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40화 (40/209)

#40화. 訪客(방객)

한여름 무더위도 한풀 꺾여서, 한낮인데도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해금강과 경인 해(海)를 끼고 있는 운평은 무역이 발달한 고을이었으므로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이맘때쯤이면 상인들로 북적거렸다.

한나절을 꼬박 걸어온 두 사내는 도저히 배가 고파 더는 움직일 수 없었다. 보이는 아무 객잔에나 들어가 잠시 쉬어가기로 마음먹었다. 황석산을 돌아 들어가는 길목에 마침 작고 허름한 객잔 하나가 보였다.

“간단하게 요기나 하고 가세나.”

“어이쿠, 그야말로 반가운 말이네.”

머리에 두건을 쓴 사내와 턱수염이 덥수룩한 사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객잔에 들어가 야외 평상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방물들을 잔뜩 짊어진 봇짐을 내려놓으니 이제야 허리를 펼 수 있었다.

“이보게! 여기 무엇이 맛있나?”

턱수염 사내가 큰소리로 점소이를 부르자 스무 살이 채 안 되어 보이는 소녀가 잰걸음으로 뛰어왔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싹싹하게 말을 붙이는 것을 보니, 일도 걱실걱실 잘할 것 같았다.

“저희는 오직 국수만으로 승부를 보고 있어요.”

“국수?”

두 사람은 적잖이 실망하여 서로를 마주 보았다. 딱 봐도 허름하여 별 기대는 하지 않았으나 어지간히 배가 고팠기에 국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아주 맛있게 곱빼기로 드리겠습니다.”

눈치가 빠른 점소이는 국수 맛은 보장한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소녀의 하는 양이 미덥지 않았지만, 더 걸어갈 여력이 없던 두 사람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국수 두 그릇을 시켰다.

“이따 저녁에는 해금 객잔에서 거하게 한 상 차려 먹읍시다.”

턱수염 사내가 영 마뜩잖은 표정을 짓자 두건 사내가 껄껄 웃으며 친구를 달랬다.

“그나저나 걱정했는데 다행일세.”

국수가 나오는 동안 두 사람은 못다 한 수다를 주고받았다. 큰 장이 설 때마다 고을을 이동하는 그들은 운평에서 큰일이 날 거라는 소문에 한동안 발이 묶여 있던 참이었다.

“태을신교 놈들이 운평표국을 급습한다 해서 우리 장사치들만 피를 보았지 뭔가.”

“아무래도 헛소문이었나 보네.”

턱수염 사내는 몇 가닥 있지도 않은 수염을 손등으로 쓸며 투덜거렸다.

“오대산검이 운평표국을 밤낮으로 지키니 그 불한당 같은 놈들도 차마 넘볼 수 없었던 게지. 악명만 높을 뿐, 별것도 아닌 놈들이 분명하네.”

두건 사내는 친구의 입을 검지로 누르며 인상을 가득 썼다.

“그런 소리 말게.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러나.”

“어허, 참. 이래 봬도 내가 표국의 표사 시험도 봤던 이라네. 산적들을 만나도 끄떡없는 실력이라고!”

턱수염 사내가 부러 더 큰소리를 내며 호탕하게 웃자, 두건 사내는 겁먹은 얼굴로 객잔을 빙 둘러보았다. 다행히 저쪽 구석에 국수를 두 그릇째 퍼먹고 있는 퉁퉁한 노인이 한 명 있을 뿐, 객잔 안은 한산하였다.

“모르는 소리 말게. 오대산검이 왜 운평표국 일에 나섰겠는가? 지난겨울, 고대산파가 무려 하룻밤 사이에 멸문했다는 이야기도 못 들었는가? 혹여 태을신교와 관련된 사람이 자네 이야기를 듣는다면 오늘이 우리 제삿날이라고!”

“흥! 고대산파는 사실 오대산검이라고 볼 수도 없지. 매월 신양선을 빼고는 유명한 협객 하나 없지 않은가? 태을신교가 그들을 노린 이유야 뻔하지. 가장 만만하니 그런 것 아니겠는가?”

