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勢孤取和(세고취화)
자신을 모욕하는 것은 아무래도 좋았지만 태사부의 이름이 오르내리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실력이 상대와 비교하여 턱없이 모자란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설혹 이 일로 크게 다치거나 죽는다고 하더라도, 태사부의 명성만은 지키고 싶었다.
“상월검 1초식.”
눈치를 보고, 상황을 잴 것도 없이 인경은 바로 상대를 찔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구사한 상월검은 비록 매월검법에서도 난도가 낮은 기본 초식이기는 했으나 어릴 때부터 연마하여 허점이 거의 없었다. 또한, 수개월 동안 각고의 노력을 다해왔으므로 이전보다 실력이 크게 진작되어 있었다.
“오오.”
원용당의 사내 둘은 어린 청년의 검이 예상외로 꽤 묵직해 보이자, 사뭇 당황스러웠다. 가까스로 자신들의 검을 뽑아 막기는 했지만, 무려 스무 걸음이나 뒤쪽으로 밀렸다.
“역시 문주님이시다.”
영준은 흐뭇한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르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 끔찍한 멸문의 밤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신을 살뜰히 돌봐주고 측근으로 끌어준 장문인이 그에게는 사부님보다 더한 은인이었다. 그래서 저 무뢰배 같은 놈들이 장문인을 욕할 때는 마치 자신이 들은 듯한 모욕감을 느꼈다.
“어쭈, 제법이네.”
한차례 인경과 합을 겨룬 원용당의 두 사내는 서로를 마주 보더니 싱긋 웃었다. 잠깐 놀라기는 했으나 역시 자신들의 상대로는 한참 모자랐다.
“자네는 좀 쉬어.”
둘 중에 눈이 찢어진 사내가 피식 웃더니 앞으로 한 발 나섰다. 다른 사내는 팔짱을 끼고 싸움을 구경할 태세를 취했다. 여차하면 나머지 놈들을 상대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장문의 실력이 이 정도라면 떨거지들이야 서너 합에도 처리가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어디 언제까지 그리 안하무인인지 두고 보자.”
인경은 코웃음을 치더니 이번에는 검을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꺾었다. 상월검 2초식의 준비 동작이었다. 앞선 초식이 찌르면서 상대의 중심을 무너뜨리는 것에 목적을 둔다면, 2초식은 베어 들어가면서 주요 혈을 노린다. 여기에 반월경의 내공을 더하여 찌른다면 상대의 기맥(氣脈)을 다 막을 수도 있었다. 다만, 인경의 실력은 여기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취우(驟雨)!”
좌우로 검을 어지럽게 흔들자 하나가 마치 수십 개의 검처럼 그림자를 만들었다. 비록 검기는 만들어 내지 못했으나 상대의 정신을 어지럽히기에 충분했다.
챙!
사내는 여러 개의 검 그림자를 무심히 보고 있다가 자신의 반경 안으로 상대가 들어오자 단번에 손을 쭉 뻗어 손목을 찔러왔다. 깜짝 놀란 인경이 검을 아래로 내려 막았으나 두 검이 크게 부딪치며 강한 진동을 느꼈다.
“내력의 차이가 너무 커…….”
두 사람의 싸움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점소이는 안타까운 마음에 혀를 찼다. 무례한 원용당의 무뢰배들이 졌으면 좋겠건만, 단 두 초식 만에 인경의 실력이 형편없음을 눈치채고 말았다.
“오라버니, 도와주면 안 되나요?”
소녀는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의 오라비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아까부터 싸움을 진지하게 지켜보고 있었는데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오대산검의 일에는 관여하고 싶지 않다.”
평소와 달리 오라비의 대답은 냉정하기 짝이 없었다. 소녀는 입술을 쭉 내밀며 투덜거렸으나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 아니었기에 더는 조르지 않았다. 하긴 자신들이 괜히 나섰다가 일이 커진다면 정체가 발각될 수도 있으리라.
“문주님!”
고대산파의 제자들은 십여 합이 지나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실력 차이가 월등했다. 그도 그럴 것이 원용당의 두 사내는 사실 그들의 문파 안에서도 실력으로는 장로급과 비견될 정도였다. 애초에 이들에게 시비를 걸었던 것도 다른 꿍꿍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여, 일부러 실력이 출중한 자들이 따라붙은 것이었다.
“아가야, 아무래도 장난은 이쯤에서 그만둬야 할 것 같구나.”
사내가 피식 웃으며 검을 들지 않은 손으로 작은 바람을 만들었다. 원용당의 절기인 용수장을 사용할 참이었다. 이미 검에 모든 신경을 쓰고 있는 인경으로서는 장풍을 막을 여력이 전연 없었다. 상대의 손에 기(氣)가 모이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무방비 상태였다.
