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韜光養晦(도광양회)
고대산파의 제자들은 주춤주춤 등을 대고 가운데로 몰려섰다. 그나마 가장 실력이 나은 인경조차 당했으니, 그들끼리는 이 난관을 극복할 방법이 없었다. 항렬이라도 높은 제자들이었다면 매월 검진이라도 시도해 보겠건만, 그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햇병아리들이었다.
“쯧쯧, 저 겁먹은 얼굴들을 좀 봐. 미안한 마음이 드는걸.”
“뭐 어쩌겠나? 약육강식(弱肉强食), 강호가 원래 이런 곳인 것을.”
원용당의 제자들은 뭐가 그리 우스운지 자기들끼리 킥킥거리며 한담을 주고받았다. 딱히 공격할 모양새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쉽게 뚫고 나갈 정도로 허술하지 않았다. 인경은 사형제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대로 있으면 몰살이다. 어떻게든 한 명을 먼저 탈출 시켜 황석파에 도움을 구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렇다면,’
인경은 사형제들을 둘러보다 영준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무리 중에서 가장 검법에 능하고 경공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몸이 작고 날쌔니 저들의 촘촘한 포위도 뚫고 나갈 수 있을 듯싶었다.
“영준아.”
인경은 적들이 농담을 주고받을 때, 은밀히 영준의 옆으로 가서 속삭였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으나 인경의 방법이 그나마 유일한 계책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주님, 제가 어떻게든 도움을 요청하고 오겠습니다.”
영준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지만, 결코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그때의 그 지옥도에서도 살아남았는데 못할 일이 무엇이냐 싶은 마음이었다.
“너희를 해칠 마음은 딱히 없다. 그저 해심밀경소에 대한 정보만 넘겨준다면 목숨은 붙여주마.”
아까 객잔에서 손을 다쳤던 사내가 그들의 대장 격이었다. 그는 다른 이들이 실실거리는 와중에도 계속 인상을 쓰고 있었는데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고 오느라 극심한 통증을 느끼는 중이었다. 임무고 뭐고 얼른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
“우리는 그 경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허나, 어차피 믿지 않을 테니 긴말하지 말고 검을 들어라!”
인경이 스르륵 검을 빼 들자 다른 제자들도 약속한 듯이 한꺼번에 공격 태세를 갖췄다. 인경과 영준을 제외하고 죽음을 피해 도망친 적이 있는 나머지 제자들은 고대산파라는 이름에 대한 부채감이 있었다. 비록 실력이 뒤떨어져 이 자리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도망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쯧쯧, 명을 재촉하는구나.”
원용당의 제자들은 서로 눈짓을 보냈다. 처음에는 적당히 다치게 한 후, 모두 본당으로 끌고 갈 생각이었다. 허나, 굳이 반항하겠다니, 다 죽이고 장문인만 데려가는 것으로 계획을 바꾸기로 했다. 오히려 살인을 즐기는 그들에게는 이편이 더 나았다.
“상월검 1초식!”
인경의 외침과 동시에 여섯 명의 청년이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검을 앞으로 쭉 내질렀다. 검진을 만들지는 못하지만 동시에 같은 초식을 구사하니 방어 자세로는 완벽하여 빈틈이 없었다.
“오오.”
감탄의 탄성을 질렀으나, 그 또한 조롱에 가까웠다. 아무리 검법이 훌륭해도 구사하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인 것을. 초식을 진행하자 바로 몇몇 한심한 실력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원용당의 제자들은 딱히 공격 자세를 취하고 있지도 않았지만 손쉽게 두어 명의 검을 제압할 수 있었다.
“영준아!”
인경은 무리의 대장 쪽으로 성큼 나아갔다. 일부러 화려한 초식을 구사하며 뒤에 붙어 선 영준에게 신호를 보냈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빠져나가기 요원했다. 그들이 눈치채기 전에 포위망을 뚫는다면 승산이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어라?”
인경에게 집중하고 있었던 대장은 뒤에서 작은 소년이 튀어나와 황석산 방향으로 사라지자 사뭇 당황스러웠다. 아무래도 황석파에 도움을 청하려는 것 같은데 그들이 끼어든다면 임무는 대실패였다.
“저놈을 따라가서 죽여라!”
