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逢危須棄(봉위수기)
황석산은 경국에서도 남쪽에 있어, 이제 막 봉우리에 단풍이 들기 시작했다.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단영봉(丹影峰)은 달빛에 비친 단풍이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니만큼 가을밤 절경으로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 이곳에 온 고유생은 단풍을 구경할 마음이 전연 없었다.
“좀 늦으셨습니다.”
헉헉거리며 뛰어온 고유생을 내려다보는 조양의 얼굴에는 짜증이 잔뜩 섞여 있었다. 먼저 와서 기다리지는 못할망정, 무려 한 시진 넘게 약속을 어기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고대산파에서 온 이들을 접대하느라 늦었습니다.”
고유생 역시 불쾌한 기색을 보이며 대답했다. 아무리 맹주라고 하나 나이로 따지면 자신보다 네댓 살은 어린 그가 고압적인 태도로 대하는 것이 영 마땅치 않았다.
“그 어린애들을 굳이 직접 맞이할 이유가 있습니까? 사실 고선배님이야말로 장문인과 마찬가지 아닙니까?”
눈치가 빠른 조양은 고유생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읽고는 태도를 싹 바꿨다. 어쨌든 운평표국의 일을 진행하려면 황석파의 비위를 최대한 맞춰야 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만나자 하였소.”
바위에 걸터앉은 고유생은 선뜻 이유를 말하지 못하고 입맛만 쩝쩝 다셨다. 무려 반년을 넘게 미루다 겨우 성사된 일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계획을 전부 갈아엎어야 할지도 몰랐다. 마세풍은 태을신교보다 더 큰 장애물이었다.
“사형이 운평표국의 일에 관여할 모양이외다.”
“으음…….”
조양의 입에서 거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일이 커지지 않도록 조심했건만, 그 깜찍한 늙은이가 어찌 알았단 말인가?
“우리 황석파는 아무래도 손을 떼야 할 듯싶소.”
고유생은 조양의 눈치를 보면서도 결국 불편한 말을 입 밖으로 내고 말았다. 사실 그는 조양과의 약속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이 벌인 일을 마세풍이 안다면 그 자리에서 머리통이 부서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될 말입니다.”
조양은 최대한 다그치지 않고 침착하게 설득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역시 황석파에서 마세풍의 존재가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고유생은 자존심이 세고 허세 가득한 늙은이였으나 유독 자신의 사형에게는 한없이 비굴하고 나약했다. 아무리 겁을 준다고 해도 그의 마음을 돌리기란 쉽지 않을 것이었다.
“송림표국에서 서이국(西夷國)에 보내기로 한 여인이 백이었습니다. 또한 려국의 보물도 포함되었지요. 그 일이 실패한 후, 운평표국에 세 곱절로 책임이 전가된 것입니다. 그마저도 태을신교의 기습이 있을까 살피느라 다시 반년이 걸렸습니다. 더는 미룰 수가 없단 말입니다. 심지어 보름 뒤에 보내야 하는 인원만 삼 백입니다. 이번 일에 실패하면 경국에 막대한 피해가 가는 것은 물론 이 일에 관여한 오대산검 역시 책임을 피하기 어려울 테지요.”
조양의 말이 계속될수록 고유생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려국과의 전쟁에 참여한 대가로 재물과 명성을 얻었으나 한편으로는 그것이 덫이 되어 황실의 일을 도울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번 일도 기실 꺼려졌으나 쉬이 발을 뺄 수도 없었다.
“그러니 고대산파를 왜 끼워 넣은 것이오?”
가슴이 답답해진 고유생은 이제 조양의 탓을 해보았다. 무공 실력도 미천한 애들이 온갖 문파의 표적이 되었으니 소문이 나지 않을 리가 만무했다. 오죽하면 황석산 골짜기에서 숨어 사는 마세풍까지 눈치챘을까?
