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51화 (51/209)

#51화. 水流雲空(수류운공)

태을신교의 무리가 빠져나가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피해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방표두를 포함한 사상자가 서른 명에 가까웠으며 두 개의 수레는 그대로 주저앉아 아예 재건 불가 상태였다.

“죽평 객잔까지도 고개 하나가 남았는데 큰일이구나.”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살아온 마청옥이었으나 지금처럼 난감한 상황은 흔치 않았다. 태을신교의 무서움을 직접 경험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진건이 들소처럼 달려오던 모습은 강호에서 잔뼈가 굵은 그에게도 악몽 같았다.

“우선 두 대의 수레는 포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양이 얼마 되지 않으니 포로들이 실린 수레로 일부 옮긴다면 어찌어찌 가능할 것 같습니다.”

용조의 의견이 최선이었다. 다행히 바퀴가 튼튼하여 사십여 명의 인원을 한 수레에 실어도 끄떡없으니, 남은 거리를 버티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방표두의 시신은 어찌했느냐?”

“너무 처참하여 그냥 둘 수 없었습니다. 얕게나마 잘 묻어 주었습니다.”

워낙에 아끼던 수하였기에 마청옥은 콧날이 시큰해졌다.

“그런데 말입니다.”

용조는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주저했다. 적우의 칼에 목숨을 잃기는 했지만, 마지막에 보였던 두 사람의 잔상이 계속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아닐 것이다.”

마청옥은 용조의 심중을 읽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약 방인범이 간자(間者)였다면 그 절호의 기회에 가운데 수레를 노리지는 않았을 터였다.

“수레에 무엇이 실려 있는지 아는 이는 우리 셋밖에 없다. 그러니 태을신교 놈들이 허탕을 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

그저 심증만 가지고 말하기에는 마청옥의 말이 일리가 있었기에 용조는 입을 꾹 다물었다. 뭔가 찝찝한 구석이 있었으나 일단은 마음에 묻어두기로 하였다.

‘방인범이 아니더라도 무리 안에 세작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좀 더 면밀히 살펴야겠다.’

용조의 지휘 아래 쟁자수들은 무너진 수레에 실려 있던 공물들을 나눠 들었다. 기존의 짐도 무거운데 그 위에 더해지니 죽을 맛이었다. 그러나 십수 명의 표사들이 죽거나 다친 것에 비해 쟁자수 중 누구도 크게 다치지 않았으므로,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고문주님, 괜찮으십니까?”

새벽 출발을 위해 인원을 점검하던 용조는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하늘만 보는 고인경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어린 나이에 처음 겪는 일이라 충격인 큰듯하여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

“얼른 정신을 차려야 할 겁니다. 죽평 객잔에 도착하여 반나절만 쉬고 다시 연향까지 이틀을 꼬박 가야 하니까요. 마음은 알겠으나 이 일에 책임자라는 사실은 잊지 마십시오.”

용조는 얼이 빠져 대꾸도 못 하는 인경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러나 언제까지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곧 표두들을 모아 상황을 점검하고 다시 떠날 채비를 하였다. 한 식경 뒤에 출발하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나 때문이다. 내가 적우에게 함부로 까불어서 엄한 목숨이 죽었어.’

그나마 다행이라면 고대산파의 제자들은 경상에 그쳤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방인범의 도움 덕분이라는 사실을 인경은 너무나 잘 알았다. 그의 경고가 아니었다면 무너지는 수레에서 사형제들을 지키지 못했을 것이었다.

“이제 곧 출발합니다.”

인경의 뿌연 시야에 짐을 가득 짊어진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는 쭉 선발대에서 표사들의 식량과 짐을 나르던 그 청년이었다.

“알겠습니다.”

인경은 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에 주섬주섬 자신의 주변을 정리했다. 어찌 됐든 맡은 일은 끝을 내야 했다. 이 가슴이 찢기는 듯한 자괴감도 오롯이 자신의 몫이었다.

“…….”

문득 인경은 불편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전언을 끝낸 후에도, 청년은 가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계속 내려다보고 있었다. 먹구름이 새벽 달빛을 가렸기 때문인지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았다.

“그러니 앞으로 경거망동하지 마십시오.”

청년은 싸늘한 목소리만 남긴 채 무리 속으로 사라졌다. 인경은 상대와 눈이 마주친 잠깐의 시간 동안 숨이 막히도록 답답했다. 딱히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그에게서 어떤 분노 같은 것도 느껴졌다.

‘범상치 않은 이다.’

