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布石(포석)
조만간 표국에서 큰 거래가 있다는 소문 덕분에 운평에는 경국 안팎의 상인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특히 해금강과 경인해 사이에 자리한 해금 객잔은 지역 특수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십수 명의 점소이가 바쁘게 움직이는데도 손님들의 주문이 밀려 정신이 없었다.
“이곳에서 제일 비싼 음식들로 상을 가득 채우게!”
2층 정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앉은 적우는 객잔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점소이를 연신 불러댔다. 옆에 앉은 현진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노려보았으나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온갖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워낙에 그가 시끄러운 탓에 주변에 앉은 손님들이 계속 두 사람을 흘끗거렸다.
“야, 이놈아! 적당히 좀 해라.”
적우가 또다시 점소이를 불러 주문을 하자, 현진은 더는 참지 못하고 화를 버럭 내었다. 이러다가 가지고 온 여비가 몽땅 거덜 날 것이 분명했다.
“에이, 사저. 대사형이 최대한 티를 내라 하지 않았습니까? 이참에 여비도 팍팍 써보고 주목도 받아보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 아닙니까?”
그러나 적우는 현진의 꾸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농담으로 넘겼다. 지난 몇 년간 맡았던 임무 중에 오늘이 제일이었다.
“사형, 그러다 배가 뻥 하고 터지겠어요.”
어느새 도착한 윤설이 두 사람 사이에 의자를 당겨 앉으며 까르르 웃었다. 적우는 언제봐도 단순하고 유쾌해서, 만나면 기분이 좋아졌다. 반면에 현진은 오늘도 얼굴에 잔뜩 빗금이 가 있었다.
“운선이는 어떻게 됐느냐?”
그녀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운선에게 유독 쌀쌀맞았는데 그러면서도 보이지 않을 때는 그를 가장 많이 챙기고 걱정했다. 그 마음을 잘 아는지라 윤설은 애써 태연하게 젓가락을 들며 대꾸했다.
“아주 잘 배우고 있습니다. 내력을 겨루는 거라면 적사형보다 월등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라니까요. 이변이 없다면 사흘 뒤에 표국의 쟁자수로 들어갈 예정이에요.”
“아주 잘난 놈이라니까.”
적우는 새삼 운선이 자랑스러워 왈칵 감동이 밀려왔다. 자신이 사람 하나는 기차게 골랐다는 생각에 가슴이 웅장해졌다.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허나, 현진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운선은 이런 일에 처음인 데다가 몸이 회복된 지도 한 해가 채 넘지 않았다. 운이 나빠 일이 잘못된다면 적진에서 결코 빠져나오기 쉽지 않을 터였다.
“표국 내에서는 오라버니의 얼굴을 아는 이가 없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대비책을 마련했어요. 인피면구는 조금만 가까이서 봐도 티가 나지만 화장술이라면 얼추 숨길 수 있을 거예요.”
최대한 긍정적으로 말했으나 사실 가장 걱정을 하는 사람은 윤설 자신이었다. 여러 차례 성곤을 졸라 보고 다른 방도도 연구해 보았다. 심지어 운선을 따라가려고도 했으나 단칼에 거절당했다.
“걱정이구나.”
두 여인의 얼굴이 온통 흐려지자 무심히 지켜보던 적우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우리 아우님이라면 멋지게 해낼 겁니다. 걱정하지 마쇼!”
취기가 올랐는지 그의 얼굴에 불그스름하게 홍조가 생겼다. 마음 같아서는 운선이와 밤새 정담을 나누고 싶었으나 사정상 그럴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었다.
“그래, 그 아이를 믿을 수밖에…….”
현진이 무심코 객잔 밖을 내다보았다. 항구에는 상인들이 짐을 싣고 나르느라 시끌벅적했다. 어쩌면 자신도 저들처럼 평범하고 무던하게 살고 싶은지도 몰랐다.
“천서국으로 가는 국경까지는 세 개의 고을을 거칩니다. 죽평, 연향, 그리고 신화정. 우리는 죽평에서 먼저 기습을 합니다.”
윤설은 이윽고 두 사람에게 마세풍의 계획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그의 작전은 다음과 같았다. 총 세 개의 거점을 거치는 동안 두 번, 두 명씩 조를 짜서 기습하되, 적절한 때에 후퇴한다. 포로 몇 명은 구해내더라도 아슬아슬한 시점에 포기하는 것이 좋다.
죽평과 연향은 거리가 꽤 되기 때문에 연달아 공격을 받을 시에 표사들이 꽤 지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방심할 만한 지점은 신화정이었다. 천서국과의 거리가 몇 리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두 번의 공격이 실패했으므로 또다시 태을신교가 공격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할 것이었다. 혹여 경계한다고 해도, 외부의 적만을 고려할 테니 운선이 활동하기에는 더없이 적당한 곳이었다.
“참으로 어려운 작전이구나.”
현진은 씁쓸한 마음에,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벌컥 들이켰다. 서로 손발이 잘 맞아야겠지만 그보다 시시때때로 적의 동태를 살펴 불시의 상황에 대비할 수 있어야 했다.