“문주님, 조심하십시오.”
영준은 마음이 급해지자 인경을 구하기 위해 칼을 빼 들었다. 상월검의 초식을 사용하여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의도였다.
“이러면 반칙이지.”
평상에 앉아 여유롭게 쉬고 있던 또 다른 원용당의 사내가 어느새 다가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영준은 깜짝 놀라 몸을 비틀어 피하려 했으나 결국 일 장을 맞고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허허, 소문인 줄 알았더니만 정말 형편없구나.”
손바닥을 툭툭 털며 사내가 이죽거리자 더는 참을 수 없었던 나머지 제자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크게 다치는 한이 있더라도 이 치욕을 갚아주고 말겠다는 결심이 다섯 제자의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아이고, 저 일 장을 맞으면 갈비뼈가 세 개는 으스러지겠어요.”
소녀는 초조한 마음에 손톱을 물어뜯으며 중얼거렸다. 이미 손바닥에 가득 기운을 모은 상대가 인경을 향해 막 장풍을 뻗기 직전이었다. 사형제들은 구할 재간이 없으니 인경이 다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쉭!
퍽!
드디어 사내가 장력을 뿜어내자 소녀는 차마 인경이 다치는 것을 볼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럴 때면 무공을 할 줄 모르는 자신이 퍽 답답하기도 했다.
“어라?”
장풍을 방출한 것은 분명 원용당의 사내인데 쓰러진 이는 인경이 아니었다. 사내는 한참을 눈만 끔뻑거리며 서 있더니 천천히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으악!”
그의 손바닥 정중앙에 동그란 무언가가 콱 박혀 있었다. 그제야 손이 뚫린 고통을 느낀 사내는 쉰 목소리로 고래고래 고함을 치며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감히 어떤 후레자식이냐? 썩 나와라!”
인경은 이러다 죽겠구나 싶은 순간에 벌어진 일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무언가 날아오는 것은 보았는데 그 방향이 전혀 예상치 못한 쪽이었다.
“문주님, 괜찮으십니까?”
그들을 막고 서 있던 사내가 다친 동료 쪽으로 뛰어가는 덕분에 고대산파의 제자들은 장문인의 상태를 확인하러 갈 수 있었다. 다행히 자상 몇 군데를 빼고는 무사한 것 같았다.
“문주님이 하신 겁니까?”
영준이 소곤거리자 인경은 고개를 크게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시선을 객잔의 주방 쪽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여전히 큰 솥에 육수를 끓이고 있는 못생긴 주인장만이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고수가 근처에 있는 듯하네.”
피범벅이 된 동료의 손을 손수건으로 감아주며 사내가 속삭였다. 이대로 버티다가 본격적으로 그 고수가 싸움에 참견하게 된다면 자신들에게는 승산이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그들만의 신호를 주고받았다. 일단 여기서는 후퇴하되, 추후 고대산파의 제자들만 남게 되면 다시 급습할 작정이었다.
“떼죽음을 당한 고대산파의 귀신들이 돕는 모양이구먼.”
마지막까지도 조롱을 멈추지 않으며 두 사람은 객잔을 떠났다. 마음 같아서는 쫓아가서 혼쭐을 내주고 싶었으나 실력이 부족한 그들은 그조차도 할 수 없었다.
“문주님, 얼른 이곳을 벗어납시다. 저놈들이 또 쫓아오기 전에 황석파로 가야 합니다.”
영준의 말이 십분 맞았으나 인경의 시선은 여전히 주방 쪽을 향해 있었다. 마침내 마음을 굳힌 그는 천천히 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자네, 바둑은 좀 두나?”
그때였다. 벌써 네 그릇째 국수를 먹어 치운 노인이 어쩐 일인지 발을 쭉 뻗어 인경의 앞길을 막았다. 그는 쩝쩝거리며 이를 쑤실 뿐, 인경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르신, 갑자기 무슨…….”
“바둑에 이런 말이 있네. 세고취화(勢孤取和)! 형세가 불리하면 싸우지 않고 평화를 취한다는 뜻이지. 참을 줄도 알아야 진정한 무인이라네.”
인경은 노인의 의도가 무엇인지 깨닫자 창피한 마음이 들었다. 고작 자존심 때문에 자신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까지 위험에 빠뜨렸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과연 이런 자신이 장문인이 될 자격이 있을까? 그는 고개를 푹 수그리며 눈물을 글썽였다.
“저놈들, 저대로 물러서지 않을 텐데 괜찮겠는가?”
