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變數(변수)
운평표국의 국주 마청옥은 수레의 하중을 늘리는 만족스러운 방법을 찾아 기분이 좋았다. 무엇보다 이번 수송의 관건은 안전과 속도였다. 태을신교 쪽으로 정보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지만, 그 귀신같은 놈들이 언제 어디서 잠복하고 있다가 튀어나올지 모를 일이었다. 혹여 기습을 당하더라도 수레만 잘 지킨다면 공물을 수송하는 목적은 달성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번 일은 성공이었다.
“국주님, 두타공파의 조장문이 찾아오셨습니다.”
표두의 부름에 마청옥의 얼굴이 험상궂게 변했다. 조양이 이번 일의 책임자로서 자기 일을 돕고 있지만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아무리 무림 맹주라지만 자신보다 나이도 어린놈이 이러쿵저러쿵 간섭하는 것이 꽤 짜증 났기 때문이었다.
“마대인, 직접 운송에 나서신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조양은 세상 친절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서 마청옥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는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 상대를 띄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강호에서는 조양이 그보다 윗사람일 수 있으나 나랏일과 관련된 일은 마청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장사치라고 무시하기에는 뒷배가 든든했기에 조양은 내내 그의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말씀대로 수레 가운데에 공물을 싣고 시작과 끝쪽에 포로를 태웠습니다. 또한,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총표두 둘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시큰둥한 말투로 마청옥이 상황을 보고하자, 조양은 금세 상대의 마음을 눈치챘다. 부러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연신 잡은 손을 두드렸다.
“어련히 알아서 하셨을 텐데 뭘 또 이리 자세히 설명하십니까? 오늘은 일찍 주무시고 푹 쉬십시오.”
조양이 지나칠 정도로 자신을 각별히 대하니, 마청옥의 마음도 슬그머니 풀어졌다. 어쨌든 무공으로는 천하제일이라는 이가 저리 겸손하고 예의가 바르니 트집을 잡으려야 잡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부디 무탈하시길…….”
운평표국을 빠져나온 조양은 자신이 묵고 있는 황석산이 아닌, 그 반대쪽으로 꺾어져 인적이 드문 길을 한참 들어갔다. 문득 걸음을 멈춘 그는 울창한 숲 쪽을 보며 나직이 소리쳤다.
“나와라.”
부스럭
검은 인영이 달빛 아래로 나오자 백의를 걸친 젊은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고개를 한껏 숙여 예의를 갖춘 그는 반가운 마음을 담아 인사를 전했다.
“제자 백형진 사부님을 뵙습니다.”
“오냐.”
형진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사부의 얼굴을 마주했다. 무려 한 해가 지나도록 보지 못하였으나 어쩐지 더 젊어진 것도 같았다.
“그래, 준비는 잘하였느냐?”
“네, 최대한 들키지 않도록 거리를 두고 따를 것입니다. 첫 기습에는 모른 체하다가 연향에서 합류하여 혼란을 주겠습니다.”
조양은 사뭇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야무지고 영리한 아이니 맡은 바 임무는 잘 끝내리라 생각했다. 어느 정도 보고를 전해 들은 후에는 가장 궁금한 질문을 던졌다.
“그 아이에게서 알아낸 것은?”
형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으나 곧 마음을 다잡고 고개를 잔뜩 숙였다.
“그것이 아직……. 주운은 경전의 내용을 전혀 모르는 것이 맞고, 그녀를 따라 구월산에 갔을 때는 검선이 이미 떠난 후라 만나지 못했습니다.”
“흐음…….”
어차피 쉬이 알아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만에 하나 형진이 주운의 마음을 흔들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으나 아직은 아닌 모양이었다. 애초에 큰 기대가 없었으므로 그다지 실망하지는 않았다.
“다만, 내일 주운이 함께 움직일 것 같습니다.”
“뭐?”
스승의 철두철미한 성격을 모르는 바 아니었기에 혼날 각오를 하고 뱉은 말이었다. 이 중대한 일에 주운이 변수가 될까 걱정하는 마음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형진은 혹여 오해받을까 두려워 재빨리 변명을 시작했다.
“태을신교가 급습한다는 소문이 이미 운평 바닥에 파다합니다. 운선에 대한 실마리라도 찾겠다는 주운을 차마 말릴 수 없었습니다. 만약 방해한다면 제가 목숨을 걸고 막겠습니다.”
