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43화 (43/209)

#43화. 早知若此(조지약차)

마세풍이 현문을 통해 들어오자 황석파의 제자들은 깜짝 놀라 정신이 쏙 빠졌다. 평소에는 얼굴도 제대로 보기 힘든 장문인이었다. 일 년에 한두 번, 기제(祈祭)가 있을 때만 잠깐 참석했다가는 바람처럼 사라져, 생사만 겨우 확인하는 수준이었다. 오죽하면 황석산 산신령이 됐다는 소문까지 있을 정도였다.

“문주님, 어쩐 일로…….”

당황한 제자 하나가 뒤를 종종 따라왔으나 마세풍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영준을 이끌고 곧바로 대청으로 향해서는 쿵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문을 열어젖혔다.

“아니, 문주님!”

열두 명의 장로들과 운평표국의 일을 논의하던 고유생은 급작스럽게 마세풍이 들이닥치자 너무 놀라 의자에서 벌러덩 자빠지고 말았다. 그는 강호 사람 모두가 벌벌 떠는 무림 맹주 조양도 우습게 보았으나 자신의 사형이자 황석파의 장문인만은 세상 무서웠다.

“어쩐 일로…….”

열두 명의 장로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여 읍(揖)하자, 마세풍은 못마땅한 얼굴로 그들을 쭉 훑어보았다. 내들 탁상공론에 빠져 시간만 축내고 있는 이들이 황석파를 이끌고 있다는 게 여간 창피하지 않았다.

“고유생!”

“아이고, 네 문주님.”

마세풍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고유생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그의 앞으로 기어 나왔다. 일전에 황석파의 장로들을 만난 기억이 있는 영준은 황망하기 그지없었다. 태사부 신양선 앞에서도 거만하기 이를 데 없었던 고유생이 아니었던가?

“어찌 이번 일에 고대산파까지 동원한 것이냐?”

마세풍은 일절 사문의 대소사에 관여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고유생은 갑자기 그가 이 일을 어떻게 알았나 의아했으나 뒤에 뻘쭘하게 서 있는 영준의 모습을 보고는 아차다 싶었다.

“제가 아니라 조맹주의 의견이었습니다.”

“뭐?”

조양의 이름이 나오자 마세풍의 얼굴이 새삼 일그러졌다.

“우리 황석파가 언제부터 조뭐시기 놈에게 쩔쩔매는 꼴이 되었더냐?”

마세풍은 어찌나 화가 났는지 짧은 턱수염까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무림의 일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으나 영악한 도둑놈이 성인군자인 척하며 무림인들을 쥐락펴락하는 양은 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양과 일전이라도 벌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게 아니라 태을신교가 운평표국을 노린다는 첩보가 있어…….”

고유생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우물거리자, 보다 못한 허장로가 대신 나서 사정을 설명했다. 마세풍은 한참 동안 그를 고까운 눈으로 노려보더니, 다음에는 열두 명의 장로들을 한 명 한 명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태을신교 놈들이 왜 운평표국을 노리는지는 알고 있는 거냐?”

그러고 보니 장로들은 그에 관해 들은 바가 없었다. 당황한 그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바닥에 엎어져 있는 고유생 쪽을 향했다.

“그건, 여기서 말하기에 좀…….”

고유생이 벌게진 얼굴로 더듬더듬 변명하자 마세풍의 눈이 점점 더 가늘어졌다.

“네가 공명심에 눈이 멀어, 벌이는 짓거리에는 관심 없다. 다만 우리 사문의 이름을 파는 것은 용서치 않겠다.”

서슬 퍼런 장문인의 호통에 황석파의 장로들은 모두 바닥에 넙죽 엎드려 일어날 줄을 몰랐다. 그의 괴팍한 성정을 잘 아는 고유생은 조양과의 담합이 탄로 날까 봐 그저 착잡한 마음이었다. 일단 그가 참견한다면 일을 그르치는 것은 자명했다.

‘이거 곤란하게 되었구나.’

사제들의 모습을 한심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마세풍은 뒤에 서 있는 영준의 손을 잡아끌더니 바람같이 대청 밖으로 나섰다. 대청 앞을 가로지르는 계단 앞에는 어느새 붉은 장명등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마치 검은 강물에 붉은 연꽃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마세풍은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불쾌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어 손으로 가슴을 쿵쿵 내리쳤다. 이도 저도 보기 싫어 도망친 자신이 이 사달의 시작인 것을 본인도 모르지 않았다.

