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46화 (46/209)

#46화. 一期一會(일기일회)

“지금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나?”

“아니, 저…….”

운선이 당황하여 머리를 긁적이자, 마세풍은 짐짓 토라진 척을 하며 새침하게 눈을 흘겼다.

“그럼 노망난 늙은이 소원이라 생각하고 이거 한 번만 저 녀석에게 써먹어 보게.”

그는 멀뚱히 서 있는 운선의 귀를 불시에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침이 튀게 속닥거렸다. 어정쩡한 자세로 듣고 있는 운선의 얼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어두워졌다.

“저놈들이 뭐 하는 것일까요?”

왠지 불길하여, 눈이 찢어진 사내가 부당주에게 물었다. 반면 허윤은 태연하게 뒷짐을 진 채로 대답했다.

“흥, 그저 잔재주나 부릴 모양이구나. 저놈의 내력은 대단한 것이 맞으나, 외공이 전혀 없으니 어차피 승부는 정해졌다.”

부당주의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니 새삼 안심이 되었다. 사내는 한껏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저 녀석이 쓰러지고 나면 마늘을 삼백 개쯤 입에 처넣을 예정이었다. 생각만 해도 고소해서 슬며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말 이게 가능할까요?”

운선이 미심쩍은 얼굴로 물으니, 마세풍이 뾰로통하게 되받았다.

“일단 해 보고 말하게. 젊은이가 참 의심이 많구먼.”

하긴 밑져야 본전이었다. 자신의 실력으로는 아직 저 정도의 고수를 상대하기에 벅찼다. 장력은 꿈도 못 꿀뿐더러 검법을 사용한다 해도 다르지 않았다. 그가 아는 것이라고는 주운에게 삼 년간 배운 수월심검이 전부였다. 그나마도 그녀가 워낙에 가르치는 것에 소질이 없었기에 기초만 겨우 떼는 수준이었다.

“기다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석연치 않은 얼굴로 돌아온 운선은 다시 허윤에게 가볍게 묵례를 했다. 곧 자세를 취했는데 아까와 같이 엉성한 것을 보니, 별 뾰족한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잡놈이었군.’

허윤은 괜히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한 번에 끝낼 수 있도록 다시 양손에 수인을 다르게 잡았다. 이 한 방으로 뼈 몇 대를 부러뜨리고 마무리할 심산이었다. 뒤처리는 원한 가득한 제자들이 알아서 할 테니 굳이 자신이 피를 묻힐 이유가 없었다.

“용수장 4절 용호갑(龍虎胛), 5절 용호상절(龍虎相切)”

나지막하게 창명(唱名)한 그는 눈에 보이지 않게 빠른 동작으로 두 손을 마주 돌렸다. 상대의 눈이 손끝을 따라잡았을 때는 일렁이는 장력이 출수 된 후였다.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한 바람이 일었다. 곧 잔잔한 모래 회오리를 만들어 내더니 두 사람의 주변을 뿌옇게 뒤덮었다. 그 사이로 언뜻, 수 장을 뒤로 밀려나는 운선의 인영이 보였다.

퍽!

“끝!”

허윤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수인을 풀었다. 치명상은 아니더라도 당분간 두 발로 걸어 다니기 힘들 것이 분명했다. 오대산검의 이름난 고수를 만나도 자신이 있을 만큼, 지난 평생을 바쳐 익힌 절초였다. 다만 상대가 무명의 촌부라는 점이 좀 찜찜했지만, 그에게는 오히려 영광일 수도 있다 생각하니 또 나름의 이유가 되었다.

“에이, 둔한 녀석. 딱 반걸음이 아쉽구나.”

허윤은 노인의 혀 차는 소리에 무심코 돌아보았다. 바닥에 뻗어 있어도 모자란 운선이 어느새 바지를 툭툭 털며 일어나고 있었다. 단전에 적중하는 소리를 들었건만 어찌 된 영문인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허윤은 또 한 번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직면했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찰나에 운선의 얼굴이 자신과 한 장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어라?”

허윤은 서둘러 뒷걸음질을 치며 두 팔로 안면을 감싸 안았다. 허나, 팔에 닿은 것은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운선의 주먹이었다.

퍽!

“억!”

