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因果應報(인과응보)
고대산파의 제자들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마진건의 소문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칠원성군 중, 무공 실력으로 보면 이서문이 가장 뛰어나다 할 수 있지만, 실전에서는 마진건을 따라올 자가 없다고 했다.
그의 창술에는 초식이 없었다. 수많은 전쟁터에서 오직 죽이기 위한 싸움을 했던 그였기에 그 어떤 화려한 기술도 필요치 않았다.
“인경아, 잘 기억해라.”
고근동은 애써 웃는 낯으로 조카를 돌아보았다. 고대산파의 멸문은 막아야 한다. 그것이 무지하고 무능한 자신이 장문으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소임이었다.
“뒤도 보지 말고 도망쳐라. 절대로 돌아와서는 안 된다.”
“숙부님?”
인경은 평생 처음 보는 숙부의 단호한 모습에 극심한 공포심을 느꼈다.
“대신 똑똑히 기억해라. 고대산파를, 너의 가족을 죽인 원수를 절대 잊지 말아라!”
근동은 멍청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인경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숙부님, 숙부님!”
근동은 자신의 최측근인 황장로에게 인경을 맡기며 간단하게 수신호를 했다. 그와는 출발하기 전에 이미 말을 맞춰둔 상태였다. 만약을 대비하여 약속해 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장문을 향해 비장하게 인사를 한 황장로는 발버둥 치는 인경을 한쪽 어깨에 가볍게 둘러멨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공을 실은 보법을 사용하여 반대편 길로 달리기 시작했다.
“감히 우리가 누군 줄 알고 길을 막는 것이냐?”
고근동은 애써 두려움을 감추고 마진건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와 겨뤄 본 적은 없었으나 칼을 맞대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오늘이 바로 자신의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나는 태을신교의 천선 마진건이오. 당신이 고대산파의 장문이 맞소?”
무미건조한 그의 목소리는 숲을 한 바퀴 돌아 귓속을 파고들어 왔다. 고대산파의 제자들은 두려움에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손에 든 검만 꽉 부여잡고 있을 뿐이었다.
“인제 보니, 마교의 망나니가 찾아왔구나! 안 그래도 사부님의 복수를 하러 갈 참이었는데 아주 잘 되었구나, 잘 되었어.”
고근동은 되레 허세를 떨며, 자신의 검 상현(上弦)을 검집에서 꺼냈다. 가늘고 예리한 검날이 달빛에 반사되어 사뭇 반짝거렸다. 사부인 신양선은 근동과 근남에게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긴 검 상현(上弦)과 하현(下弦)을 주면서 늘 신신당부했다.
“검은 단순히 병기가 아니라 다루는 이의 마음이니라. 마음이 번잡하고 상념이 많을 때는 절대로 검을 뽑아서는 아니 된다. 상대가 아니라 너 자신이 다치게 될 것이다.”
근동은 사부의 목소리가 마치 귀에서 들리는 것 같아 울컥 눈물을 쏟을 뻔하였다.
‘사부님, 비록 미천한 실력이지만 부끄럽지 않은 제자가 되겠습니다.’
그가 준비를 마치고 공격 태세를 갖추자 제자들 또한 마음을 다잡았다. 서로 눈치를 주고받더니 각자의 위치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윽고 고근동을 중심으로 스물다섯 명의 매월검진이 만들어졌다.
“흐음.”
마진건은 여전히 무방비 상태로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에게는 애초에 준비 동작이라는 것이 없었다. 상대가 덤벼 오면 그대로 찌르고 베면 되는 것이었다.
“상월검 1초식!”
근동의 외침이 있자 검진은 빠르게 방사형으로 모양을 바꿨다. 장문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거미줄 같은 검진은 간격이 촘촘하여 한 번 진 안에 들어오면 도저히 빠져나갈 길을 찾기 어려웠다.
“하월검 1초식!”
가장 바깥쪽에 선 이들이 상월검법을, 안쪽에 있는 이들이 하월검법을 사용하자 어지러운 검기가 마진건을 향해 불어닥쳤다. 특히 고근동의 좌우에 선 두 제자의 검법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는데 무심히 바라보는 마진건조차 감탄의 탄식을 내뱉을 정도였다.
“월광취우(月光驟雨)”
두 사람은 검을 서로 교차하더니 마진건을 향해 돌진했다. 마치 소나기가 쏟아지듯 번쩍이는 검광이 검은 하늘을 가득 메웠다. 두 개의 검날이 진건을 덮치려는 찰나, 그는 와락 고개를 숙여 좌측에 있는 소나무를 잡고 몸을 뱅그르르 돌렸다.
