오랫동안 칼집 안에 있어 다소 녹이 슨 듯했다.

“뒤로 피하십시오.”

그와 같은 찰나에 앞으로 뛰쳐나간 이는 백형진이었다. 일전에 마진건을 직접 본 일은 있었으나 겨루어 본 적은 없었다. 그동안 무공의 진전을 꽤 본 그로서는 마땅히 대결하고픈 상대였기에 오히려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었다.

캉!

용조가 한 합 만에 뒤로 수 장 밀려 떨어지자, 형진이 바로 이어 진건의 창을 상대했다. 그는 활인검법의 기본을 변형한 열두 가지의 초식을 혼합하여 상대의 주요 혈맥을 찔러 들어갔다. 창은 아무래도 반경이 크기 때문에 근접전으로 몰고 가야 승산이 있었다. 운지행의 보법을 사용하여 미끄러지듯 빈 곳을 확보한 그는 단중혈을 노리고 검을 핑그르르 돌렸다.

퍽!

그러나 다음 순간, 형진은 자신의 아랫배에 뜨끈한 무엇이 쑥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진건의 장풍이었다. 창을 부채처럼 돌려 적의 검이 찌르고 들어오는 주요 경로를 차단한 다음 왼손으로 태일장을 출수했다. 그는 비록 태을신공을 익히지 못했으나 또 다른 내전 무공으로 태일장을 완공할 수 있었다. 다만 손을 분산하여 썼기 때문에 평소 힘의 3할밖에 되지 않았다.

“윽!”

형진은 울컥 올라온 피를 뱉어낸 후에 다시 기본자세를 취했다. 이번에는 검에 시묵공의 내력을 쏟아부을 참이었다. 활인검은 내공인 시묵공과 결합했을 때야말로 본래의 위력을 다 펼쳐낼 수 있었다.

“시묵 15절!”

형진은 몸을 뒤로 꺾음과 동시에 들고 있던 검을 머리 위쪽으로 한 바퀴 빙 돌려 원을 그렸다. 내력을 실은 검은, 푸른 검광을 뽐내며 작은 돌풍을 만들어 냈다. 마진건은 그저 방어에 집중하고 있었으나 내심 젊은 청년의 실력에 감탄하는 중이었다.

퍽!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마진건의 창이 아직 내력을 완전하게 모으지 못한 형진의 검기 사이를 빠르게 뚫고 지나갔다. 초식이 없는 그의 창술은 오직 상대의 사혈만을 노리기에 살기가 가득했다. 순서도 본새도 없었다. 투박하고 묵직한 찌르기가 곧바로 상대의 가슴팍을 노렸다.

깜짝 놀란 형진은 뒤로 크게 세 걸음을 물러나면서 검을 돌렸다. 활인양생(活人養生)의 방어 자세로 창을 쳐내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귀신처럼 빈틈 사이로 들어온 창은 그대로 형진의 앞 저고리 일부를 댕강 잘라냈다.

“백대협!”

용조가 지극히 놀라 헐레벌떡 뛰어왔으나 마진건은 이미 그들 앞에 없었다. 뭐에 홀린 사람처럼 몸을 날려 수레 위로 올라가더니 뒤로 냅다 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또다!’

형진은 불길한 예감에 다짜고짜 그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중간 수레를 노린다면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음이 확실했다.

쾅!

쾅!

쾅!

쾅!

그러나 그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목표는 가운데가 아니었다. 마진건이 밟고 지나가는 수레마다 바퀴가 하중을 버티지 못하고 부서지더니 하나둘 요란스러운 굉음을 내며 바닥에 주저앉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중 마지막으로 무너진 여덟 번째 수레는, 떨어지는 순간 유독 우지끈 소리를 내더니 한쪽 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어?”

“이게 뭐……?”

파편을 피하려고 수레에서 수 장을 물러선 사람들의 눈동자가 또 다른 충격으로 점점 커졌다. 두려움? 허탈함?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마주한 것에 대한 놀라움? 아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일종의 혐오감이었다.

“흐억!”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자신의 코를 틀어막았다. 부서진 수레 사이로 지독한 악취와 함께 음지에 서식하는 강구(바퀴벌레) 수백 마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예상하지 못한 쪽은 마진건도 마찬가지였다. 늘 표정이 없는 그의 눈에서 순간 붉은 불꽃이 튀었다.

“도대체 저게…….”

벌레들을 피해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경은 그저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부서진 수레 사이로 수많은 팔과 다리가 보였다. 그것은 분명 사람이었으나 또한 짐승과도 같았다. 온갖 오물에 섞여 뒤엉킨 수십 명의 여인과 아이들이 손발이 묶인 채로 맥없이 뻗어 있었다.

“우웩!”

그들의 숨이 아직 붙어 있음을 인지한 순간, 인경은 참을 수 없는 구역감에 결국 저녁에 먹은 것을 전부 게워내었다. 자신이 이 끔찍하고 참담한 일의 책임자인 것을 깨닫자 그저 역겹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것이 제 목적입니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운선은 구역질로 들썩이는 인경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주머니에는 수십 개의 구리 못이 잘그랑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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