그런 인경의 모습이 꽤 안됐는지 노인은 드디어 고개를 돌렸다. 안타까운 마음과 걱정스러운 마음이 교차 된 표정이었다.
“얼른 길을 나서야지요.”
인경은 눈물을 꿀꺽 삼키며 목이 멘 소리로 대답했다. 자신을 구해준 상대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그다음이었다. 일단 안전을 확보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럼 얼른 가 보게.”
노인은 인경의 모습을 아래위로 한참 훑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상대보다 머리 하나는 키가 작았는데도 손을 쭉 뻗어 그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때렸다.
“어르신?”
의아한 마음에 뒤로 한 걸음 물러서려던 인경은 문득 가슴 속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원용당의 사내와 검을 부딪친 후부터 쭉 명치 끝이 답답하였는데 노인의 손길 한 번에 뻥 뚫렸으니 여간 신통하지 않았다.
“됐으니 빨리 움직이게. 여기서 오른쪽 모퉁이를 돌아 샛길로 빠지면 두 시진 내에 황석산 아래 도착할 테니.”
“네, 어르신.”
인경은 고마움을 담아 허리를 잔뜩 숙여 인사했다. 아무래도 평범한 촌부는 아닌 듯싶었다. 그러나 그의 정체를 밝히는 것도 지금 해야 할 일이 아님을 잘 알았다.
“갑시다.”
그는 객잔의 소녀에게 값을 곱절로 치르고는 제자들을 이끌고 빠르게 사라져갔다.
“자네, 뭘 던진 건가?”
그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보이지 않자 노인은 주방까지 껑충껑충 뛰어왔다. 나이에 맞지 않게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마늘이요.”
“뭐? 크흑.”
이미 다 들킨 것 같아 숨기지 못한 청년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대답했다. 노인은 암기의 정체를 듣더니 자지러지게 웃음을 터뜨렸다.
“저놈들, 손바닥이 어지간히 쓰라리겠구먼! 크크큭.”
청년이 몸 둘 바를 모르자, 노인은 그 꼴이 더 재밌다는 듯 이번에는 바닥에 누워 발을 동동 굴렀다. 보다 못한 소녀가 노인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이게 무슨 추태입니까? 제발 나잇값 좀 하세요.”
노인이 민망했는지 다시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청년 앞으로 와서 턱을 받치고 앉았다.
“그런데 말일세, 이리 어설프게 도와주면 아니 도와준 것만 못하네.”
“네?”
청년은 아차 하는 마음에 노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싹 걷혔다.
“그놈들, 이번에는 아주 으슥한 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란 말이지.”
인경과 다섯 제자는 경공을 사용하여 샛길로 빠르게 달렸다. 이미 객잔에서 나온 지 한 시진이 훌쩍 지났으므로 위험은 피했으리라 생각되었지만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원용당은 작은 문파였지만, 실력이 뛰어난 제자들이 많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그런데도 명문정파로 인정받지 못한 이유는 뻔했다. 협객 하나 배출하지 못한 철저한 이익 집단. 강호에서 원용당 출신을 만나면 말도 섞지 말라는 충고를 심심치 않게 들을 정도였다.
“문주님, 이쯤이면 그들을 따돌렸을 테니 한숨 돌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영준이 헐떡이며 건의하자 인경은 그제야 걸음을 멈췄다. 사실 그에게도 휴식이 필요했다. 아까 무명의 노인이 명치에 맺힌 울혈을 풀어주긴 했으나 대결에서 입은 자상과 타박상 때문에 기력이 꽤 쇠한 상태였다.
“이제 곧 황석산이니 한 식경만 쉬었다 갑시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보니 서서히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붉게 물든 산세는 마치 손톱에 꽃물을 들인 것처럼 은은하고 아름다웠다. 숨을 크게 들이쉬자 푸릇한 가을 냄새가 콧속으로 가득 들어왔다. 그동안 오직 복수만 생각하며 무공에 정진했던 인경으로서는 모처럼 느끼는 작은 여유였다.
“망중유한(忙中有閑)이라더니, 이제 완연한 가을이구나.”
“그럼 다시 망중(忙中)을 즐겨보는 건 어떠신지?”
한껏 비웃는 목소리가 숲속을 앵앵 울리더니, 나무 사이에서 하나둘 기다란 그림자가 나타났다. 아까 다쳤던 이를 포함하여 네 명의 원용당의 고수들이 고대산파의 제자들을 빙 둘러싸는 것이었다.
“아가야, 이제 방해할 사람도 없으니 신나게 즐겨보자꾸나.”
*** 세고취화(勢孤取和):
형세가 불리하면 싸우지 않고 평화를 취한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