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切齒腐心(절치부심)
“이 샛길만 지나면 용문산이다. 조금만 참아라.”
황장로는 울부짖다 지쳐 축 늘어진 인경을 위로하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체력이 한계에 다다랐으나 조금도 걸음을 늦출 수는 없었다. 고대산파의 명맥을 이으려는 장문의 마음은 곧 황장로 자신의 바람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인경이만은 지켜야 한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이 목표만이 남아 있었다.
“어딜 그리 바삐 가십니까?”
“헉!”
비로소 샛길을 빠져나오는 순간, 황장로는 바위 위에서 쭈그려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내의 인영을 마주했다. 우렁찬 목소리, 딱 벌어진 어깨, 등 뒤로 삐죽하게 올라온 거대한 칼집.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적우!”
황장로는 이제 더는 인경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겁에 질려 몸이 빳빳하게 굳은 소년에게 나지막한 소리로 속삭였다.
“뒤도 보지 말고 뛰어 용문산으로 가거라.”
“사숙…….”
“너만은 꼭 살아야 한다.”
황장로는 인경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거듭 당부했다. 사숙의 얼굴에 짙게 드리운 그늘을 확인하자 그는 이것이 이별의 인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감히!”
황장로는 서둘러 인경을 등 뒤로 감추며 검을 빼 들었다. 적우를 이길 수는 없지만 수십 합은 버틸 수 있을 터였다.
“선배님, 이 바닥에서 나이가 뭐 그리 중하겠습니까?”
적우가 행덕을 빼 들자 둔탁하고 묵직한 파열음이 울렸다. 아무리 그라도 황장로는 우습게 볼 수 없었다. 고근동 형제와 더불어 신양선의 직계일 뿐만 아니라 고대산파의 남은 이들 중에서는 하월검법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유일한 제자였기 때문이었다.
“흥!”
황장로는 마교 놈들과 긴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별다른 신호도 없이 월광영우(月光零雨)의 초식으로 적우의 정면을 노리고 들어갔다. 부드러운 몸짓이었으나 검기가 예리하여 상대가 예상치 못한 거리까지 한 번에 쑥 뻗어왔다. 적우는 뜻밖의 기습에 화들짝 놀라 가까스로 몸을 비틀어 검기를 피했다. 그러나 이 또한 예상한 황장로는 검의 방향을 번개같이 바꾸어 그의 왼쪽 옆구리를 휘감아 들어갔다.
“영우(零雨)라면서 빠르기가 마치 급우(急雨) 같구나!”
적우는 평소 고대산파의 검법을 유달리 좋아하였다. 비록 직접적으로 배우지는 못했으나 검법의 초식 이름조차도 퍽 마음에 들었다. 상대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각각의 이름을 다 맞추고 있었다.
적우가 별다른 공격은 하지 않고 계속 자신의 검술을 감상하고 있자 황장로는 점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이 다급한 상황에 여유를 부리는 꼴이 꼭 자신을 무시하는 것만 같았다.
“이놈! 건방지기 이를 데 없구나!”
황장로의 검이 급작스럽게 속도를 올리자 행덕으로 방어만 하고 있던 적우도 피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그는 쏟아지는 검광을 신법으로 요리조리 피해가며 조금씩 손목을 움직였다. 그러자 그의 도(刀) 주변에서 작은 회오리가 일어났다.
“제대로 익힌다면 따라올 검법이 없을 텐데…….”
적우는 혀를 끌끌 차더니 이번에는 도법의 절초를 사용하여 행덕을 찍어 내리기 시작했다. 얼핏 보면 무식하게 내리꽂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수십 번의 회전을 더한 공격이었다.
황장로는 비로소 상대가 공격을 시작하자 검을 자신의 몸 앞으로 잡아당겼다. 하월검 1초식은 방어를 기본으로 하지만 5할 이상의 내공을 실어 검기를 방출하기 때문에 단번에 상대의 급소를 찌르는 것이 핵심이었다. 적우의 방어 동작이 단조로웠으므로 노련한 황장로의 눈에는 허점이 많이 보였다.