“황제께서는 송림표국의 일처럼 될까 염려되니 반드시 오대산검의 호위가 따라붙으라 명하셨습니다. 일이 잘되면 다행이고, 아니 되더라도 서이국에게 변명할 여지가 있으니 좋은 계책이었지요. 어찌 미천한 제가 감히 항명(抗命)하겠습니까? 다만, 고대산파의 이들은 일을 당하여도 뒤탈이 없으니 적격이다 싶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조양 역시 그들이 실력이 이토록 형편없는지 미처 몰랐다. 어찌 보면 묘수라 생각했던 계책이 패착이었다.
“그럼 이를 어찌한단 말이오?”
조양 역시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오늘따라 달빛이 휘영청 밝은 것이, 심란한 마음을 더 헤집어 놓는 것 같았다.
“우선, 제가 마장문을 만나보겠습니다.”
“허허.”
마세풍이 조양을 어찌 생각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고유생은 자신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설득은커녕 서로 치고받고 싸우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운선이 객잔으로 돌아오니 이미 한밤중이었다. 사백님과 만나기로 약조한 시각이 한참 넘었으니 분명 불호령이 떨어질 터였다. 운선은 눈치가 보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쭈뼛쭈뼛 객잔 안의 동태를 살펴보았다.
“운선아!”
“헉!”
뒤에서 어깨를 쿡쿡 찌르기까지 운선은 전혀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화들짝 놀라 방어 태세를 갖추고 뒤를 돌아보니 이서문이 자신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대사형!”
그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바로 예의를 갖춰 서문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와는 이미 성곤과 함께 만난 적이 있었다. 무림대회에서 봤을 때부터 그 기지와 용기에 감탄했던 터라, 곧 허물없이 친한 사이가 되었다. 지금은 그로부터 반년이 더 지났으므로 그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떻게 대사형께서 오신 겁니까?”
“너와 설이가 이곳에서 정찰한다고 하여 일부러 보러 왔다.”
서문은 오랜만에 만난 운선이 귀여워, 두어 번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두 사람이 한담을 나누며 객잔 안으로 들어서자 윤설이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총총 걸어 나왔다. 그녀 역시 대사형을 퍽 좋아하기에 평소보다 한층 신나 보였다.
“일은 어찌 되어가고 있어요?”
윤설의 물음에 서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운평표국은 경계가 삼엄하고 내부가 미로 같아 침입이 쉽지 않구나. 미리 잠입한 우리 편과 소식을 주고받는 것조차 힘이 드니 걱정이다.”
세 사람은 등불 하나를 탁자 가운데 두고 앉아 실의에 빠졌다. 이번에는 려국인 삼 백의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다.
“새로 알아낸 것이 있느냐?”
“강호에 내로라하는 자들이 표사로 지원하는 것 같지만, 오대산검 중에는 유일하게 고대산파의 여섯 명만 이곳을 지났어요. 분명 여기를 지나지 않고는 황석파로 갈 수 없을 텐데요. 조양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네요.”
윤설의 대답에 서문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설마 고대산파를 희생시키려는 것은 아니겠지?”
“그게 무슨…….”
눈이 휘둥그레진 운선을 보자 서문은 괜한 이야기를 한 듯싶어 서둘러 자신의 말을 부정했다.
“그저 추측일 뿐이니 마음 쓰지 말아라. 그나저나 혹시 오늘 이곳에서 다툼이 있었더냐?”
운선과 윤설은 차마 대사형을 속일 수 없어 서로 마주 보고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어쨌든 정찰의 임무를 맡은 그들이 정체가 탄로 날 위험을 무릅쓰고 일을 벌인 것은 잘못이었다. 운선이 면목이 없어 머리만 긁적이고 있자 서문이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운선아, 너는 정말 거짓말을 못 하는구나. 네가 사고 쳤다는 것쯤은 얼굴에 다 쓰여 있다. 또한, 마당에 여전히 핏자국이 있고 너의 인피면구가 이리 상했는데 어찌 모른 척을 하겠느냐? 이쯤 되면 털어놓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듯싶구나.”