서툰 솜씨였으나 내력의 1할 이상을 담은 권풍이었기에 보통의 주먹질과는 수준이 달랐다. 오른쪽으로 반쯤 돌아간 허윤의 얼굴이 순식간에 부풀어 올랐다. 입안에 가득 고인 피를 뱉어내자 무려 어금니 네 개가 후두두 떨어졌다.

“부당주님!”

제자들이 허둥지둥 뛰어와 바닥에 엎드린 허윤을 부축해 일으켰다. 수치심에 얼굴이 벌게진 그가 뭐라고 화를 냈는데 볼부터 입술까지 퉁퉁 부어 마치 옹알이를 하는 것 같았다.

‘집중력 있게 휘몰아치는 힘이 대단하구나.’

운선은 자신도 모르게 오른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장력이라면 감당하지 못할 내력을 주먹으로는 쉽게 받아내는 것이 몹시 신기했다. 여태 그저 식탐 많은 노인 정도로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재야의 고수임이 틀림없었다.

“국수 새로 말아드릴까요?”

신이 난 윤설이 총총 걸어와 세 사람 앞에 턱을 괴고 앉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걱정으로 구겨졌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어, 어……디 두고 보자.”

눈 찢어진 사내는 차마 운선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옆으로 비스듬히 서서는 알아듣지 못할 말을 웅얼거렸다. 그러더니 또 다른 사내의 등에 얼굴이 엉망이 된 부당주를 업히고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아니 영감님, 도대체 정체가 뭡니까?”

사뭇 신이 난 윤설이 잰걸음으로 되돌아와 노인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성질 더러운 거지 노인인 줄 알았더니 무공의 고수도 이런 고수가 없었다. 강호의 웬만한 문파의 무공은 어지간히 알고 있는 그녀였지만 고작 한 초식만 보고는 도저히 노인의 내력을 알 수 없었다. 생각할수록 신통방통한 실력이 아닐 수 없었다.

“누구긴 누구냐? 그 잘난 황석파 장문 아니더냐?”

“어? 할아버지!”

객잔으로 들어서는 성곤을 향해 운선이 황급히 고개를 숙여 예의를 갖췄다. 그는 아예 운선 쪽은 바라보지도 않고 손을 휘휘 내저었다. 가재눈을 떠서는 내내 마세풍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원래는 어젯밤에 왔어야 했건만, 이래저래 계획에 차질이 생겨 새벽에야 겨우 짬이 난 터였다. 졸리기도 하거니와 걱정도 한가득하니, 짜증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와중에 예상치 못한 인물까지 등장하자 기가 턱 막혔다.

“살이 뒤룩뒤룩 쪄서 못 알아볼 뻔했네. 이제 곧 황석산을 굴러서 다니겠는걸.”

성곤은 심통이 가득 난 얼굴로 마세풍이 있는 탁자 앞에 털썩 앉았다. 이 괴랄한 노인네가 끼어들었으니 앞으로 골치 아픈 일이 더 늘어날 것 같았다.

“어이, 오랜만일세. 그간 폭삭 늙었구먼. 마음보를 곱게 써야 주름이 안 생길 텐데 자네는 글렀네, 글렀어.”

운선은 마세풍의 정체보다 두 사람의 관계가 더 뜬금없었다. 저 노인이 오대산검의 장문 중 한 명이 맞는다면 태을신교의 교주인 사백님과는 대척점에 있는 이가 아닌가? 눈만 마주쳐도 싸워야 할 판에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으니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돼, 이 영감탱이가?”

윤설은 너무 당황하여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을 뱉고 말았다. 그녀의 버릇없는 말투에 운선이 정색하며 핀잔을 주자, 오히려 마세풍이 거듭 말렸다.

“어쩐지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것이 고놈 참 심술궂다고 했는데, 이 친구 손녀였구먼. 그러고 보니 묘하게 얼굴이 닮았네, 닮았어.”

그는 뭐가 재밌는지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손가락질하며 연신 키득거렸다. 그러든지 말든지 성곤은 조용히 일어나더니 주방에서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술 동이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나왔다.

“됐고, 오랜만에 술이나 함께 하세.”

“좋지!”

두 노인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술 동이를 마주 부딪치더니 쉬지 않고 꿀꺽꿀꺽 받아넘겼다. 운선은 성곤이 술을 마시는 것도, 누군가와 농담을 나누는 것도 처음 보는지라 눈이 휘둥그레져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오랜 친구래요.”