쉰 목소리로 냅다 소리를 지르자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수하 중 한 명이 명에 따라 후다닥 쫓아갔다. 다행히 경공이 뛰어난 추격자는 아니었으나 잡히면 영준의 목숨은 끝장이었다. 인경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쭉 흘렀다.
“나름 머리를 썼다만, 어림없지.”
잔머리에 당한 것이 영 마음 상했던 원용당의 제자들은 드디어 거세게 공격을 시작했다. 막상 그들이 죽이려 들자 인경의 무리는 초식 하나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방어에만 급급해졌다. 조금씩 벌어지던 원이 좁아지더니 이제는 서로 등을 맞댈 만큼 궁지에 몰렸다.
“저 건방진 놈 하나 말고는 모조리 죽여도 된다.”
무리의 대장이 외치자 나머지 제자들의 입가에서 비열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린 청년들이라 베는 즐거움은 없겠지만 오랜만에 보는 피 맛에 마음이 설레는 모양이었다. 운평 지역이 황석파의 권한이다 보니 외부에 나가지 않는 한 살인을 자유롭게 할 수 없었던 그들이었다. 혹여 도망친 쥐새끼가 요행으로 빠져나갈 수 있으니, 빨리 유희를 끝내야겠다 생각했다.
‘아, 정말 수치스럽구나…….’
인경은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장문인이라는 이유로 자신만은 죽이지 않을 것 같았다. 사형제들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 속에서 살고 싶다는 간절함을 느끼는 순간, 그는 강렬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것은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과 모멸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죽어라!”
그 사이 네 명의 사형제들은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고 있었다. 수적 우위는 전혀 의미가 없었다. 인경을 상대하는 이를 빼면 겨우 두 명이었으나, 네 명의 사형제들은 검 한 번 제대로 휘둘러보지 못하고 전의를 상실했다. 온몸에 자상을 입어 하얀 도복이 붉게 물들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나만!”
인경은 자신의 앞에서 빙글빙글 웃고 있는 사내를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나만 해치면 될 것 아니냐! 저들을 놓아준다면 너희가 원하는 것을 주겠다.”
“오오.”
대장은 다친 손이 영 저릿한지 손을 연신 흔들면서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야 말이 통하는구나. 그래, 경전에 대해 알긴 아는가 보네.”
그는 한쪽 입꼬리를 쓱 올리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일종의 버릇이었는데 얼굴을 움직일 때마다 ‘똑똑’ 관절 꺾이는 소리가 반복됐다. 그 소름 끼치는 소리에 인경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좋은 생각이다만, 이미 흥분한 내 사제들이 멈출 것 같지 않구나.”
“흐흐흐.”
사형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 사내는 고대산파의 제자들을 향해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대로 내리꽂으면 네 사람의 목숨은 끝이었다.
“안돼!”
쉭!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람을 뚫고 동그란 무언가가 쏜살같이 날아왔다.
“으악!”
캉!
원용당의 두 사내는 손에 느껴진 강렬한 통증 때문에 각자의 검을 놓치고 말았다. 인경이 암기가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수 장 너머에 검은 남자의 인영이 가물가물 흔들리고 있었다.
“당신은…….”
“네 이놈!”
이미 한 번 당한 적 있는 대장은 괴성을 지르며 검은 인영이 서 있는 쪽으로 빠르게 뛰쳐나갔다. 상대가 고수든 뭐든 이 치욕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의 초식은 주로 살인이 목적이기 때문에 상당히 단조로웠으나, 쾌검이었다. 순식간에 상대의 근저까지 도착해서는 무려 한 합에 수 개의 초식을 사용하였다. 만약 인경이었다면 생명이 위태로웠을 정도로 잔인하고 무자비한 출수였다.
“아, 진정을 좀…….”
그러나 검은 인영은 침착하게 상대의 초식을 전부 피해냈다. 종국에는 한 손만으로 찔러 들어오는 검 끝을 가볍게 잡아내는 것이었다. 기실 대장은 소스라치게 놀랐으나 애써 태연한 척 검을 쥔 손에 내공을 실어 뒤로 힘껏 잡아당겼다. 그러나 빠지기는커녕 이제는 손까지 징징 울려 검을 잡고 있기조차 힘들었다.
‘이놈이…….’
그는 다른 손으로 서서히 기를 모아 장풍을 날릴 태세를 취했다. 물론 다친 손이었기 때문에 전처럼 자유롭지는 않았으나 근거리에서 상대에게 타격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이런…….”