“얘야, 나머지 아이들이 오기 전에 우리끼리 요기나 하자꾸나. 아까 국수를 한 그릇 덜 먹었더니 많이 시장하구나.”

언제 그랬냐는 듯 영준을 돌아보는 그의 얼굴에는 다시금 웃음기가 잔잔하게 번졌다.

자신들의 손에 구멍을 만들어 놓은 이가 태연자약하게 거스름돈을 운운하니 원용당의 두 사내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기껏 객잔이나 하는 촌부가 뭐 그리 대단하겠냐는 생각에 미치자, 그들은 다른 손으로 검을 옮겨 잡았다. 대사형은 상대를 얕잡아 보다가 불시에 당한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좌우로 나눠서 치고 들어가자.”

두 사람은 눈짓을 주고받더니 곧바로 양쪽으로 나누어져 청년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고대산파 제자들에게야 몇 초식이 필요치 않았기에 이번에야말로 원용당의 내전 검법을 제대로 구사하는 셈이었다.

“말로 좀…….”

청년은 곤란한 얼굴로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두 사람을 마냥 지켜보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그의 목숨이 위험할 것 같아 인경은 손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감히 어디라고 끼어들어?”

좌측으로 달려든 사내가 먼저 일격을 날렸다. 그의 검은 상대의 오른쪽 어깨를 겨냥했는데 날개뼈에서 겨드랑이 방향으로 베는 동작이 퍽 예리했다. 만약 제대로 맞는다면 팔이 완전히 떨어져 나갈 터였다.

그러나 예상 밖의 상황이 펼쳐졌다. 멀뚱히 바라보던 청년은 검 끝이 어깨 근처에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뒤로 딱 반 발자국 물러서며 검 끝을 툭 쳐냈다. 매우 가벼운 동작 같았으나 검은 묵직한 탁음을 내며 수 장 밖으로 튕겨 나갔다.

“어?”

검을 놓친 사내가 당황한 사이, 이번에는 우측에서 또 다른 검이 청년의 왼쪽 허벅지를 찔러 들어왔다. 용호검법의 정수인, 용족지갑(龍足指甲)의 초식이었다. 그는 무리 중에서 검을 다루는 데에는 대사형보다 나았으므로 절대로 실패하지 않으리라 자신했다. 게다가 상대는 방금 오른쪽 어깨 쪽에 공격을 받은 직후이므로 왼쪽은 아예 무방비 상태였다.

“다리를 끊어주마!”

그러나 청년은 이번에도 당황하지 않고 다리를 살짝 비틀더니 무릎으로 검을 툭 쳐냈다. 두 번째 사내의 검 역시 허무할 정도로 쉽게 튕겨 나가 버렸다.

“네 이놈! 무슨 조화를 부린 것이냐?”

그들의 눈에는 그저 청년이 운이 좋아 검을 피한 것으로 보였다. 보기보다 몸이 날래고 맷집이 좋은 녀석일 뿐, 자신들보다 실력으로 우위에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어디 이것도 피해 보아라.”

두 사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양손으로 기를 모았다. 원용당은 사실 검법보다는 장법으로 이름을 날린 문파였다. 용수장(龍手掌)만으로도 웬만한 강호인들은 손쉽게 처리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문주님, 아무래도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이라도 도망갑시다.”

고대산파의 제자들은 청년이 당할까 봐 노심초사였다. 그들이 믿을 사람은 오직 저 이밖에 없는데 영 실력이 미심쩍었다. 차라리 이 기회를 틈타 황석산으로 달려가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인경의 생각은 달랐다.

“은인을 두고 도망갈 생각은 없다. 가려거든 너희만 떠나라.”

그는 세 사람의 대결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그의 목숨이 위험하다면 언제든 달려가 대신 감당할 작정이었다.

“이쯤 해서 그만두지요.”

청년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용수장을 막 출수하려는 이들 쪽으로 성큼 다가섰다. 그는 양손을 감아쥐어 주먹을 만들더니 각각 두 사내의 손 사이로 찔러 넣었다. 그러자 막 뭉쳐진 기의 덩어리가 허무하게 으스러지고 말았다.

“어라?”

“세상에!”

두 사내는 너무 놀라 멍하니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십여 년 넘게 용수장을 익혔지만, 모아놓은 장력을 이리도 쉽게 와해해 버리는 이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제야 그들은 상대가 어마어마한 내력을 가진 고수임을 알았다.

