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45화 (45/209)

#45화. 臨機應變(임기응변)

마세풍이 운선의 국숫집에 오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식탐이 유독 많은 그가 지나던 길에 들른 곳이 하필 맛집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다 두 사람이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꼈고 그 의심이 어제 마늘 투척 사건 때문에 확신으로 바뀌게 된 것이었다.

‘저놈이 어느 정도 실력인지 구경이나 해야겠다.’

그는 흥미진진한 표정이 되어 두 사람을 바라보는 자세로 고쳐 앉았다. 원용당의 부당주를 직접 마주한 일은 없으나 소문으로는 익히 들어왔다. 그는 용수장의 고수였는데 장풍에 있어서만큼은 현(現) 당주를 능가한다고들 했다.

“어제 일에 대해서는 사죄드리겠습니다.”

운선은 뻔히 상황을 알면서 돌려 말하고 싶지 않았다. 설마 진짜로 국수가 맛있어서 왔을까?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들의 저의를 모를 수가 없었다. 시비를 걸기 위한 이유라면 몇 대 맞아주고 사죄하면 될 일이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저는 그저 이 집 국수가 별미라 하여 왔을 뿐입니다.”

그러나 허윤은 도통 운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탁자 앞으로 가서 앉았다. 그의 뒤에 서 있던 두 사내는 꽤 불편한 기색으로 주춤주춤 부당주의 뒤를 따라왔다.

어차피 피할 수 없다는 결론이 서자, 운선은 터덜터덜 주방으로 향했다. 국수를 끓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상대의 태도가 영 못마땅했다. 예의를 갖춘 듯했지만, 일부러 시치미를 떼는 것이 자신을 비아냥거리는 모양새였다.

“저 호랑말코 같은 놈은 또 뭐래?”

윤설은 욕설이라도 퍼붓고 싶었지만, 혹여 자신의 무례한 행동이 운선에게 피해가 갈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마세풍만이 신나 죽겠는지 눈이 반짝반짝했다.

“누가 이길 것 같나?”

초조해서 손톱을 잘근잘근 씹고 있던 윤설은 뜬금없는 노인의 질문에 약이 바짝 올랐다. 도대체 이 눈치 없는 영감탱이는 왜 이른 아침부터 와서 자신의 성질을 돋우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영감님, 국수도 다 드셨는데 이제 좀 가시죠?”

“흥! 이 재밌는 구경거리를 두고 어딜?”

마세풍은 마지막 남은 닭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의자를 바짝 잡아당겼다. 운선의 내력이 상당하다는 것은 눈치챈 지 오래였다. 다만 외공이 어느 정도인지가 몹시 궁금하던 차였다. 황석산에 묻혀 세상과 담을 쌓은 그였으나 무학(武學)에 대해서만큼은 아직도 피가 들끓는 청춘이었다. 진작에 운선의 선천적 재능을 알아보았기에, 내심 제자로서 욕심이 났다.

“국수 나왔습니다.”

운선이 긴장한 표정으로 국수를 내려놓자 허윤의 시선이 그의 손에서 얼굴로 올라갔다. 아무리 봐도 약관의 비리비리한 청년인데 본당의 고수 넷이 허무하게 당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인피면구를 쓴 것을 보니 정체를 가리려는 것 같은데 도대체 어느 문파의 누구이기에 이처럼 연극을 하는지 궁금하구나.’

허윤은 우선 이 자를 자극하여 실력을 가늠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함부로 판단했다가 낭패를 본다면 자신의 위치로 보았을 때, 본파의 수치가 될 수도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국수를 한 젓가락 들어 후루룩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이보시오, 주인장. 아무리 새벽부터 온 손님이라지만 이리 형편없는 국수를 가져오면 어쩌자는 말이오?”

허윤이 트집을 잡기 시작하자, 수하인 두 사내 역시 젓가락을 요란스럽게 내려놓았다. 어제의 일 때문에 겁이 더럭 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부당주가 옆에 있으니 안심이 되었다. 굳이 따라온 것도 운선이 당하는 모습을 구경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아무래도 너무 이른 시각이라 육수가 덜 끓은 것 같으니 오후에 다시 오십시오.”