“내가 또 한 연기력 하지. 제대로 추태 떨며 아쉬워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적우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말하고는 있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신이 난 기색이었다. 그동안 운평표국에 빈틈이 없어 허탕만 치던 와중에 솟아날 구멍이 생겼으니 기쁠 만도 하였다. 어차피 그들의 임무 중에 쉬운 일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저 할 수 있다고 믿을 뿐, 성공 가능성은 언제나 반반이었다.
“너는 어찌할 생각이냐?”
현진의 물음에 윤설은 잠시 망설였으나 곧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황석산에서 오라버니를 기다려야지요. 반드시 돌아올 겁니다.”
결과는 하늘의 뜻이겠지만 믿음은 각자의 몫이었다.
고대산파가 맡은 일은 거대한 열 대의 수레를 끄는 인부들과 이를 호위하는 표사들을 이끌고 감독하는 일이었다. 인경은 다섯 명의 사형제들을 골고루 배치했는데 맨 앞에는 역시 자신이 서는 것이 맞겠다 싶었다. 그다음으로 믿을 만한 이는 영준이었으므로 마지막 수레는 그에게 맡겼다.
“괜찮겠느냐?”
“네, 사형. 아무래도 처음과 끝이 제일 위험하니 이대로 두는 게 적절합니다.”
걱정스러운 눈길을 거두지 못하는 인경에게 활짝 웃어 보이는 영준이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이 희생양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군말 없이 이 일을 맡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만약 일이 잘 성사된다면 오대산검의 각 문파에서 고대산파로 지원을 보내겠네. 문파가 재건하기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울 것이야.”
조양의 너그러운 얼굴을 바라보며 대화하는 내내, 인경은 덜덜 떨리는 주먹을 소매 속에 감춰야 했다. 이 치욕을 감내해야 사문의 미래가 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그 생각만이 맴돌았다.
“나는 참으로 못난 장문이다.”
인경은 영준의 두 손을 거머쥐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런 마음이 들 때면 차라리 그날 태사부와 함께 죽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후회도 되었다. 그러나,
“태사부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 잊으셨습니까?”
신양선은 숨이 꼴깍꼴깍 넘어가는 와중에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는 오직 같은 말만 수차례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아직 아니다. 멸문이 아니다.”
영준이 전한 태사부의 유언이 여태껏 인경의 삶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러니 문주님, 부디 포기하지 마십시오.”
인경은 크게 코를 훌쩍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맞다. 한 문파의 장문인이 그깟 수치심 하나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보이면 안 되는 것이다. 자신은 이미 하나의 목숨이 아니었다. 먼저 간 수백의 목숨을 짊어지고 있었다.
영준과 헤어진 그는 총표두들을 만나기 위해 단청으로 향했다. 운송을 맡은 표두는 수가 스물이었는데 그중에 열이 각 수레의 책임을 맡은 총표두였다. 백여 명의 표사들도 무공이 뛰어나지만, 특히 표두들은 웬만한 문파의 장로급 실력이라고 했다.
“고문주님, 우리 모두 십여 년의 경력이 있으니 크게 관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인경과 간단한 인사 후에 총표두인 용조가 나서 호언장담을 했다. 그는 운평표국의 국주인 마청옥의 오른팔로 표국의 큰일을 대부분 담당하고 있었다. 얼핏 친절해 보였으나 인경은 그 이면에 자신을 우습게 보는 속내가 있음을 눈치챘다.
“아시다시피 이번 일은 나라와 나라 간의 약속입니다. 여러 번 확인하고 감수하여도 모자랄 것이니, 평소보다 몇 배로 신경 써 주십시오. 출발은 열흘 뒤 새벽입니다. 앞으로 매일 아침 등청(登廳)하기 전에 모든 표사들을 점검할 테니 담당 표두에게 일러두십시오.”
인경의 목소리는 전혀 크지 않았으나 단청에 모인 총표두들이 알아듣기에는 충분했다.
“네, 문주님.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용조는 마음이 꽤 상했지만, 일단은 그러겠다고 하며 예의를 갖췄다. 마청옥이 미리 신신당부한 말이 없었더라면 뭐라 대거리라도 했으련만, 차마 국주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다.
“되도록 어린 장문의 체면을 세워주게. 만약 일이 잘못된다면 그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데 중간에 기분이 상해 돌아간다면 큰일 아닌가? 혹여 감정이 상하는 일이 있더라도 꾹 참아야 하네.”
인경이 나가자 여기저기서 표두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성질 사나운 그들을 달래느라 한참을 애를 먹고 나니 어느덧 유시(酉時)가 훌쩍 넘어 있었다.
“나 원, 치사하고 더러워서…….”
그는 마당 한구석에 철퍼덕 주저앉아 멍하니 하늘을 보았다. 이제 제법 가을이 무르익어 얇은 장포만으로는 꽤 추운 날씨였다. 그래서일까?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전히 떠돌아다니는 자신의 삶이 꽤 처량 맞게 느껴졌다.
“어?”