검은 인영은 원용당의 대장이 하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더니 검 끝을 놓아 버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한 손가락으로 상대의 단중혈을 꾹 눌렀다. 손바닥에 온 정신을 집중하던 대장은 불시의 공격에 당황하여 미처 피할 수가 없었다. 무방비한 상태로 혈이 눌려 그 자리에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망(忙)중에 죄송합니다.”
검은 인영의 남자가 어둠 속에서 서서히 걸어 나왔다. 숲 그림자를 벗어나자 드디어 그의 정체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당신은?”
고대산파의 제자들은 믿기지 않아 무심코 서로를 바라보았다. 객잔에서 내들 육수를 끓이던 못생긴 주인장, 무공이라고는 배워본 적 없는 몸짓의 청년이 머리를 긁적이며 자신들 앞에 서 있었다.
“거스름돈을 받아 가셔야지요.”
인경은 비로소 필생의 은인을 만났음을 깨달았다.
이 모퉁이만 지나면 황석산의 입구였다. 한 식경을 넘게 뛰고 있는 영준은 이미 한계를 넘어섰지만 조금도 멈출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이 한 발자국이 사형제들의 생사를 결정짓는다 생각하니 심장이 터질 것 같아도 참을 수 있었다.
“흥! 뛰어 봤자 벼룩이지!”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게, 원용당의 불한당과 영준 사이의 거리는 이제 한 장 정도에 불과했다. 경공은 더 나았으나 체력에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으악!”
당황한 영준은 그만 발밑을 보지 못하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다시 일어서서 뛰려고 했으나 왼발을 딛자마자 극심한 통증 때문에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제대로 접질린 것 같았다.
“어차피 잡힐 거, 좀 적당히 하지.”
뒤쫓아온 사내의 얼굴도 땀으로 범벅이었다. 그의 표정에는 짜증이 잔뜩 배어 나왔다. 어찌나 약이 올랐는지 영준을 향해서 계속 욕설을 퍼부어 댔다.
‘문주님, 면목이 없습니다.’
자신을 향해 무시무시한 얼굴로 다가오는 사내를 보며 영준은 하염없이 눈물을 떨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따위가 아니었다. 사문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 무능력한 자신에 대한 자괴감 때문이었다. 어렵게 살아남은 목숨으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이처럼 허망하게 지는 것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이놈!”
사내의 거칠고 무식한 손이 영준의 목덜미를 잡기 위해 쑥 들어왔다. 오직 숨통을 끊겠다는 의도로 뻗친 공격은 무자비하고 폭력적이었다.
딱!
“으억!”
사내는 갑자기 날아든 묵직한 나무 막대기에 호되게 손을 얻어맞고는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정신을 차리고 상체를 일으키니, 웬 땅딸하고 퉁퉁한 노인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빙긋이 웃는 것이었다. 얼굴이 낯이 익은 것이 아무래도 객잔에서 마주쳤던 그 노인인 것 같았다.
“여기서부터는 황석파의 구역이니 넘어오지 말게.”
노인은 사내의 넘어진 발 바로 앞에다가 막대기로 선을 쭉 그었다. 가볍게 긋는 것 같았으나 손가락 두 마디 정도로 흙바닥이 깊게 파였다.
“아니, 이 노망난 늙은이가!”
사내가 물색없이 또 욕설을 퍼붓자 노인은 혀를 끌끌 차며 막대기로 남자의 다리를 사정없이 두들겨댔다. 아무리 피하려 해도 귀신같이 쫓아가서 때리니, 마치 막대기에 눈이라도 달린 것 같았다.
“참으로 무식하고 예의가 없구먼. 얼른 썩 꺼지게!”
사내는 그제야 상대를 찬찬히 올려다보았다. 황석산 바로 아래, 노인의 독특한 외모. 문득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어, 그의 얼굴이 점차 붉어졌다.
“설마……, 당신…….”
“그래, 이제 알겠나? 여긴 내 구역이란 말일세!”
못마땅한 얼굴로 뒷짐을 지고 있는 그는 바로, 황석파의 장문 팔마도사(八魔導師) 마세풍이었다.
*** 도광양회(韜光養晦) :
자신의 재능이나 명성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기다린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