그러나 운선은 화를 내기는커녕 세상 공손하게 사죄를 했다. 허윤은 상대가 만만치 않음을 느끼고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주인장, 혹시 마늘을 빼먹은 것 아닙니까?”

허윤은 왼손바닥을 쫙 펴며 운선의 얼굴에 바짝 가져다 대었다. 피가 묻어 벌써 반쯤 삭은 마늘 네 개가 역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도대체 고대산파와 무슨 관련이 있길래 이 진흙탕에 끼어들었을까?”

본색을 드러낸 허윤은 이제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운선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저 평범한 촌부인 줄 알았더니 태연하게 연극을 하는 것을 보면 꽤 대단한 뒷배라도 가진 모양이었다.

“그저 잔돈을 돌려드리러 갔을 뿐, 개인적인 은원은 없습니다.”

이미 불고 있는 국수를 내려다보며 운선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정성스럽게 대접한 음식이 쓰레기 취급을 받으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이 망할 자식이, 계속 헛소리나 지껄일 테냐?”

어제 가장 치욕을 맛봤던 눈 찢어진 사내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빽 질렀다. 부당주 앞이라 조심하고 있었으나 계속 모르쇠로 일관하는 운선이 퍽 고까웠다.

“미안하지만, 내가 이들을 부리는 처지로서 참견을 안 할 수가 없겠습니다.”

허윤은 다시금 공손하게 손을 모아 읍하더니, 금세 표독한 표정으로 안면을 싹 바꿨다. 나름 높은 직위를 가진 자신이 다짜고짜 공격부터 한다면 체면이 서지 않았기에 상대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려 한 것이었다. 이쯤 했으면 충분히 예의를 차린 셈이었다.

“꼭 이러셔야 합니까?”

되도록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서문의 당부가 있어, 운선은 싸우고 싶지 않았다. 허나, 상대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운선은 나름의 준비 동작이랍시고 두 손을 어정쩡하게 가슴 근처로 가져갔다.

‘허허, 저놈 설마 외공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것인가?’

마세풍의 미간에 주름이 잔뜩 잡혔다. 조무래기들이야 내력만 조금 보여 주어도 알아서 겁을 먹고 후퇴하겠지만 저 원용당의 부당주라면 해당이 없었다. 그는 내외공이 모두 뛰어난 자로, 운선의 약점을 한눈에 알아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허윤은 운선의 얼굴에서 망설이는 빛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자, 바로 오른손에 장력을 가득 모았다. 용수장은 비록 5절의 단조로운 초식이지만 한 장, 한 장의 위력이 대단했다. 특히 그는 두 절 이상의 초식을 함께 양손에 각각 사용할 수 있었는데 그리하면 평소 위력의 세 곱절이 넘었다.

“용수장 3절!”

그는 조용히 중얼거리며 바로 내력을 끌어올려 손바닥으로 보냈다. 검지와 소지만 사용하여 수인(手印)을 만든 그는 손목을 반대편으로 꺾으며 그대로 장력을 방출했다. 보통 다른 내공의 출수보다 훨씬 속도감이 있었기에 운선이 자각했을 때는 이미 가슴팍까지 장력이 불어닥친 참이었다.

“헉!”

윤설은 당황하여 주먹을 꽉 쥐었다. 운선의 내공이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그것을 방출하는 방식도, 상대의 내력에 방어하는 방식도 전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피하지 못한다면 내상까지는 아니더라도 갈비뼈가 족히 몇 개는 부러질 것 같았다.

“괜찮다.”

반면 마세풍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두 사람의 대결을 관망하고 있었다. 그는 이번 첫 출수는 운선이 쉬이 피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았다.

“저 녀석 발의 방향을 좀 보아라.”

노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운선의 발이 팔(八)자로 벌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윤설은 그제야 마음이 놓여 가슴을 쓸어내렸다.

‘상당히 과격하고 악랄하구나.’

눈치가 빠른 운선은 허윤의 손가락 수인을 보고 장력의 방향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충분히 흘려보낼 수 있다고 자신했음에도 손가락 한 마디 차이로 비껴가자 순간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번에는 피하기 쉽지 않겠는걸.’