반년 전, 고대산파의 멸문에 앞장섰던 서문이었다. 그들을 도왔다는 것을 알면 그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망설여졌다. 눈치가 빠른 윤설은 결국 자신이 나서야 함을 깨달았다. 그녀는 간략하게 낮에 있었던 일을 설명한 후, 이렇게 덧붙였다.
“원용당의 무뢰배들은 아주 형편없는 이들이었어요. 오라버니를 부추긴 것은 저이니 화내실 거면 저에게 뭐라 하세요.”
서문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어떤 상황이었을지는 보지 않아도 짐작이 되었다.
“운선아, 내 비록 고대산파가 멸문하는 데 일조했으나 개인적인 원한은 없다. 우리 태을신교의 일곱 제자는 나를 제외하고 모두 전쟁고아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특히 고대산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이는 적우였지. 그러나 그 역시도 같은 상황이었다면 너처럼 행동했을 것이야.”
오대산검을 쓸어버리는 것이 태을신교의 숙원이었으나 일 년 전, 고대산파를 기습한 일은 서문에게도 큰 아픔이었다. 그리 경고를 했건만, 떠나지 않고 본당을 지킨 이들은 대부분 어린 제자들이었다. 마지막에 숨을 헐떡이는 몇몇을 살린 것은 오롯이 서문의 죄책감 때문이었다.
“허나, 원용당의 사람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으니 나중에 큰 문제가 될 것 같구나. 아무래도 이 객잔은 자리를 옮겨야겠다.”
서문은 엄숙한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다음 일을 차근차근 알려 주었다. 자신의 제자들이 일을 당한 것을 알면 원용당의 당주가 직접 나설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오대산검의 웬만한 고수와도 맞먹는 실력자로, 지금의 운선이라면 혼자 당해내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자신이 남아 상대하기에는 정체가 들통날 수 있었다. 일단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너의 신공이 이미 3단계에 들어섰지만, 아직 외공을 쓰지 못하니 고수와 상대하면 무조건 불리하단다. 또한, 인피면구가 이미 상하여 더는 사용할 수 없으니 네 얼굴을 아는 이라도 만나면 귀찮아지지 않겠느냐?”
평소 서문의 혜안을 존경하는 운선으로서는 그의 말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벌써 새벽이 오는지 천천히 주변이 밝아지고 있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슬슬 조바심이 났다.
“대사형, 아침이 되기 전에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가능하면 열흘 뒤 해금 객잔에서 다시 만나요.”
서문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와락 끌어안았다. 제대로 정을 나눌 시간도 없었으나 늘 애틋하고 안쓰러운 아우들이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새벽닭이 울기 전, 세 사람은 아쉬운 마음을 안고 헤어졌다. 운선은 언제 또 그의 얼굴을 볼지 알 수 없었기에 한참 동안 마음이 뭉클하였다.
“오라버니, 이럴 시간이 없어요. 저도 원용당 당주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아주 잔인한 놈이랍니다.”
윤설은 언젠가 들었던 소문이 생각나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무공은 전혀 할 줄 몰랐지만 웬만한 강호인들보다 식견이 넓고 무학에 능했다. 하여 원용당의 용수장이 제대로 임자를 만났을 때 얼마나 무시무시한 무공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국수 한 그릇은 말아먹고 출발하자꾸나.”
운선은 밤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자신을 기다렸을 윤설에게 미안하여 따뜻한 국수라도 말아주고 싶었다. 당분간 또 고생일 텐데 그녀의 건강이 걱정이었다. 윤설은 어릴 때부터 몸이 아주 약해 삐쩍 마르고 늘 기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요, 그들도 새벽부터 들이닥치진 않겠죠.”