“어딜!”
이번에는 그 양을 지켜보고 있던 고근동이 몸을 날렸다. 그의 상현검은 채찍처럼 길게 휘어지더니 몸을 비킨 진건을 따라가 그의 등줄기를 세로로 길게 그었다.
‘됐다.’
상대의 등줄기에서 붉은 핏방울이 맺히는 것을 본 고근동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예상보다 마진건의 움직임이 둔한 것을 보니, 어쩌면 강호의 소문이 과장인 듯싶었다. 고근동은 이참에 치명상을 입혀야겠다 싶어 상현검을 더 깊이 찔러 들어가며 진건의 앞으로 돌아들었다.
“받아라!”
그러나 마진건은 기다렸다는 듯이 피하지 않고 상현검을 정면으로 받았다. 검이 쑥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자 고근동이 놀라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이미 검날의 끝이 상대에게 잡힌 뒤였다.
“참으로 괜찮은 검법이었소.”
정면으로 마주친 마진건의 눈에는 아무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유달리 검고 반들한 눈동자에 비치는 것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고근동 자신의 얼굴이었다. 그는 피식 한쪽 입꼬리를 올리더니 잡고 있던 검날을 손가락으로 튕겨내었다.
핑!
상현검의 반동으로 고근동은 수 장 밖으로 날아 떨어졌다.
“문주님!”
장문이 위험한 것을 눈치챈 두 명의 사제가 양쪽에서 빠르게 검을 찔러 들어갔다. 좌측에서 날아온 검은 진건의 겨드랑이 쪽으로 감아 찔렀으며, 우측에서 날아온 검은 허벅지에서 무릎 방향으로 베어냈다.
“재밌군.”
마진건은 미끄러지듯 뒤로 물러서며 드디어 쥐고 있던 창을 앞으로 쭉 뻗었다. 창은 겨드랑이 쪽으로 날아오는 검을 막아내더니 반탄지공으로 좌측에 있던 상대를 가뿐하게 날려 버렸다. 동시에 다리를 구부려 우측에서 날아온 검을 무릎으로 막았는데 검날이 그의 뼈에 닿자 그대로 부러지며 검 주인마저 튕겨냈다.
“역시 고대산검의 검법은 대단하오. 허나,”
마진건은 자신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넘어져 있는 세 사람을 차례로 돌아보며 지그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는 그 검법을 영영 볼 수 없게 될 것이외다.”
마진건은 오른손에 든 창을 천천히 돌리기 시작했다. 그의 창 미타(彌陀)는 창날이 마치 낫과 같이 생겼으므로 그가 돌리는 속도를 높일수록 하나의 원처럼 보였다.
“도망쳐!”
순간 불길한 기운을 느낀 고근동은 양옆에 넘어져 있는 사제들에게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눈치가 빠른 그들은 위험을 감지하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검을 대각선으로 뻗어 안면을 방어하는 한편, 다른 손으로는 반월경의 내공을 사용하여 장풍을 만들어냈다. 누구라도 반경 안에 들어오면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고대산파의 내공심법이었다.
쉭!
진건의 검은 인영이 두 사람을 차례로 덮칠 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자신들이 쏘아낸 장풍이 그의 가슴팍에 명중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스로 깨닫기도 전에 두 사람의 몸은 반 토막이 되었다. 근방에 있던 고근동은 두 사제의 몸에서 쏟아져 나온 피를 그대로 뒤집어썼다.
“아아!”
그는 충격과 경악으로 차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매월검법에 정통한 두 사제는 실력으로만 따지면 자신보다 훨씬 우위에 있었다. 그런 그들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절명한 것이었다.
“도대체 왜 우리냐?”
고근동은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울부짖었다. 왜 하필 고대산파인가? 의리는 개나 줘버리고 자기들만 살리겠다고 내뺀 파렴치한 문파들은 왜 비껴가는 것인가?
“인과응보(因果應報).”
마진건은 무심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더니 퉁명스럽게 한마디를 툭 뱉었다.
“뭐?”
“의미를 모른다면 할 수 없지.”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다시금 창을 고쳐잡았다. 장문의 체면을 생각하여 일어날 때까지 시간을 주었을 뿐, 그의 창에는 배려도 자비도 없었다. 고근동은 그의 반들반들한 눈동자에서 소름 끼치는 살기를 느꼈다.