“저는 저분들에게 볼일이 있으니 자리를 좀 비켜 주시겠습니까?”

청년은 언제 싸웠냐는 듯, 두 손을 예의 바르게 모으더니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원용당의 사내들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쪽 돋았다.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더니 혈이 막혀 움직이지 못하는 사형을 서둘러 둘러메고는 빠르게 숲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감사합니다. 은인의 은혜를 어찌 갚을지…….”

고대산파의 제자들은 청년의 앞으로 달려와 이마를 땅에 대고 크게 절을 했다. 특히 인경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할 지경이었다.

“아닙니다. 국숫값을 너무 많이 치르셔서 돌려주러 왔을 뿐입니다.”

인경은 감개무량하여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존함이라도 알려 주신다면 반드시 이 은혜를 갚을 것입니다.”

그러자 청년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마구 내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그저 객잔을 운영하는 촌부일 뿐이니, 정 마음에 걸리시거든 오다가다 국수나 먹으러 들러 주십시오.”

아무리 사양해도 소년들이 일어서지 않자, 청년은 머쓱해져서 머리만 긁적이고 있었다. 원하지 않는 상황을 어찌 피해야 할지 난감한 표정이었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는 것이 곧 밤이 될 것 같았다. 청년은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뭔가 생각났는지 자신의 머리를 한 대 세게 쥐어박았다. 그러더니 인경의 손을 억지로 펼쳐 잔돈을 올려두고는, 왔던 길로 냅다 뛰기 시작했다.

“저기, 존함이라도!”

인경이 뒤늦게 깨닫고 뒤쫓아갔으나 어찌나 걸음이 빠른지 청년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아쉬운 마음에 다시 객잔으로 돌아가 볼까 했으나 그렇다고 해도 쉬이 이름을 알려줄 것 같지는 않았다.

“문주님, 혹시 보셨습니까?”

“보았다.”

인경은 은밀히 옆으로 와 속삭이는 사제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청년의 피부가 손가락 반 마디 이상 붕 떠 있는 것을 그 역시 보았다.

“인피면구로 정체를 숨긴 것이 영 수상합니다.”

“수상하게 보았다면 우리가 하는 양이 제일 수상하지 않으냐? 은인을 함부로 의심하지 말아라. 돌아갈 때 다시 들러 꼭 인사를 드리자꾸나.”

인경은 청년이 돌아간 길 쪽을 보며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길게 인사했다.

***

노인이 객잔을 떠나고 나서도 한참, 청년은 고민에 잠겼다. 소녀가 그런 오라비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더니 드디어 결심한 듯 말을 붙였다.

“할아버지가 눈에 띄는 행동은 삼가라고 했지만, 사람 목숨을 모른 체할 수 있나요? 후딱 해결하고 오면, 절대 모르실 거예요.”

“설아, 그 때문이 아니야.”

청년은 한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고대산파의 제자들이야.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

청년, 아니 운선은 자신에게 경전의 행방을 물으며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던 고근동의 얼굴을 떠올렸다. 절벽에서 뛰어내릴 때의 그 절박한 심정은 누구도 결코 헤아릴 수 없으리라.

“그래도 이대로 괜찮겠어요?”

윤설이 이토록 열심히 설득하는 이유는 고대산파 제자들에 대한 연민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객잔을 떠난 뒤로 줄곧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한 운선을 위해서였다. 말로는 관여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도 막상 그들이 위험에 빠지자 손에 쥔 마늘을 냅다 던진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위험하겠지?”

부정하려고 해도 노인의 말이 계속 마음속을 휘저었다. 대충 봐도 자신보다 서너 살은 어려 보이는 이들이었다. 원용당의 무뢰배들에게 목숨을 내주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나이였다.

“지금 따라가면 늦지 않을 거예요.”

윤설은 드디어 결심이 선 것 같은 운선의 표정을 보고는 싱긋 웃었다. 언젠가는 이 착한 성격이 발목을 잡을지 모르겠으나 이런 그의 심성이 마냥 좋았다.

“아! 정체를 들키면 절대 안 돼요! 아무리 인피면구(人皮面具)를 쓰고 있다 하지만 땀이 나면 티가 나니 조심하세요.”

윤설이 신신당부하는 소리를 등 뒤로 들으며 운선은 허둥지둥 객잔을 빠져나갔다.

***

*** 조지약차(早知若此)

일찍이 이와 같은 일을 알았더라면. 뒤늦게 후회함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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