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47화 (47/209)

#47화. 同床異夢(동상이몽)

세 사람의 부담스러운 시선에도 마세풍은 태연하게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누구 하나 함부로 입에 올릴 사안이 아니었으므로 그렇게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운평표국에 잡혀 있는 려국인이 삼 백이라고 들었네.”

“…….”

이윽고 마세풍이 이야기를 시작하자, 성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천서국으로 가는 경로, 날짜 그리고 인원까지 다 알려 주면 되겠나?”

“지금 뭐 하는 건가?”

두 사람의 관계 이전에 마세풍은 경국인이었다. 서로를 도울 수는 있겠으나 어디까지나 모국에 위해를 가하지 않는 범위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 이상을 바란 적도, 바랄 것도 아니었기에 마세풍의 이 같은 제안에 성곤은 수치심까지 느꼈다.

“우리가 불쌍한가?”

성곤의 목소리에서 부끄러움과 분노가 섞인 떨림이 전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떡 일어나 떨치고 나갈 수 없는 것은 그만큼 그의 도움이 절실하기 때문이었다. 며칠 동안 수없이 많은 방법을 연구했으나, 운평표국 내부로는 한 발자국도 접근할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려국인들을 구하려다 오히려 태을신교가 위험에 빠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네는 스스로가 불쌍한가?”

성곤의 분노가 쉬이 가라앉을 것 같지 않자, 마세풍은 그제야 술동이를 내려놓고 친구와 눈을 마주했다. 앙다문 입술에서 어떤 결의 같은 것이 느껴졌다. 흔히 볼 수 없는 그의 진지한 모습이었다.

“설혹 불쌍해서 도와준다고 해도 거절할 입장은 아니잖나?”

“마세풍!”

성곤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의자에서 일어나자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던 술동이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주방 쪽에서 불편하게 서 있던 두 사람은 곧 싸움이라도 날 것 같은 분위기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착각하지 마. 나는 려국을 돕는 게 아니니까. 그저 못마땅할 뿐이야.”

흥분한 상대와 달리 마세풍은 태연자약했다. 술동이를 뒤집어 탈탈 털더니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마셔 버렸다. 예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는 이번에는 머리 위로 손을 들어 주방 쪽을 향해 세차게 흔들었다. 운선이 주춤주춤 탁자 쪽으로 다가가자 자신의 배를 슬슬 문지르며 너스레를 떨었다.

“배가 쪼그라들어서 등가죽과 인사하기 직전이야. 곱빼기로 국수 가능한가?”

운선이 어설프게 웃으며 주방으로 돌아갈 때까지도 성곤은 자리에서 일어선 채 물끄러미 친우(親友)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실 그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오래되었다. 나라가 다른 그들이 그 긴 시간 동안 서로를 신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람 그 이외의 것이 둘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려서는 무공을 겨루고 음률을 배우며 가까워졌고 늙어서는 세월을 이야기하며 지냈다. 서로의 아픈 상처는 결코, 건드리지 않았다. 부러 참견하지 않기도 했거니와 꺼내놓지 않으니 아예 부딪힐 일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이 암묵적인 금기가 깨진 셈이었다.

“고유생 그 머저리가 공명심에 눈이 멀어 벌인 일이겠지. 나는 그저 그 늙은 구렁이가 감히 황석파를 좌지우지하는 것이 싫어. 뿐이냐? 세상 좋은 사람인 척하는 모습도 역겨워.”

“정말 그것뿐인가?”

성곤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어차피 그는 마세풍의 호의를 거절할 자격이 없었다. 알량한 자존심이 무려 삼 백이 넘는 동족의 목숨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

“뭐가 더 있어야 하나? 음, 어디 보자. 그럼 죄책감 정도로 해두지.”

친우를 바라보는 마세풍의 눈에 약간 눈물이 고인 것도 같았다. 그 죄책감은 한 문파의 장문인인 그가 산속에 은거하여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는 이유이기도 했다. 오랜 세월 마음에 담아두고 차마 입에 올리지 못했던 말을 마치 농담처럼 흘리고 나니 홀가분한 기분도 들었다.