조양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제자를 한껏 노려보았다.
“네놈이 그 아이를 막을 수 있다고? 내공으로도 검법으로도 실력에서 한참을 못 미치면서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막상 사부에게 적나라하게 들으니 수치스러웠다. 고개를 잔뜩 숙인 형진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흐음, 그러나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겠구나. 적당히 날뛰게 두어라.”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조양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지어진 듯도 하였다. 형진은 그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일단 주운의 일을 허락받은 데 대해서는 다행이라는 마음이었다. 서둘러 인사를 마치고 자신이 묵는 객잔으로 발길을 돌렸다.
“제자가 위험하면 스승이 나타나겠지.”
멀어져가는 제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양은 긴 수염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묘시(卯時)의 시작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에 맞춰 거대한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대산파의 장문 고인경과 운평표국의 국주 마청옥을 필두로 하여 그의 심복인 총표두 용조, 방인범이 바로 뒤에서 말을 타고 뒤따랐다. 윗사람들의 짐과 식량을 어깨에 짊어진 쟁자수 열이 선두 대열을 따랐는데 이 사이에 운선이 있었다.
“어째 저 녀석은 얼굴이 기생오라비 같은 게 영 찝찝합니다.”
인범이 용조에게만 들리도록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를 놈이 홀연히 나타나 수레바퀴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 의심스럽다는 취지였다.
“내가 확인해 보았는데 무공을 전혀 못 하네. 만약 세작이라면 저리 맨몸뚱이로 보낼 리가 있는가?”
용조는 인범에게 호언장담하며 껄껄 웃었다. 벌써 오 년을 함께 했으니 동료의 조심스러운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표두로서 훌륭한 자질이었으나 가끔 과하게 드러낼 때가 있어 귀찮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겨우 바라는 것이 선발대에 합류하는 것이라니, 얼마나 멍청하고 안쓰러운가? 괜히 순진한 청년 앞길 막지 말고 자네 앞길이나 염려하세.”
방인범은 탐탁지 않았으나 자신보다 직급이 높은 선배의 말이라 더는 대거리를 하지 못했다. 사실 자신이 예민해져 있어서 괜한 걱정을 하는지도 몰랐다. 그는 이틀 전 마청옥이 알려준 수레의 비밀 때문에 심란하여 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 려국인 삼 백. 만약 일을 그르친다면 모두의 운명은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 뻔했다.
“형님은 걱정도 아니 됩니까?”
용조는 미간에 내천(川) 자가 잔뜩 그어진 인범을 보며 또 한 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일이 언제는 위험하지 않았나? 평소와 다를 것 없네. 게다가 이번에는 우리 국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나?”
용조는 마청옥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깨가 으쓱해짐을 느꼈다. 그는 이제 예순을 넘긴 노인이었으나 나이가 무색할 만큼 대단한 인물이었다. 불과 이십여 년 전만 해도 대도청마(大刀靑魔) 마청옥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의 말에 매달려 있는 대도에 목숨을 잃은 강호인이 몇이던가? 그중에는 내로라하는 절대 고수도 있었다.
다만 그의 한 가지 흠이라면 재물에 욕심이 많다는 점이었다. 마흔이 넘은 그가 뒤늦게 차린 표국이 이십여 년 만에 경국을 대표하는 상단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슨 일이든 돈이 되는 것이라면 가리지 않는 그의 오지랖 덕분이었다. 용조는 그것 또한 마음에 들었다. 그 덕분에 부모 복 없이 태어난 자신이 지금껏 풍족하게 살 수 있었다.
“저 애송이가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말이야.”
자연스럽게 그 옆으로 시선을 돌리던 용조는 인경의 말 탄 모습을 보고는 혀를 끌끌 찼다. 무공의 기본만 갖추고 있을 뿐, 경공도 내공도 엉망이었다. 만약 위험에 처한다면 제일 먼저 저놈이 죽을 것 같았다.
‘흥, 절대로 구해주지 않을 테다!’
하루를 종일 이동하니 어느덧 죽평에 다다랐다. 이제 고개 하나만 넘으면 고을에 도착할 듯싶었다. 무려 열 대의 수레와 백여 명의 인원이 움직이고 있었으므로 맨 앞에서 행렬의 끝은 보이지도 않았다.