어느새 운선의 곁으로 다가온 윤설이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참 웃기죠? 절대 친해질 수 없는 신분의 두 사람이 평생 하나뿐인 지기(知己)라니, 직접 보지 않으면 믿기 힘든 일이죠.”

운선은 문득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두 사람의 오랜 역사는 알 수 없었으나 십여 년 만에 만났어도 어제 만난 이들처럼 스스럼없는 모습이 퍽 인상 깊었다. 지금 저 두 사람 사이에는 국적도 이념도 혹은 그 어떤 대단한 이상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저 물건은 자네가 키운 건가?”

한참을 말없이 술을 들이붓던 마세풍이 이윽고 턱을 들어 운선 쪽을 가리켰다.

“버린 거 주워다 키운 셈이지.”

운선을 향한 시선에서 상대의 의도를 읽은 성곤은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약식이긴 했으나 황석파의 절기(絶技)인 영명권(靈名拳)의 일부를 전수해준 것만 보아도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마세풍은 운선을 탐내고 있었다.

“그럼, 나 주게!”

아니나 다를까, 마세풍은 성곤의 옷자락을 잡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그가 식탐만큼 과한 것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제자 욕심이었다. 지금 그는 완전히 운선에게 꽂혀서 체면이고 뭐고 상관없는 지경이었다. 정작 가르치는 본인도 반신반의했건만, 그 배우기 어렵다는 영명권의 1절을 3할 이상 구현해 냈을 때 이미 마음이 정해졌다.

“그러기엔 또 아깝네.”

누구보다 그의 성정을 잘 아는 성곤은 부러 태연하게 반응하며 슬슬 약을 올렸다. 어차피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척 운선을 내어주겠지만 왠지 값을 높여 부르고 싶은 심술이 났다.

사실 성곤은 운선의 팔 때문에 태을신공의 위력을 다 표출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속상했다. 아무리 내공이 강하더라도 외공을 사용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었다. 그가 연구한 끝에 도달한 결론은 하나였다. 강한 내력을 견디기에는 장풍보다 권풍이 월등히 나았다. 허나, 자신은 그쪽으로는 아예 소질이 없었다.

권풍의 최고봉은 누가 뭐라 해도 이 괴짜 노인 마세풍이었다. 명문정파인 황석파의 내전 무공을 사파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 또한 이 이밖에 없었다. 하지만 신출귀몰한 그를 만나는 일은 벼락을 두 번 맞는 것보다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하려는 시점에 그가 나타난 것이었다. 심지어 부탁도 하기 전에 가르쳐 주겠다 떼를 쓰니 이보다 반가운 일이 있겠는가? 성곤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나름 힘겨운 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이를 어쩐다…….”

이미 몸이 바싹 달은 마세풍은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한쪽 발을 덜덜 떨었다. 이 대단한 일신의 무공을 온전히 전할 수 있는 인재를 만나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와 다름없었다. 게다가 운선은 요리도 잘하니 일거양득이 아닌가? 벌써 마음이 달떠, 머릿속에서는 운선을 가르치는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좋다! 그럼 이건 어떠냐?”

“뭐?”

성곤이 곁눈질로 내려다보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또 적당한 보도(寶刀)나 보검(寶劍)을 들이밀면서 대충 후려치려고 할 것이 뻔했다.

“황석파의 보물, 양지검을 주겠다!”

“흥!”

입안에 머금었던 술을 목구멍으로 넘기며 성곤이 크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이건 어떠냐? 궁극의 명약, 황석 산삼!”

“…….”

그가 이번에는 아예 등을 지고 돌아앉자 마세풍의 얼굴이 한층 초조해졌다.

“어쩔 수 없지. 이건 내 마지막 비기였는데…….”

이쯤 하면 됐다 싶어 성곤이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운평표국!”

“뭐?”

성곤의 얼굴에 있는 주름이란 주름이 다 튀어나와 검은 그림자를 잔뜩 만들어 냈다. 지금 이 노망난 돼지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고 있는 건가?

“내 운평표국을 주겠네.”

세상 진지한 그의 얼굴을 보니 결코 농담은 아닌 것 같았다.

*** 일기일회(一期一會):

평생에 단 한 번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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