운선의 마음에 감동한 윤설은 배시시 웃으며 탁자에 앉았다. 할아버지의 음식 솜씨는 형편없었으나 운선의 국수는 입 짧은 그녀도 두 그릇은 족히 먹을 정도로 훌륭했다. 게다가 자신을 위해 정성껏 끓여준다니 한 젓가락이라도 꼭 먹고 싶었다.
“그거 나도 한 그릇만 다오.”
이제 막 일어났는지 부스스한 백발을 한 손으로 벅벅 긁으며 단골손님이 들어섰다. 윤설은 기가 막혀 당장이라도 그를 내쫓고 싶었으나 운선은 사뭇 반가운 마음에 종종걸음으로 뛰어나갔다.
“어르신, 안 그래도 인사를 못 드리고 가 아쉬웠는데 잘 되었습니다.”
“엥? 설마 가게가 망했나?”
마세풍은 울상이 되어 운선의 손을 덥석 잡았다. 새벽에 이 국수 맛이 생각나 부랴부랴 산에서 내려온 그였다. 십여 년 만에 만난 맛집을 이렇게 잃을 수는 없었다.
“사정이 그리되었습니다. 대신 오늘은 곱빼기로 말아드릴게요.”
운선은 얼굴에 서운함이 가득한 노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거듭 사과의 인사를 했다. 햇빛이 제일 잘 드는 탁자 앞으로 안내한 다음 큰 솥에 육수를 끓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재료를 아끼지 않고 최고로 맛있는 국수를 만들 생각이었다.
“에이, 이게 다 고유생 그 머저리 때문이다.”
마세풍은 자기만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리며 혀를 끌끌 찼다. 그들이 왜 객잔을 버리고 떠나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고대산파 병아리들을 구하도록 부추기지 말 걸, 후회가 막급이었다.
“어르신, 국수 여기 있습니다.”
김이 모락모락한 국수에는 평소보다 닭고기가 곱절로 많았다. 왠지 마음이 찡하여 마세풍은 코를 훌쩍 들이마셨다.
“어이구, 더러워. 어르신, 오늘은 특별히 저도 같이 먹어요.”
윤설이 어느새 다가와 자신의 국수 그릇을 그의 앞에 탁 놓고 앉았다. 미운 정이 들었는지 앞으로 노인을 못 본다 생각하니 그녀도 영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동안 구박해서 미안했어요.”
윤설이 국수 그릇에 코를 박고 웅얼거리자 마세풍은 되레 투덜거렸다.
“흥, 자네는 심보를 곱게 써야 해. 안 그러면 오라비가 자네를 여인으로 봐주겠는가?”
“네?”
윤설은 노인의 말에 정곡이 찔리자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렇게 남매인 척, 연기했는데 어찌 알았는지 신통할 뿐이었다.
“눈깔이 달라! 오라비를 바라보는 눈깔이 퍽 애틋하더란 말이야.”
마세풍이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어대자, 윤설은 슬슬 기분이 상했다. 분위기에 휩쓸려 겸상을 한 자신이 새삼 원망스러워졌다.
“우리도 국수 한 그릇씩 주십시오.”
그때였다. 옥색 도포를 입고 머리를 바짝 올려 묶은 귀공자가 객잔으로 들어섰다.
“오늘은 장사하지 않습니다.”
운선이 한껏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자, 사내가 태연히 노인 쪽을 가리켰다.
“그럼, 저기서 국수를 먹는 이들은 무엇입니까? 손님을 차별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우리 일행이 셋이니 세 그릇 말아주십시오.”
그가 신호하자, 이번에는 푸른 옷을 입은 사내 둘이 객잔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아?”
윤설은 우려했던 일이 일어난 것에 당황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제 이곳에서 한바탕 소란을 일으켰던 두 사내, 마늘을 손에 맞고 하얀 천을 칭칭 감은 그들이었다.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원용당의 부당주(副堂主) 허윤입니다.”
운선은 그제야 큰 싸움을 피할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 봉위수기(逢危須棄):
위험을 만나면 과감히 돌을 버린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