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泣斬馬謖(읍참마속)
현장에 도착한 고인경은 정면에 보이는 적우를 향해 무작정 돌진했다. 지든 이기든 상관없었다. 사문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한목숨 내놓아도 후회는 없었다.
‘기필코 네놈의 목을!’
그러나 수 장 안으로 상대에게 접근했을 때, 가면을 쓴 교도 서너 명에게 둘러싸여 필사의 격전을 치르고 있는 영준이 먼저 보였다. 실전 경험이 부족한 그는 더 나은 실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 방법을 몰라 고전하고 있었다.
“영준아!”
인경은 호흡 한 번에 말 등에서 뛰어 내려와 검을 빼 들었다. 하현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오자 특유의 맑은소리를 냈다. 고작 한 초식 만에 자신에게 달려드는 두 명의 적을 제압할 수 있었다.
“괜찮으냐?”
“네.”
문주가 도우러 오자 한껏 힘이 난 영준은 자신의 주변에 모여든 적들을 드디어 떨쳐냈다. 영준을 포함하여 고대산파의 제자들 넷이 싸움에 휘말렸기에 인경은 우선 사형제들과 합류하여 일을 도모하기로 하였다.
“문주님!”
고대산파의 제자들은 인경이 나타나자 그제야 싸울 용기가 났다. 태을신교의 기습이 소문인 줄 알았는데 막상 일이 벌어지자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인경을 위시한 그들은 행렬의 한가운데 수레를 둘러싸고 힘겨운 싸움을 지속하고 있었다.
뒤늦게 도착한 방인범은 우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대충 눈으로 가늠해보아도 표두와 표사들까지 합쳐 아군의 수가 월등히 많았다. 그런데도 고작 스무 명인 적의 기세가 좀처럼 꺾이지 않는 이유는 적우와 마진건의 압도적인 실력 때문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작전을 수행하느라 힘을 조절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내 도(刀)에 걸리는 놈은 한 놈도 살려두지 않겠다!”
적우는 연신 우렁차게 소리를 지르며 행덕을 휘둘렀다. 자기 딴에는 혼신의 연기를 하는 중이겠지만 모두가 우려했던 대로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저 둔한 놈이 일을 그르치겠구나.’
인범은 쯧쯧거리며 싸움의 복판으로 말을 몰았다. 더 멍청한 짓을 하기 전에 다음 작전으로 넘어가야 할 듯싶었다. 그는 재빨리 말에서 내려오더니, 창 하나로 표사 열 명과 맞붙은 마진건 쪽으로 향했다.
“감히 마교 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나타나느냐?”
인범은 벼락같이 호통을 치며 자신의 절기 선학도(仙鶴刀)를 뽑아 들었다. 그의 출중한 실력을 아는 표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한 걸음 물러나 길을 열어주었다. 덕분에 인범은 마진건과 지척의 거리에서 대결을 펼칠 수 있었다.
“가운데 두 대!”
가볍게 몇 초식을 주고받던 두 사람이 한차례 강렬하게 병장기를 맞부딪쳤을 때, 인범은 상대의 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마진건은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 창 가운데로 인범의 도를 받아 휘감더니 반대편 손으로 장력을 출수했다.
“어어억!”
초식을 받아줄 요량으로 은근슬쩍 힘을 뺐기 때문에 인범은 어색하지 않은 자세로 수십 걸음을 뒤로 밀려났다. 그와 동시에 진건은 뒤이어 달려드는 표사 몇을 날려 버린 다음 수레의 앞쪽으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수레를 지켜라! 놈이 앞으로 간다!”
표두들의 외침에 뒤쪽에 몰려있던 표사들이 일시에 앞으로 움직였다. 적우와 대결이 한창이던 표두 두 사람 역시 급한 불을 먼저 끄기 위해 진건을 쫓아갔다. 순식간에 적우 앞이 텅 비어버렸다.
“자 덤벼라!”
적우는 겁을 먹고 우물쭈물하는 표사들을 죽이는 게 내키지 않아서 그저 행덕을 흔들어 거리만 벌리고 있었다. 소란만 피우면 그뿐, 자신의 역할이 웬만큼 끝났으므로 기회를 봐서 후퇴할 작정이었다.
반면 내내 적우 쪽을 살피던 인경은 드디어 자신에게 기회가 왔음을 알았다. 이번이 아니면 신출귀몰한 태을신교의 적들을 언제 만날지 알 수 없었다.
“우선 너네는 수레를 둘러싸고 공물을 지켜라. 나는 적우를 상대하겠다.”
“하지만!”
영준은 인경의 의도가 무엇인지 눈치채고 급하게 그의 소매를 잡았다. 사문의 형제들이 도륙당하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했기에 복수하고픈 마음이야 그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적우와 붙는 것은 세상 무모한 짓이었다.
“만약 내가 무슨 일을 당하거든 다음을 부탁하마.”
인경의 형형한 눈동자에는 필사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의 눈을 마주하고서야 영준은 잡았던 손을 스르르 풀었다. 어떤 말도 그를 막을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문주님…….”