두건 사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워낙에 허세가 있는 친구였지만 이렇게 세상 물정을 모르니 언젠가 큰 낭패를 볼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쉿! 이건 비밀인데…….”

“국수 나왔습니다.”

점소이가 쟁반을 들고 나타나자 두건 사내는 하려던 말을 꿀꺽 삼키고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소녀는 전혀 듣지 못한 듯, 국수 맛이 일품이라며 또다시 한참 수다를 떨었다.

“국수가 불으면 안 되니, 일단 먹고 얘기하세.”

털보 사내는 고소한 국수 냄새에 참을 수가 없었는지 점소이가 돌아가지도 않았는데 그릇을 들고 한 젓가락 크게 국수를 삼켰다.

“어라?”

“우와!”

국수 맛을 본 두 사람의 입에서 저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제 말이 맞죠?”

소녀는 두 팔을 허리에 대고서 자랑스럽게 손님들을 쳐다보았다. 두 사내는 대답할 시간도 아까운지 정신없이 면발을 씹어 넘겼다.

“여보게, 우리 한 그릇씩 더 주게.”

점소이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팔랑거리며 돌아가자 털보 사내는 혀를 끌끌 찼다.

“이렇게 맛있는데 손님이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구먼.”

“아무래도 저 점소이의 얼굴이 퍽 못생겨서 그런 게 아닌가? 게다가 저쪽…….”

두건 사내는 턱으로 주방 안쪽을 가리켰다. 소녀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이는 국수를 만든 주방장인 것 같았는데 멀리서 봐도 눈에 띌 만큼 못난 얼굴이었다.

“남매인지 부부인지는 모르겠으나 둘 다 저리 인물이 없으니 장사가 될 턱이 없지. 그러나저러나 비밀이 뭔가?”

턱수염 사내는 빈 그릇이 못내 아쉬워 혀로 싹싹 핥으며 친구에게 다음 이야기를 재촉했다. 두건 사내는 주방 쪽에서 시선을 거두더니 다시 심각한 얼굴이 되어 속삭였다.

“태을신교 놈들이 고대산파를 쳐들어간 이유 말이네. 그게 바로 검신의 그 절세 무공비급 때문이란 소문이 있어.”

“헉! 그 해밀인가, 해심밀인가 뭐 그거 말인가?”

털보 사내는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요즘 강호에서는 그 경전에 대한 일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얼마나 유명한지 아기가 옹알이할 때 경전의 이름을 말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었다.

“아니, 지금 강호의 크고 작은 문파에서 그 비급을 찾겠다고 난리 아닌가?”

두건 사내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친구 가까이에 얼굴을 더 바짝 붙였다.

“검신의 제자가 살아 있다는 설도 있지만, 사실 고대산파의 전 장문인이 훔쳐 자신의 사문 어딘가에 숨겨뒀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네.”

털보 사내는 흥미로운 소문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무림 최고의 고수인 두타공파의 조양도 한주먹에 끝낼 수 있다는 절세 무공비급. 그 비급의 한 장만이라도 익혀 보고 싶은 욕심이 아니 들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의심이 생겼다.

“허나, 비급을 가지고 있다면 고대산파가 지금 그 꼴은 아니겠지. 아무래도 낭설인 듯싶네.”

털보 사내가 손사래를 치며 친구의 말을 부정하자 두건 사내는 더욱 은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살아남은 고문주의 조카가 무림 맹주의 도움으로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으니 별수 없는 게지. 다 늙어빠진 장로와 어린애들 몇만 남아 무슨 무공을 익히겠나? 말이 오대산검이지 그쪽은 다 틀렸네.”

인간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한 때는 오대산검을 대표하는 거대 문파가 이제는 열다섯이 겨우 넘은 어린아이를 장문으로 세워 현판만 유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괜히 가슴 한편이 시큰해졌다.