“그 일은 이미 이정이가 풀고 갔으니 마음에 둘 것 없네.”

성곤은 다시 자리에 앉아 술동이를 손에 들었다. 이 일이 어떻게 끝나더라도 두 사람은 예전으로 돌아가기 어려울 것이었다.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은 착잡한 기분을 애써 숨기며 또 그렇게 한참을 술만 들이부었다.

“저 녀석 자질이 어떤가?”

마세풍은 눈동자를 한참 굴리며 고민하더니 뜬금없이 운선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쁘지 않네.”

“어지간히 똘똘한 녀석인가 보군.”

성곤이 나쁘지 않다면 꽤 대단한 칭찬이었다. 무공의 기재(奇才)라는 이서문에게도 늘 모자라다 불평만 늘어놓던 그였다. 마세풍은 흡족한 표정으로 운선을 불렀다.

“나한테 제대로 배워볼 테냐?”

사백이 옆에 있어 크게 기쁜 티는 내지 못했으나 운선은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이미 영명권의 놀라운 위력을 경험했던 터라 무릎을 꿇고 빌어서라도 배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걸 거저 알려 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대신, 보름 동안 5할 이상을 배워야 한다.”

성곤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친우의 의도를 살폈다. 영명권은 실로 엄청난 무공이었기에 그만큼 배우기 어려웠다. 하물며 실력은 조양에게 크게 뒤처지지 않는다는 황석파의 고유생도 권풍은 스승에게서 사사하지 못했다. 24절이나 되는 양을 보름 만에 12절 이상 익힌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그런 조건을 꺼내는 데에는 남다른 계획이 있음이 분명했다.

“요 며칠간, 운평표국을 감시해서 잘 알겠지. 결코, 내부 사정을 알아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야. 혹여 미리 간자를 잠입시켜 놓았다 하더라도 그를 만나기조차 어려웠겠지.”

성곤은 느닷없이 정곡을 찔리자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마세풍의 말에 따르면 이미 조양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들이 한 달 가까이 했던 노력이 다 허사였음을 깨닫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리하여 제대로 된 세작이 필요하네. 무공이 뛰어나며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자! 그리고 운평표국 내에서 누구도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운선에게로 향했다. 그의 자질을 확인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태을신교의 칠원성군은 윤설을 제외하고 모두 얼굴이 알려져 있었다. 허나 그녀는 무공을 할 수 없으니 조건에 맞지 않았다. 운평표국에 잠입하여 정보를 캐내고 미리 짜둔 계획을 내부의 간자와 조응할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운선밖에 없었다.

“아까 가르쳐 보니 깜냥이 있어. 보름 동안 죽어라 배우면 12절은 깨우칠 수 있으리라 생각하네. 그것만으로도 자기 한 몸은 건사할 수 있겠지.”

천서국으로 출발하는 날짜는 지금으로부터 달포쯤 뒤였다. 시간의 여유가 없으므로 계획은 좀 더 철저하고 치밀해야 했다.

“내가 겁쟁이 고유생에게 협박을 좀 해놨으니 조만간 조양이 나를 만나러 올 거야. 그리고 나는 그 늙은 구렁이가 설득하려 하면, 못 이기는 척 다시 산에 은거하는 거지. 그 사이 운평표국을 빙빙 돌던 자네들은 낭패를 본 것처럼 혼신의 연기만 하면 되네. 그들이 외부의 적에만 정신이 팔려있을 때, 이 녀석과 내가 사람들을 구하면 되지 않겠나?”

세상 쉬운 것처럼 설명했으나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얼마나 위험한 작전인지 잘 알고 있었다. 우선 잔꾀에 능한 조양을 속여야 했으며, 정확한 정보를 알아내야 했다. 무엇보다 잠입을 담당한 이의 역할이 중요했다. 적진에 머무르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가능할까요?”