인경의 눈이 사내의 뒷모습을 쫓았다. 자기 몸집보다 커다란 짐을 들고도 사뿐사뿐 걸어가는 검은 인영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듯도 하였다.

‘아! 객잔의 그 사내다.’

그때는 인피면구를 썼었기에 얼굴까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강한 확신이 들었다. 저 걸음걸이, 말투, 그리고 왠지 모르게 풍기는 독특한 분위기. 방금까지만 해도 자신의 은인이었으나 이제는 그의 정체를 영 알 수 없게 되었다.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다.’

말에 오르는 인경의 머릿속에는 이제 한 가지 생각만으로 가득 찼다. 이 임무가 끝나기 전까지 반드시 그의 정체를 밝히고 말겠다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연향으로 출발하기까지는 하루가 꼬박 걸렸다. 수레는 오직 마청옥과 용조만이 관리했기 때문에 표두와 표사들은 좀 더 오래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죽은 이가 여섯, 중상자가 열둘, 스무 명에 가까운 인원을 제하고 나니 어쩐지 행렬의 규모가 크게 줄어든 것 같았다.

“연향으로 가는 길에는 샛길이 많다. 하여, 매복이 있을 수 있으니 극도로 조심하여야 한다.”

총표두들을 불러 놓고 용조가 일장 연설을 하자, 다들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방표두를 비롯하여 총 세 명의 표두가 그들이 보는 앞에서 비명횡사하였다. 오늘이 자신들의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영 기운이 나지 않았다.

“우리가 언제는 목숨 걸고 일하지 않았나? 혹여 일이 나거든 가족들의 안위는 표국에서 책임질 테니, 끝까지 잘 부탁하네.”

위로 아닌 위로를 던지는 용조도 기실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방인범을 세로로 갈라버린 적우의 악귀 같은 모습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평생 검에서는 꿇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건만, 얼마나 큰 착각인지 일시에 깨달은 순간이었다.

“다른 지원은 없습니까? 과연 우리 정도의 실력으로 태을신교를 어찌 막겠습니까?”

“고대산파 어린애들에게 맡겨두고 오대산검은 어디 있는 겁니까?”

참다못한 장표두가 용기를 내어 말하자, 너도나도 기다렸다는 듯, 한 마디씩 덧붙이기 시작했다. 이 대단한 임무에 어째서 오대산검의 고수들은 나서지 않는 것인가? 하물며 운평표국의 오랜 동맹이라는 황석파는 그 누구 하나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흐음, 태을신교의 기습은 불가항력이었네. 또한, 이 일은 어디까지나 황실이 우리 표국에 맡긴 일이 아닌가? 하여 우리끼리 최선을 다해 완수하는 것이…….”

용조의 어설픈 변명이 끝나기도 전에 표두들의 불평이 터져 나왔다. 황실이고 뭐고, 일단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 중에 목숨이 아깝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가 같이 갈 것입니다.”

웃음기를 머금은 듯한 맑은 목소리가 객잔 안을 가득 채웠다. 마청옥이 안내하여 데리고 온 사내는 하얀 장포를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약관의 서생이었다. 얼굴이 유달리 뽀얀 모습이, 귀한 집 자제 같았다.

“저는 두타공파의 제자 백형진입니다. 스승님의 부름을 받고 오늘 새벽 죽평에 도착해 여러분을 기다렸습니다. 또한, 다음 거점에서 황석파의 고수도 합류한다고 합니다. 절대로 어제와 같은 참상은 겪지 않을 겁니다.”

형진의 소개를 듣는 표두들의 얼굴에 드디어 희망의 빛이 스쳤다. 두타공파가 어디인가? 오대산검 중 실력으로는 제일, 강호 최고의 고수라는 무림 맹주 현로선생 조양의 문파가 아닌가? 또한 황석파도 합류한다니 이보다 더 든든할 수 없었다.

고작 한 사람의 합류로 인해 표두들의 반발이 진정되자 마청옥은 괜히 머쓱해졌다. 그 역시 태을신교의 다음 기습이 두려운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경국 최고의 표국 국주로서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마국주님, 맹주님께서 직접 나서서 도와드리지 못함을 못내 미안해하셨습니다. 부디 너그럽게 양해해 주십시오.”

형진은 그런 국주의 불편한 마음을 안다는 듯, 세상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사과의 말을 전했다. 정작 그렇게 나오니 투덜댈 수도 없었다. 마청옥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다음 일정을 간단하게 알려 주었다. 인경과의 나이 차이는 불과 대여섯 살이었으나 형진은 애초에 고대산파의 애송이들과는 존재감부터가 달랐다.