“자! 새 국수가 나왔습니다.”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소녀가 평상 앞으로 촐랑촐랑 걸어왔다. 방정맞은 걸음걸이에도 국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것이 어지간히 능숙한 일꾼인 것 같았다.

“이보게!”

이번에는 한쪽 구석에서 국수를 먹던 노인이 점소이를 불렀다. 그런데 웬일인지 친절한 소녀의 얼굴이 잔뜩 구겨지는 것이었다.

“왜 그리 싫은 내색을 하는가?”

두건 사내는 소녀의 행동이 의아하여 은근슬쩍 물었다. 뭉그적거리며 가기 싫은 티를 내던 그녀는 마침 잘 됐다 싶었는지 평상에 더럭 걸터앉았다.

“저 노인은 매일 오전에 와서 국수를 무려 다섯 그릇씩 퍼먹고 갑니다. 아니 근데 늘 값을 반절만 치른다니까요? 아주 거지가 따로 없어요.”

“아니 그럼 내쫓으면 될 게 아닌가?”

털보 사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소녀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제 오라버니가 사람이 좋아, 그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거든요.”

노인이 재촉해서 재차 부르자 소녀는 더는 모른 척할 수 없었는지 터덜터덜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재밌는 낭자구먼.”

“국수가 맛있었으니 우리는 곱절로 챙겨주세나.”

노인은 소녀가 빨리 오지 않자 잔뜩 골이 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앉았다. 어쩐지 점점 불친절해지는 것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도 같았다.

“이보게! 아무래도 값을 치르기 어렵겠네!”

“뭐라고요?”

소녀는 화가 잔뜩 나서 눈썹을 추켜올렸다. 매번 별말 없이 국수를 끓여주니 아주 호구로 본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 대체 왜요?”

“평소보다 닭고기가 덜 들어갔지 않나! 무엇보다 국수 양이 줄었네!”

성질 같아서는 상을 엎어버리고 싶었지만, 소녀는 오라버니에게 혼날까 봐 애써 침착하게 대꾸했다.

“아, 오늘은 받지 않을 테니 그냥 가세요. 대신 앞으로 다신 오지 마세요.”

노인은 자신의 통통한 볼살을 두 손으로 받치고서 소녀를 한껏 노려보았다.

“흥! 자네 오라비 좀 나오라 하게!”

“네?”

소녀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라버니가 알게 되면 또 자신을 된통 혼낼 것이기에 퍽 곤란했다. 노인은 그런 사정을 뻔히 알고 있었으므로 매번 이런 식으로 소녀를 골려댔다.

“어르신, 여기 국수 한 그릇 더 드릴 테니 노여워 마십시오.”

노인을 잔뜩 노려보는 누이를 엉덩이로 밀어내며 주방을 지키던 청년이 달려 나왔다. 노인은 그의 얼굴을 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으니 역시 이 집 국수는 일품일세. 자네 얼굴을 봐서 오늘 일은 내 봐줌세.”

노인은 입맛을 다시며 젓가락을 꺼내 들었다. 소녀는 노인이 못마땅하여 계속 툴툴거렸으나 차마 오라비에게 화를 낼 수 없어 입술을 삐쭉거리며 서 있을 뿐이었다.

“이보게!”

언제 들어왔는지 머리에 하얀 띠를 두른 한 무리의 청년들이 점소이를 불렀다.

“아, 갑니다요.”

소녀는 노인에게 혀를 날름 내보이고는 새로 온 손님들에게 총총거리며 뛰어갔다.

“자네 누이만 단속한다면 경국 최고의 객잔이 될걸세. 암.”

노인이 속삭이자 청년은 머리를 긁적이며 수줍게 웃었다. 매번 공짜이다시피 국수를 얻어먹는 손님이었으나 청년은 노인이 싫지 않았다.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데다가 자신에게는 퍽 다정해서 마치 가족과 같은 느낌도 들었다. 다만 누이랑 사이가 좋지 않으니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여기 뭐든 요기가 될 음식을 사람 수대로 갖다 주게.”