인경은 보법을 사용하여 적우의 앞까지 순식간에 뛰쳐나갔다. 무의미하게 행덕을 돌리며 방어만 하던 적우는 강한 살기를 느끼고는 본능적으로 크게 세 발자국을 물러났다. 눈앞에 있던 표사들은 도망칠 궁리를 하기 바빴는데 누가 이처럼 죽일 듯이 달려드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내 칼을 받아라!”
카랑카랑한 청년의 목소리와 함께 묵직한 푸른 검광이 적우의 눈앞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검이 도에 맞닿는 순간의 강한 진동 때문에 상체가 뒤로 젖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으나 빠르고 정직한 일격이었다.
“어? 너는?”
내쉬는 숨이 닿을 만한 거리까지 적의 얼굴이 훅 들어왔다. 그제야 그는 상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 난 청년, 되지도 않는 실력으로 복수를 하겠다 덤비던 고인경을, 적우는 단번에 기억해냈다. 아무리 일 년이 넘게 지났다지만 어떻게 그 당돌한 얼굴을 잊을 수 있겠는가?
“오늘을 기다렸다.”
인경은 그동안 수없이 연구한 상월검법의 초식을 하나씩 펼쳐냈다. 이미 상대에게 같은 검법으로 진 적이 있으나 반년 전과는 위력이 확연히 달랐다. 손이 터져 물집이 잡히기를 수백 번이었다. 오직 복수를 위해 견디고 또 견딘 시간이었다.
“이 똥멍청이야! 네가 왜 여기에 끼어드느냐?”
반면 적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상대의 초식을 겨우 받아내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이 간자미 같은 녀석을 쓰러뜨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허나, 그는 한 번 마음에 들었던 상대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편이었다. 도저히 다치게 할 수 없어 최대한 몸을 빼내려 했다. 그러나 인경이 워낙에 필사적이니 쉽사리 떨쳐내지도 못했다.
“상현백우(上弦白雨)”
인경이 필살기를 펼치자 적우도 드디어 방어 자세를 풀었다. 아무리 상대가 초심자라지만 그 대단한 매월검법을 언제까지고 방어 자세로만 겨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만큼 정교하고 변화가 많은 초식이었다.
“늘긴 했지만, 아직 아니다.”
적우는 한숨을 푹 쉬더니 몸을 오른쪽으로 크게 비틀어 주저앉는 자세를 취했다. 상대가 놀라 몸이 기우뚱하자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의 왼쪽 허리를 칼등으로 툭 쳤다. 중심을 잃은 인경은 그대로 발목이 꺾여 왼쪽 팔을 바닥에 대면서 크게 넘어졌다.
“윽!”
금세 딛고 일어나려 했지만, 왼쪽 발을 디디는 순간 몸이 무너져 내렸다. 발목이 접질리면서 심하게 삔 것 같았다. 인경은 고작 십여 합도 견디지 못한 자신의 형편없는 실력에 강한 수치심을 느꼈다. 장문의 책임만 아니라면 이 자리에서 콱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저기, 이봐?”
적우는 상대가 너무 좌절하자 뭔가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에 잠시 고민에 빠졌다. 자질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대로 십 년을 더 노력해봤자 자신의 상대가 절대 될 수 없었다. 평생을 복수 때문에 인생을 허비하느니 이참에 죽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비키십시오.”
그때 두 사람의 사이로 강한 바람이 몰아쳤다. 인경은 두 팔을 들어 자신의 안면을 막았으나 밀려오는 도풍에 앞머리가 한 움큼 잘려져 나갔다. 어느새 끼어든 인범은 자신의 선학도를 크게 휘둘러 인경의 가슴 앞쪽까지 들어온 적우의 행덕을 떨쳐냈다. 그 기세가 어찌나 드센지 힘에서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적우의 손이 진동으로 저릿저릿했다.
“방표두님?”
“이제 제가 맡겠습니다. 사형제들을 지키십시오.”
인범이 앞을 가로막아 버리자 적우를 향하는 진입로가 완전히 막혀 버렸다. 인경이 어리둥절하여 머뭇거리고 있자 한층 더 큰 소리가 귀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정신 차리라고!”
쾅!
인범의 고함과 함께 요란스러운 굉음이 숲속을 메아리쳤다. 무려 두 번, 마진건이 바퀴를 향해 휘두른 창은 세 번째, 네 번째 수레를 그 자리에 주저앉혔다.
“고문주! 어서 사형제들에게 가시오!”
“아뿔싸!”
그제야 인경은 정신이 돌아왔다. 가운데 수레를 지키고 있던 것은 자신의 사형제들이었다. 복수에 눈이 멀어 애먼 짓을 하고 있을 때, 사형제들의 목숨은 경각에 놓인 것이었다. 인경은 미친 듯이 앞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다친 발목이 시큰거렸으나 당장은 아무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뭐 하는 거냐?”