“그들이 왜 굳이 가운데 수레를 공격했을까요?”

형진의 물음에 마청옥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보통 심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가운데 둔다. 원래의 방식이었다면 그들의 생각이 옳았겠지요. 만약 조맹주께서 가운데를 비워두자는 계책을 내지 않았다면 크게 당했을 것입니다.”

형진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 중에 분명 세작이 있다고 들었다. 그가 어떤 수레에 무엇이 들었는지 명확히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분명 조양이 이 일에 개입했다는 사실은 알았을 터였다.

‘나라면 적어도 가운데 두 개만 건드리지는 않았다.’

형진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태을신교의 임시 거처는 죽평과 연향 사이의 작은 폐가였다. 숲 한가운데 은신하고 있어 눈에 띄지는 않았으나 혹시 몰라 교도들은 흩어 배치하고 네 사람만이 은밀히 모였다.

“적우는 괜찮으냐?”

서문의 물음에 현진이 대답 대신 탁자 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한때 적우의 상징과도 같았던 보도(寶刀) 행덕이 두 동강이 되어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두 손을 다쳐가며 칼을 잘라낸 그는 그대로 방 한편으로 들어가더니 한나절 내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필요할 테지.”

묵묵히 자신의 창 미타(彌陀)를 닦고 있던 마진건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감정을 잘 숨기는 그에게도 방인범의 죽음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하물며 적우에게는 단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었으니 그 아픔을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운선은 괜찮을까요?”

현진의 눈에는 또 다른 걱정이 잔뜩 담겼다. 이제 그가 적진을 벗어나는 일이 한층 더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여차하면 운선을 미리 빼돌려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서문이 허락한다면 주저 없이 움직일 작정이었다.

“그 또한 그 아이의 숙명이겠지.”

어쩐지 알고 있었으나 막상 서문의 매정한 대답을 들으니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현진은 결국 쌓아두었던 그간의 감정이 울컥 터져 나오고 말았다.

“대사형,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것입니까? 내 목숨은 그렇다고 칩시다. 가족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지켜야 하는 대의가 무엇이냔 말입니다.”

이번에도 대답은 알고 있었다. 다만 누군가에게라도 울분을 터뜨리지 않으면 온몸의 구멍에서 물이란 물은 다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현진은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서문의 슬픈 눈을 피해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차피 다시 돌아올 테지만 잠시라도 이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너는 괜찮으냐?”

이윽고 서문이 진건을 돌아보며 물었다.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둘은 언제부턴가 질문하지 않게 되었다. 서로를 존중했기에 암묵적으로 만들어진 약속이었다. 금기를 깨고 물어보는 사형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진건은 이번만큼은 그의 어리광을 눈감아 주기로 하였다.

“흔들리지 마십시오. 그저 책임만 생각하십시오.”

진건의 대답에 서문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보다 더한 위로가 있을까? 적어도 사형제들이 함께 하는 한, 앞만 보고 나아가야 했다. 그것이 대사형으로서 보여 줄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서문은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나 적우가 틀어박혀 있는 방문 앞으로 걸어갔다. 문틈에 귀를 대어 보았으나 마치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적우야…….”

다정함을 가득 담아 부르는 서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물기가 있었다. 분명 듣고 있을 테니 몇 마디 위로라도 해볼 요량이었다. 적어도 자책은 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학유우(鶴流寓)라는 초식의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

“…….”

기억도 가물가물한 어느 날이었다. 청년 시절의 서문은 누가 봐도 죽겠다는 의지가 가득한 초식을 만들어 낸 사숙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아 그 뜻을 물었더랬다. 인범은 세상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유우(流寓)는 방탕하고 자유롭게 산다는 뜻이다. 이제 나는 대의(大意)가 무엇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저 내 앞에 놓인 책임을 다할 뿐이지. 그래서 언젠가 모든 것을 놓는 순간이 오면 학처럼 자유롭게 떠나고 싶구나.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나의 진정한 대의(大意)일지도 모르겠다.”

서문은 그날의 일을 그대로 전하며 덧붙였다.

“네가 방사숙의 꿈을 이뤄드린 것이다.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말아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적우의 처절한 울음이 시작되었다. 이 세상이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얼마 동안을 서럽게 또 서럽게 울부짖었다.

*** 수류운공(水流雲空):

흐르는 물과 하늘의 뜬구름이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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