‘이대로 옥당혈을 찌른다면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
최대한 공력을 끌어올려 검에 실은 그는 앞으로 다섯 걸음을 빠르게 이동하며 손을 쭉 뻗었다. 그러나 그의 보법을 무심히 지켜보던 적우가 갑자기 이를 가득 보이며 웃는 것이었다.
“아니!”
지나치게 흥분한 황장로가 딱 반 발자국 더 들어왔을 때, 적우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왼손의 장력으로 명치 끝에 다다른 검을 잡아두는 동시에 오른손의 행덕으로 무참하게 상대의 어깨를 갈라내었다.
“으억!”
검붉은 피가 황장로의 왼쪽 어깨에서 퐁퐁 솟아올랐다.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지면서 그의 눈동자는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 그 와중에도 인경의 위치를 확인하려는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다음 공격이 그의 마지막 일격이 될 것 같았다.
‘지금쯤 도망갔겠지?’
그는 손끝 발끝의 기운까지 모두 짜내어 오른손에 반월경의 내공을 가득 모았다. 검에 실은 내력은 곧 검광이 되더니 가느다란 그의 검을 두툼하게 감쌌다.
“하현천무(下弦天武)”
그가 구현할 수 있는 마지막 절초였다. 마흔두 가지의 변화를 가진 하현천무는 고근남이 죽기 전에 보여 주었던 그것과 같았다.
“위력은 전만 못하지만, 훨씬 아름답구나.”
적우는 운이 좋게도 두 번의 하현천무를 마주하게 되었다. 고근남에 비해 초식은 투박하지만, 훨씬 절도 있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검은 다루는 이의 마음을 비치는 거울과 같아서 황장로의 절실함이 그대로 묻어 나왔다.
적우는 문득 상대에게 강한 존경심이 들었다. 하여, 더는 장난치지 않고 성심을 다해 그의 절초를 받아내기로 마음먹었다. 우렁찬 기합 소리와 함께 그는 자신의 도(刀) 행덕을 두 손으로 감아쥐었다. 잠깐이지만 주인의 공력의 8할을 흡수한 행덕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자그마한 진동을 일으켰다. 다음으로 황장로의 검과 부딪치더니 검이 내뿜는 찬란한 검광을 다 집어삼키고는 그대로 상대의 가슴을 베어냈다.
“살펴 가십시오.”
절명한 그의 시신 앞에서 적우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어느 순간부터 살인이 업(業)이 되었으나 훌륭한 상대를 만날 때면 늘 마음이 착잡해졌다.
“이 악귀 놈아! 내 너를 죽이고 말겠다!”
적우는 쟁쟁거리는 소리에 그제야 어둠 속에서 소년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황장로의 등에 가려서, 나중에는 나무 뒤에 숨어 있어서 들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어쩐지 황장로가 자꾸 무언가를 감추려 한다 생각했더니만 바로 이 아이 때문인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지키려는 이가 있었다니…….”
적우는 새삼 그에게 다시 감동하여 코를 훌쩍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왠지 더는 살인을 하고 싶지 않았다.
“으아아악!”
인경은 아버지가 물려주신 하현검을 망설임 없이 검집에서 뽑았다. 비록 실력은 겨룰 바가 못 되었으나 상대에게 피 한 방울조차 뽑아내지 못한다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만두어라. 너는 나를 죽이지 못한다.”
적우는 아예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는 인경을 죽일 생각이 아예 없었다. 이 어린 녀석 하나 살려둔다고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에잇!”
인경은 상월검법 1초식을 구사하며 빠르게 적우의 오른쪽 어깨를 찔러 들어갔다. 적우는 귀찮다는 듯이 그의 칼날을 손가락 두 개로 받아내었다. 수천, 수만 번 연습한 초식이었건만 압도적인 상대에게는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아아…….”
그는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기가 막혀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무기력하고 처참할 수가 없었다.
‘나이도 어린아이의 의기(意氣)가 참으로 대단하구나.’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적우는 소년이 꽤 마음에 들었다. 적으로 만나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아우로 삼았을 텐데 퍽 아쉬웠다.
“얘야, 정 그리 억울하거든 절치부심(切齒腐心)하여 십 년 뒤에 나를 찾아오너라. 그때 전력을 다해 상대해 주마.”