윤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할아버지를 돌아보았다. 마세풍의 계획이 조금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운선은 이미 결심이 선 모양이지만, 그녀는 할 수 있다면 다른 방도를 찾고 싶었다.

“어렵겠지.”

성곤은 국수 그릇에 얼굴을 파묻고 쩝쩝거리는 친구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다른 방도가 없구나.”

해는 중천에 떴건만, 잔뜩 화난 구름이 가리고 있는 탓에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곧 완연한 가을이 왔음을 알리는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화려한 휘장이 휘감은 침실은 여기저기 꽂은 향불 때문에 뽀얀 연기로 뒤덮여 있었다. 조양은 되도록 참으려고 했으나 결국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할 수밖에 없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그는 침상에서 천장 쪽을 향해 반듯이 누워있는 남자에게 예의를 다해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오. 조맹주.”

그는 하얀 천을 눈에 덧대고 있어 앞을 전혀 볼 수 없었으나 귀신같이 상대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하나의 감각을 잃으면 자연스럽게 나머지 감각이 발달하기 마련이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조양은 혹여 마음이 상할까 염려하여 최대한 정중한 말투로 물었다. 모든 무림인이 그렇겠지만, 상대는 유독 자존심이 세고 다혈질이었다. 자신을 병신 취급한다고 화를 낼까 봐,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빌어먹을, 내상을 치료한답시고 사시사철 향불을 피워 놓는 통에 머리가 아파 죽겠소.”

예상대로 남자는 대화의 시작부터 욕설이었다. 끊임없이 투덜거리면서도 주요 혈맥에 꽂은 세침(細針)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눈을 잃은 후로 줄곧 이 안에 갇혀 치료를 받았으나, 딱히 나아지는 것은 없고 성질만 더 나빠지는 중이었다.

“사실 부탁이 있어 실례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조양은 침상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만간 경국 황실에서 천서국으로 보내는 공물이 운송된다는 것, 태을신교가 틈을 보아 이를 방해하려 한다는 것, 황석파가 일을 돕기로 했으나 마장문이 방해할까 걱정이라는 것 등을 자분자분 말하고 나니 무려 초 하나가 다 탈 시간이 흘러 있었다.

“이번 일을 성사시키지 못하면 황석파에 불어닥칠 후폭풍을 누가 감당하겠습니까?”

조양은 한껏 눈썹을 아래로 내리며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되도록 궁지에 몰린 사람처럼 보여야 했다.

“아니 대관절 대사형은 왜 나타난 것이오?”

남자는 누런 수염을 부르르 떨며 주먹으로 바닥을 세게 내리쳤다. 평생을 사문을 위한 일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이가 왜 끼어들어 분란을 만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협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의원이 침을 맞는 동안에는 절대 움직이지 말라 했으나, 더는 누워 있을 수 없었던 남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눈은 보이지 않지만, 코가 대신하면 되니 전혀 문제 될 게 없소이다. 맹주는 뒷일은 걱정하지 말고 일을 진행하시오. 내 이번에야말로 사형과 담판을 짓고 말겠소.”

그는 한쪽 벽에 고이 걸린 자신의 보검, 비월을 들어 대차게 한 번 휘둘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멀쩡한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도와주신다니 지극히 감사한 마음입니다. 또한…….”

조양은 남자의 귀에 조그맣게 몇 마디를 중얼거렸다. 얼마나 긴밀한 비밀 이야기인지 방안에 아무도 없었는데도 극도로 조심스러워하는 태도였다. 혹여 말이 새어나갈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흥! 감히 버러지 같은 놈들이 뭘 할 수 있겠소? 나만 믿으시오.”

조양은 허리를 깊숙이 숙여 감사의 마음을 최대한 표한 후에 방을 나섰다. 그가 나간 뒤에도 한참 씩씩거리던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비월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마주하는 오랜 친구였다.

“스르릉”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비월이 검집에서 빠져나왔다. 조금씩 드러나는 칼날에는 드디어 복수의 기회를 잡은 부능파의 비장한 얼굴이 비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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