주변을 둘러싼 표사들과 거리를 벌리며 인범은 적우를 최대한 가장자리로 내몰았다. 한 번 더 선학도를 휘두르니 이번에는 무리의 시선으로부터 차단된 모퉁이까지 그를 밀어낼 수 있었다. 이쯤 하면 됐겠지 싶자, 인범은 곧바로 적우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 멍청아, 고대산파 장문은 반드시 살려야 한다고 그리 말하지 않았더냐?”
인범이 앙칼진 목소리로 적우를 혼내자 그는 억울하여 발을 동동 굴렀다.
“내 양심을 걸고, 그 녀석 손가락 하나 안 건드렸습니다.”
“흥!”
하여튼 옛날부터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었다. 버럭 화를 내고 있지만, 적우를 바라보는 인범의 눈에는 애정과 걱정이 한꺼번에 담겨 있었다.
“방금 죽이려고 하지 않았느냐?”
“아니, 그것은…….”
적우는 당황하여 울상이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숙부건만 제대로 인사를 나누기는커녕 보자마자 혼쭐이 나니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건이 가운데 수레를 부쉈으니 임무는 끝났어. 이 길로 바로 돌아가!”
“하지만 숙부님…….”
반가운 마음에 옷깃을 쥐고 놓지 않는 적우가 안쓰러워 몇 마디 잔소리를 덧붙이고 있을 때였다.
“자네, 뭐 하고 있는 건가?”
익숙한 목소리였다. 인범이 무심코 뒤를 돌아보니 용조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의심이 가득했다. 용조의 머릿속에 불현듯, 이틀 전 밤에 마청옥이 한 말이 떠올랐다.
“우리 중에 세작이 있어. 자네들은 내가 유일하게 믿는 표두들이니 누구에게도 이 비밀을 발설하면 안 되네.”
후퇴를 알리는 마진건의 호각소리가 숲속을 한 바퀴 돌아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그것이 신호가 되었는지 뒤쪽으로 하나둘 표사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용조는 작심한 듯 연성검을 꺼내 들고 공격 태세를 갖췄다. 그에게 방인범은 이미 오랜 동료가 아닌 태을신교의 세작이었다.
이제 방법은 두 가지였다. 적우와 함께 이들을 치고 나가 태을신교에 합류한다. 그렇다면 이제까지의 작전은 모두 수포가 된다. 또한, 운선까지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수레의 하중을 알려준 일도, 바퀴를 부숴 수레를 주저앉힌 것도, 무엇보다 뻔히 려국인이 타고 있는 수레의 위치를 알면서도 부러 가운데를 공격한 이유도 다 밝혀지게 되는 것이다.
‘남은 방법은 하나…….’
인범은 천천히 적우를 돌아보았다. 앞에 선 이들을 모두 죽이겠다는 살기등등한 표정이었다. 그는 체념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몰려오는 모든 적을 두 사람이 해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적우야, 잘 보아라.”
“네?”
불시에 휘두른 선학도는 그대로 적우의 왼팔에 깊숙한 자상을 남겼다.
“아!”
적우는 본능적으로 행덕을 들어 가까스로 선학도를 쳐냈다. 그러나 그 일격은 허수였다. 인범은 행덕에 밀린 힘을 이용해 뒤로 한 바퀴를 빙그르르 돌더니 다시 적우의 다리로 파고들어 왔다. 어린 적우와 대련하면서 매번 반복하던 그 초식이었다.
“으아아!”
적우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무리 눈치 없는 적우라도 모를 수가 없었다. 세작으로 떠나기 전날, 인범은 그에게 학유우(鶴流寓)의 초식을 수십 번 시연하였다.
***
“만약, 내가 학유우(鶴流寓)의 초식을 사용한다면 일이 잘못되었다는 뜻이다. 그때는 반드시 나를 죽여야 한다.”
“에이 숙부님, 그런 무서운 소리 마십시오.”
적우가 어이가 없어 피식 웃어넘기자 인범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세작은 죽으려고 가는 것이다. 내가 죽어야 우리가 산다.”
***
다리를 향하던 선학도는 곧바로 방향을 바꿔 적우의 명치 끝까지 올라왔다. 더 이상 머뭇거리면 적우의 심장이 꿰뚫릴 것이었다.
“죽어라!”
적우는 질끈 눈을 감았다. 보지 않아도 눈앞에 선명했다. 인범은 학유우를 깰 수 있는 필살의 초식 역시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시연했다. 한 치의 실수라도 보이면 의심을 받을 수 있다며, 그는 온몸이 젖도록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적우의 행덕은 거침없이 인범의 몸을 갈라내었다. 최대한 고통 없이, 그러나 누가 봐도 악의가 가득한 흔적으로 그의 몸이 적우의 발아래 반으로 찢겨 널브러졌다.
“방표두!”
너무 놀라 침을 질질 흘리며 달려오는 용조를 흘끗 바라본 적우는 그대로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유일한 버팀목이던 마지막 가족의 끈을 스스로 끊어내었다. 오직 려국인이기 때문이었다.
*** 읍참마속(泣斬馬謖):
큰 목적을 위하여 자기가 아끼는 사람을 버림을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