그때 그의 눈에 웅크리고 앉아 뭔가를 사부작거리는 검은 그림자가 들어왔다. 그가 만지고 있는 것이 운송에 쓰일 수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용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거기 누구냐?”
일신의 경공을 이용해 마당 건너편까지 한달음에 달려간 용조는 검은 그림자의 목에 묵직한 검(劍)을 겨눴다. 한때 강호에서 연성검으로 이름을 날리던 그였다. 웬만한 상대라면 단칼에 제압하고도 남았다.
“용표두님…….”
용조의 칼끝을 따라 천천히 일어난 그는 아직 스물도 되지 않은 것 같은 청년이었다. 옷차림을 보니 이틀 전에 뽑은 쟁자수 중 한 명인 것 같았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것이냐?”
얼굴이 예쁘장하고 손이 보송보송한 것으로 보아 무공을 할 것 같지는 않았으나 또한 짐꾼이나 할 녀석도 아닌 것 같아 의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저 사실…….”
청년은 머뭇거리며 쥐고 있던 손을 쫙 펴서 용조의 눈앞에 갖다 대었다. 그것은 구리로 만든 못 여섯 개였다.
“이게 뭐?”
“이 바퀴는 박달나무로 만들어 튼튼하지만 아주 무거운 물건을 옮기기에는 적당하지 않지요. 그런데 이렇게…….”
청년은 설명하다 보니 신이 났는지 용조의 칼은 신경 쓰지도 않고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엎드렸다. 그의 손은 바퀴의 가장자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요 둘레에 가죽을 대고 구리 못으로 박아 넣으면 나무만으로 지탱하는 것보다 몇 곱절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 겁니다.”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상대를 계속 위협하기도 민망하여 용조는 어정쩡하게 칼을 거둬들였다. 수레의 하중을 늘리는 일에 대해서는 마국주가 늘 고민을 털어놓아 잘 알고 있었다. 바퀴의 크기를 키우자니 너무 덜컹거리고, 재료를 구리로 바꾸자니 속도가 나지 않았다. 최선이 박달나무 바퀴였는데 한 수레에 삼십여 명을 실어야 하기에 과연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고 했다.
“네 말에 책임을 질 수 있겠느냐?”
용조의 물음에 청년은 대답 대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잡다한 지식이 용케 받아들여지자 꽤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내일 국주님께 아뢰어 시연을 해보마. 대신 애먼 짓을 감추기 위한 임기응변이라면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해야 할 것이야!”
으름장을 놓는 표두가 무서웠는지 청년의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아무래도 별 볼 일 없는 시골 촌부임이 분명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여 용조는 의심이 완전히 풀릴 때까지 그를 독방에 가둬놓기로 마음먹었다.
“용표두님, 만약 제가 공을 세우면 제일 앞 마차에 서고 싶습니다.”
“그건 왜냐?”
청년을 앞세워 두고 뒤따르면서 용조가 물었다. 앞 마차에 서면 딴짓을 할 수 없어 대부분의 쟁자수들은 선호하지 않기 마련인데 영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하니 어이가 없었다.
“아버지께서 목수인데 저는 손재주가 없어 이어받지 못했습니다. 하여 어릴 때부터 표국에서 일하는 것이 꿈이었어요. 잘 되면 무공도 배워 표사로 전향할 수 있지 않을까요?”
청년은 문득 가던 걸음을 멈추더니 뒤로 휙 돌아섰다. 뜻밖의 상황에 놀란 용조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급소를 가리는 한편 상대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청년은 그대로 용조의 일격에 왼쪽 눈을 강타당하며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악!”
청년은 무척 두려웠는지 엉덩방아를 찧은 자세에서 발을 바닥에 끌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완전히 무방비하게 당하는 것을 보니 무공을 전혀 못 하는 자가 틀림없었다.
“아, 미안하네. 내 너무 놀라 실수하였네.”
청년은 그제야 울먹울먹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왼쪽 눈은 그새 부풀어서 눈동자가 전혀 보이지 않는 지경이었다. 용조는 순진한 사람을 의심한 것도 모자라 눈이 시퍼렇게 멍들도록 때린 것이 몹시 미안하였다. 해서 그에게 작은 배려라도 해 주고 싶었다.
“만약 내일 시연이 성공하면 반드시 맨 앞 마차에 배치해 주겠네.”
청년은 방금 일어났던 바닥에 다시 넙죽 엎드리며 두 번, 세 번 용조를 향해 절을 했다.
“감사합니다, 표두님. 감사합니다.”
굳이 독방에 가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용조는 내일 다시 얘기하자며 청년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괜히 머쓱하여 머리를 북북 긁더니 서둘러 자신의 숙소로 가버렸다.
“순조롭게 잘 되었어.”
청년은 용조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나서야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내었다. 적당히 멍이 들 정도만 맞으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주먹이 세서 눈이 많이 부은 것 같았다. 연신 왼쪽 눈을 깜빡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참 밝구나.”
어느새 둥실 떠오른 반달이 운선을 내려다보며 곱게 미소짓고 있었다.
*** 포석(布石):
바둑에서 처음 바둑돌을 놓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