“도망쳐라!”
고근동은 남은 제자들만이라도 살려야 된다는 생각에 있는 힘껏 고함을 질렀다. 방금까지만 해도 상대가 한 명이니 사형제들과 힘을 합친다면 요행히 살 수도 있겠지 하는 일말의 희망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완전한 패착임을 깨달았다.
어떻게든 이놈을 붙잡고 동귀어진(同歸於盡)한다면 몇 명은 살릴 수 있을지 모른다. 고근동은 팔다리가 잘리는 한이 있더라도 최대한 시간을 벌겠다 다짐했다.
“문주님!”
“어서!”
차마 떠나지 못하는 사형제들을 재촉하며 고근동은 벌떡 일어나 자세를 바로잡았다. 최선을 다한다면 치명상은 아니더라도 사지의 힘줄 하나 정도는 끊어낼 수 있으리라. 그의 눈에 어떤 결의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고문주, 소용없소.”
마진건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근동을 내려다보았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가 큰 사내의 고압적인 눈빛에 주눅이 들 만도 하건만, 지킬 것이 있는 그에게는 투지만이 불타오를 뿐이었다.
고대산파의 제자들은 장문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격전이 시작되면 최대한 흩어져 도망갈 심산이었다. 누구 하나라도 살아남는다면 반드시 이 통한의 수치를 갚고야 말겠다. 각자의 마음속에는 비장한 결심이 하나씩 들어섰다.
챙!
마진건의 창 미타가 빠르게 고근동의 왼쪽 다리를 찌르고 들어왔다. 고근동은 당황하지 않고 상현검을 아래로 내리꽂아 그의 오른쪽 발바닥을 노렸다. 다음 순간에 미타가 방향을 바꿔 위쪽으로 치고 올라오자 이번에는 상현으로 얼굴을 방어하였다. 맑은 금속성과 함께 두 날이 강하게 부딪쳤다. 아무래도 더 약한 상현검의 검신이 파르르 떨렸다.
“죽여 버린다!”
고근동은 충돌의 여파로 인해 손이 저려 검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러나 망설일 틈도 없었다. 창이 크게 휘돌아 들어오며 그의 목덜미를 향했다. 그는 금세 왼손으로 바꿔 잡고서 검을 위로 뻗어 역으로 상대를 찔렀다. 창의 길이를 생각해 봤을 때, 충분히 먼저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아….’
하지만 미타의 속도는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빨랐다. 뒤로 돌아간 줄 알았던 창날이 어느새 한 바퀴를 돌아 그대로 고근동의 턱 아래까지 당도하였다. 침을 꿀꺽 삼킬 정도의 시간이면 모든 것이 끝날 터였다.
근동의 눈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고대산파 제자들의 뒷모습이었다. 그래, 저들의 목숨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그리 허망한 죽음은 아닐 것이다.
평생 동생보다 못한 형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살아왔던 삶이었다. 경솔하고 무책임하다는 평가가 늘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장문으로서의 자부심을 느꼈다.
‘사부님, 이제 조금은 면목이 섭니다.’
그때였다.
“나머지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맑고 청량한 목소리와 함께 붉은 옷자락이 고근동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쌍검을 들고 있는 여인은 도망가는 고대산파의 제자들을 무참하게 찌르고 베어냈다. 샛길로 도망가는 이들의 등에는 어김없이 그녀의 표창이 꽂혔다. 태을신교의 옥형 현진이었다.
“안 돼!”
마지막 소명이 무참히 짓밟힌 채, 고근동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마진건은 미타를 두어 번 더 돌려 진득하게 묻은 피를 털어내며 현진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여차하면 도우려 했으나 그러기에는 현진의 강강이 워낙에 빠르고 정확했다. 모든 상황이 정리되는 데에는 채 한 식경이 지나지 않았다.
“적우는?”
“용문산 방향으로 가는 길을 막겠다고 했는데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현진이 대답했다. 아무리 임무라지만 스무 명 남짓 되는 이들의 목숨을 앗는 일이 유쾌할 리 없었다.
“너무 마음에 담지 말아라.”
진건의 무심한 한마디에 현진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술이라도 진탕 마셔야 잠이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 인과응보(因果應報):
전생에 지은 선악에 따라 현재의 행과 불행이 있고, 현세에서의 선악의 결과에 따라 내세에서 행과 불행이 있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