그의 오른팔은 일상생활에 무리가 없을 정도로 다 나았으나 혈맥이 상한 지 오래되어 평생 검을 쥘 수는 없다고 했다. 하여, 장력은 배울 엄두도 내지 못했다.

“태을신공을 다 익히거든 왼손으로 검을 배우도록 하자.”

성곤도 그 부분이 못내 아쉬웠으나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럼 평생 장풍(掌風)은 배우지 못하는 것입니까?”

태을신공의 태일장(太一掌)이야말로 외공의 정수였기에 운선은 미련이 한참 남았다.

“안 된다. 권풍(拳風)이라면 모를까…….”

성곤은 안쓰러운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장력을 쓰려면 팔이 내력을 충분히 버텨 줘야 하는데 한쪽 팔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다음은 피하기 쉽지 않을 것이오.”

허윤은 두 번째 장력을 출수하기 위해 양손을 움직였다. 2절과 3절을 같이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두 장력이 맞붙어 휘몰아치는 기운과 터뜨리는 힘이 더해졌다. 만약 적중하게 되면 단전을 폐할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무공이었다.

“이런…….”

운선은 바짝 긴장했다. 상대의 준비 동작만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우리란 예감이 들었다. 아까는 몸만 돌려서 흘려보냈지만, 두 번째는 어림없었다. 출수와 동시에 뻗어오는 속사포 같은 장력을 피할 도리가 없자 이번에는 두 손을 모아 운기조식의 자세를 취했다. 남들이 볼 때야 뜬금없었으나 윤설은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챌 수 있었다.

“신공의 기운을 방출하여 장력으로부터 단전을 보호하려는 것이군.”

이것이 최선이긴 했으나 참으로 무식한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 상대의 내력이 조금만 높아도 내상을 피하기 어려웠다.

“아무래도 내가 나설 차례구먼.”

마세풍의 얼굴에 둥실 만족스러운 웃음이 스쳤다. 운선에 대한 평가는 이만하면 충분하였다.

휘익!

허윤이 두 손을 앞으로 쭉 뻗는 순간, 한 줄기 바람이 두 사람 사이로 훅 불어닥쳤다.

“당신!”

마세풍이 들고 있는 것은 아궁이에 바람을 넣는 골풀무였다. 허윤은 도중에 끼어든 노인에게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그의 실력 또한 가늠할 수 없어 인상만 구기고 있을 뿐이었다.

“어르신, 뭐 하시는 겁니까?”

운선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하자, 마세풍이 손을 마구 휘두르며 그를 불러들였다.

“자네에게 신세도 갚을 겸, 내 뭐 하나 가르쳐 주려고.”

“네?”

운선이 머뭇거리며 그쪽으로 이동하자 여태 점잖은 척하던 허윤의 얼굴이 험상궂게 변했다. 제대로 무공을 익힌 것 같지도 않은 자에게 본당 제자들이 당한 것도 열 받는데, 웬 노인이 끼어들어 자신을 무시하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원용당이라면 나름 이름있는 문파인데, 설마 이까짓 일에 노인을 패려고?”

마세풍은 계속 빙글빙글 웃으며 허윤을 놀려댔다. 그들이 유일하게 가진 약점이 강호에서 어엿한 문파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임을 잘 알고 있기에 일부러 자극하는 것이었다.

“흥!”

아니나 다를까, 허윤은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볼 뿐 별다른 공격은 하지 않았다. 무슨 꼼수를 부리든, 차 한 잔 마실 시간이면 이 촌놈과의 대결이 끝날 것이었으므로.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괜히 재촉했다가 저 노인이 엄한 소문이라도 낸다면 원용당의 악명만 더 높아질 것 같으니 조심하는 것이 더 나았다.

“자네 권풍을 배워볼 텐가?”

“네?”

노인의 뜬금없는 질문에 운선은 어안이 벙벙했다. 급작스럽게 대결에 끼어들어서는 뭘 가르쳐주겠다는 건지, 아무래도 나이가 너무 많아 노망이라도 난 모양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