“한 식경만 쉬었다 출발하세. 오늘 밤에는 정해둔 객잔에 도착해야 노숙을 면할 수 있네.”
마청옥이 용조를 불러 지시하자, 그의 수하인 인범이 일정을 전하기 위해 뒤쪽으로 말을 타고 달려갔다. 전달하고 돌아오는 데만도 일각이 족히 걸릴 거리였다.
“드십시오.”
운선은 식량 보따리를 빠르게 풀고는 피곤에 지친 표두와 표사들에게 요기할 만한 것을 배식하기 시작했다. 유독 힘들어 보이는 인경의 앞까지 걸어갔을 때, 그는 물끄러미 운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우리 어디서 본 적이 있습니까?”
“어이쿠, 그럴 리가요. 이렇게 높으신 분을 어찌 감히 제가…….”
운선은 시치미를 떼며 뒷걸음질을 쳤지만, 내심 깜짝 놀랐다. 인피면구를 쓴 모습만 보았을 테니 자신을 절대로 못 알아볼 줄 알았는데 눈썰미가 남다른 것 같았다.
‘꽤 영민한 친구네.’
사실 객잔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딘지 모르게 인경이 안쓰러웠다. 어린 나이에 멸문을 당하고 사문의 재건이라는 큰 책임을 떠맡은 그가 자신의 모습과 자꾸 겹쳐 보였다. 무공이 약하면서도 의리가 있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만약 도적을 만나거든 제 뒤로 오십시오. 최대한 도와드릴 것입니다.”
인경은 운선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표사들은 절대로 짐꾼 따위의 목숨을 구하려 하지 않을 테니 자신이라도 이들을 지켜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운선은 그의 착한 마음씨에 가슴이 찡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슬며시 웃음이 났다.
‘그런데 누가 누굴?’
두 사람이 한담을 나누는 사이 해가 뉘엿뉘엿 넘어갔다. 붉은 노을이 온 산을 뒤덮자 용조는 다시 표사들을 독려하여 떠날 채비를 하였다. 출발 신호를 주기 위해 방표두가 말을 몰아 뒤쪽으로 향할 때였다.
“기습이다! 태을신교다!”
“저……, 적……적우!”
“으악!”
행렬의 맨 끝에서 요란스러운 외침이 들리더니, 곧이어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왔다.
“기습이구나! 마국주님과 고문주님은 앞쪽을 지키십시오.”
용조가 말머리를 돌려 뒤쪽으로 움직이려 할 때였다.
“저도 갑니다.”
그보다 먼저 고인경의 말이 쏜살같이 뒤쪽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의 귀에는 오로지 한 단어만이 맴돌고 있었다. ‘적우!’ 꿈에서라도 복수하고 싶었던 그가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이 순간만큼은 임무고, 책임이고 아무것도 의미 없었다.
“이런!”
인경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운선은 차마 따라갈 수 없어 발만 동동 굴렀다. 최소한의 피해만 주고 후퇴하는 것이 원래의 작전이지만 적우의 성정이라면 표사 몇은 죽일 것이 분명했다. 그 와중에 인경이 끼어든다면 골치 아파질 것이 뻔했다.
‘어찌 됐든 고대산파의 장문이니 마지막까지 살려두어야 한다. 나중을 위해 증인이 되어야 한다.’
망설이던 운선은 이윽고 결심이 섰다. 꽤 큰 변수였으나, 티가 안 나게 돕는다면 어찌 잘 해결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운선이 어깨에 멘 짐을 다시 내려놓으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마차에 가린 쪽으로 우회하면 경공을 써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내가 갈 테니 여기 있게.”
운선의 어깨 위로 묵직한 힘이 전달됐다. 얼마나 내력이 강한지 단지 손으로 눌렀을 뿐인데 일어서려는 운선을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혔다.
“여기서 들키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자네가 가는 것보다 자연스럽지 않은가?”
빙그레 웃는 얼굴과 달리 그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송송 배어 나오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무려 오 년을 기다린 것이었다.
“꼭 살아서 만나세나.”
운선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돌아선 그는 운평표국의 총표두이자, 태을신교의 감리사자(坎離使者) 방인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