여섯 명의 청년들은 모두 얼굴이 말끔하고 예의가 바른 것이 명문정파의 제자들인 듯했다. 소녀는 방실방실 웃으며 주방으로 냉큼 들어갔다. 아무래도 오늘 장사가 잘 되는 것이 운수가 좋은 날 같았다. 돈을 꽤 모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노인과의 일은 마음에 두지 않기로 했다.

“맹주님은 우리가 무슨 도움이 된다고 불렀을까요?”

“허나 은혜를 입었으니 작은 것이라도 도와야 할 게 아닙니까?”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는 제자 하나가 묻자, 가운데 앉은 잘생긴 청년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분명 나이가 더 어린데도 존대하는 양을 보니 항렬이 더 높은 제자임이 틀림없었다.

“우리 문파의 일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니 불편합니다.”

또 다른 이가 투덜대자 청년의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결국, 그는 그 맛있는 국수도 몇 젓가락 먹지 않았다. 아무래도 마음에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소녀는 열심히 육수를 끓이는 오라버니의 곁에 가서 청년들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왠지 가운데 앉은 이의 얼굴은 낯이 익은 듯도 하여 더 호기심이 생겼다. 그 사이 봇짐을 멘 두 상인이 떠났고, 노인이 또 투정을 부려, 한 차례 국수를 말아주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청년들에게로 가 있었다.

“아이고, 또 이렇게 마주치다니 인연이네, 인연이야.”

한 식경쯤 지났을까? 이번에는 머리를 바짝 위로 올려 묶은 두 명의 무인(武人)이 객잔으로 들어섰다. 검에 새겨진 문양으로 보아 운평 일대에서 꽤 유명한 원용당(援用堂)의 제자들이었다.

“저놈들이 또!”

하얀 띠를 두른 청년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운평에 들어서자마자 마주친 그들은 오는 내내 줄곧 이유 없이 시비를 붙어왔다. 걸음을 재촉하여 겨우 따돌렸다고 생각했는데 이곳까지 따라올 줄은 미처 몰랐다.

“그 대단한 고대산파의 제자들이 이런 누추한 곳에서 국수 따위를 먹다니,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나.”

“한때는 고대산파 신양선 하면 호랑이도 벌벌 떨었다는데 참으로 안타깝네, 안타까워.”

서로 대화하는 것처럼 주고받았으나 누가 봐도 상대를 겨냥한 비아냥이었다. 고대산파의 제자들은 울컥하여 당장이라도 검을 뽑고 싶었으나 그들보다 무공이 한참 아래인지라 비굴하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면 난장을 부릴 만도 하건만, 배운 이들은 다른가 보네. 어찌 저리 잘 참누?”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장문이랍시고 앉았으니 별수 있나? 실력이 안 되는걸.”

참다못한 제자 하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문주님,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습니다.”

“영준아!”

그는 말릴 새도 없이 뛰쳐나가 원용당의 제자들에게 삿대질했다. 여차하면 싸움도 불사할 생각이었다.

“감히 원용당 따위가 우리 고대산파를 욕보이다니,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원용당의 제자들은 여전히 뒷짐을 진 채로 낄낄거리며 웃었다.

“얘야, 아서라. 새파랗게 어린놈이 명문정파라고 그리 까불면 되겠느냐? 네놈하고는 싸울 가치도 없으니 젖이나 더 먹고 와라.”

“네놈들 꼴을 보면 무덤에 있는 신양선이 벌떡 일어나겠다!”

영준은 치밀어오른 화를 감당할 수 없어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졌다.

“이놈들!”

챙!

그러나 원용당의 제자들에게 검을 빼든 것은 영준이 아니었다.

“문주님!”

“평생 그 입을 놀릴 수 없도록 해주겠다.”

영준의 앞을 가로막고 선 이는 고대산파의 십 대 제자이자 새로운 장문, 고인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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