적우는 실핏줄이 다 터진 눈으로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소년의 머리를 손으로 헝클어뜨리면서 껄껄 웃었다.
“어이쿠, 사저에게 또 된통 혼나겠구나.”
그는 달의 기울기를 보고 흠칫 놀라더니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옷자락을 툭툭 털었다. 달빛 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인경을 내버려 둔 채, 지나왔던 샛길을 돌아 어둠 속으로 성큼성큼 사라져 갔다.
그는 이날의 적우 얼굴을 평생 마음속에 새기게 되었다. 행덕을 등 뒤에 짊어지고 작아져 가는 뒷모습을 보며, 인경은 같은 말만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마진건……. 그리고, 적우…….”
객잔에 도착한 주운은 모든 객실을 샅샅이 뒤졌지만,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혹시나 했으나 역시나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차라리 약속을 어긴 것이라면 좋겠구나.’
그렇다면 운선이 살아 있을 확률이 있을지도 모른다. 주운은 망연자실하여 객잔 정 가운데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스승 이무영과 약속한 때는 이미 끝난 지 한참이었다. 그 이후에도 계속 운선의 옆을 지켰던 것은 순전히 주운 본인의 의지였다. 시작은 의심이 들어서, 지내다 보니 불쌍해서, 그리고 지금은 이유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옆에 있고 싶어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운선이 죽었다고 생각하자 드디어 깨닫게 된 마음이었다.
“사저…….”
주운은 형진의 부름에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계속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눈치챈 지 오래였다. 평소 같았으면 진작 정색하며 쫓아버렸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력이 없었다. 어쩌면 따라와 주어 다행이다 싶은 마음도 있었다.
“역시 그 노인과 손녀는 범상치 않은 이들이었군요.”
주운은 침묵으로 긍정의 대답을 대신에 했다. 굳이 정체를 까발릴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옹호해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애초에 그들의 기습이 아니었다면 이 사달이 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그제야 주운은 형진을 올려다보았다. 늘 깔끔하고 준수한 그의 얼굴이 평소와 달리 초췌하고 그늘져 보였다. 나름대로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퍽 안되어 보였다.
“왜 따라오셨습니까? 제가 몰래 운선을 숨기기라도 한 것 같습니까?”
주운의 퉁명스러운 대꾸에도 형진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말에는 친절함이 없었으나 악의 또한 담겨 있지 않았다.
“제 불찰로 두 사제가 억울하게 참변을 당했습니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운선의 시체를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절벽 사이사이 튀어나온 부분이 많으니 혹시나 운이 좋아 그곳에 떨어졌다면 살아 있을지도 모를 일 아닙니까? 만약 사저가 운선을 찾으려 한다면 제가 옆에서 돕겠습니다.”
형진은 조심스럽게 주운의 곁으로 와 무릎을 꿇었다. 앉아 있는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고 나니 서로의 표정이 한눈에 들어왔다. 깊고 촉촉한 그의 눈에는 걱정과 배려가 가득했다.
“운선이 살아 있다면 태을신교와 관련이 있을 터, 그들의 행적을 추적한다면 적어도 그와 관련된 실마리 정도는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이 영 황당무계하지는 않았다. 또한, 허투루 말을 내뱉지 않는 형진의 성정을 알기에 주운의 마음속에는 다시금 희망의 불씨가 붙었다. 강호 경험이 많고 영리한 그라면 사라진 태을신교의 꼬리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따라오는 것은 상관없으나 저를 방해한다면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주운은 승낙도 거절도 아닌 애매한 대답을 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스승님의 부름이 없었으니 굳이 구월산에 들를 필요도 없었다. 결심했으니 한시라도 빨리 움직이는 게 나았다. 목표가 생긴 주운의 가슴이 다시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사저, 당분간 잘 부탁드립니다.”
형진이 두 손을 모아 앞으로 흔들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객잔 문을 나서려던 주운이 고개를 획 돌리며 쏘아붙였다.
“대신! 앞으로 사저라 부르지 마십시오. 감히 저를 당신의 사부와 엮지 말란 말입니다.”
형진은 예의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야말로 제가 바라던 바입니다.’
*** 절치부심(切齒腐心):
몹시 분하여 이를 갈며 속을 썩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