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聲東擊西(성동격서)
오대산검의 제자들은 아침부터 시작한 별 소득 없는 회의 때문에 모두 지쳐 있었다. 벌써 해가 중천에 떴는데 대책은커녕 상대의 의도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정찰대에 따르면 주변 일대에서는 태을신교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답답할 따름입니다.”
문파마다 불만이 가득하였다. 거리가 먼 문파는 벌써 사문을 비운 지 두 달이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속절없이 이곳에 묶인 것이 시간 낭비 같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조장문을 살려두는 것이 나았을 뻔하였소.”
고유생은 장문을 대신하여 상석에 앉은 용가현을 흘겨보며 이죽거렸다. 자신의 사문을 욕보이고 싶지 않았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 아니었으나, 막상 일이 풀리지 않으니 아쉬운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몰랐다 하더라도 이렇듯 오대산검에 큰 화를 끼친 점에 대해 사죄드립니다. 허나, 조상원 한 사람의 문제였을 뿐, 용문파는 태을신교와 아무 관련이 없으니 더는 거론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용가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깊이 머리를 숙였다. 이미 한 차례 사죄를 한 후였으나 고유생의 비아냥에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었다. 그런 마음을 다독이기 위해 조양이 나섰다.
“조장문은 죽음으로 죗값을 치렀으니 용형제는 다시는 사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엄한 표정으로 좌중을 둘러보자 장내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분해졌다.
“우리는 지금 태을신교의 기습으로 본질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혼란이 그들의 의도일지 모릅니다. 우리가 이곳에 모인 본래 이유를 떠올려야 합니다.”
조양의 말에 모두가 동의하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조상원의 간계로 인해 오대산검의 비밀 회동이 들키기는 했으나 정작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본 목적을 다시금 상기하여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우선, 각자의 관할에 있는 중소 방파들에 대한 지원이 시급합니다. 이미 운반와 매매를 맡은 스물여덟 개 중, 여덟 곳이 당하였습니다. 하여, 각 문파가 담당하는 네 곳에, 따로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고근동이 머쓱한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고대산파는 문파의 규모가 작아 고작 백 오십여 명이 전부입니다. 가능하다면 저희 쪽 두 군데의 방파는 다른 곳에서 지원해 주셨으면 합니다.”
막상 말을 꺼내고 나니 더 창피하였는지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고대산파의 쇠퇴는 사실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차기 장문으로 내정되었던 고근남이 죽은 이후로 수많은 제자가 고대산을 떠났다.
고근동은 사문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었으나 무공에 있어서만큼은 크게 성취를 보지 못했다. 그나마 매월검 신양선의 명성이 없었더라면 오대산검 사이에 끼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흐음, 그럼 고대산파와 지리상 가장 가까운 황석파에서 두 곳을 더 맡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문파의 규모로는 두타공파 보다도 큰 황석파였기에 조금도 무리가 없었다. 고유생은 거만한 얼굴로 제안을 받아들였다.
‘자존심 강한 신양선이 이 꼴을 보았다면 꽤 재밌었겠군.’
고유생은 내내 진지한 표정으로 일관하였으나 속으로는 퍽 고소한 마음이 들었다. 내들 두문불출하는 장문 대신 대소사를 처리하는 그로서는 사문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오대산검의 시초라는 둥, 역사가 유구하다는 둥, 강호인들이 고대산파를 치켜세울 때마다 늘 감정이 상했다.
“그들이 다음으로 노릴 상단은 운평표국이 아니겠습니까?”
소소정의 물음에 조양은 금세 심란한 표정이 되었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운평표국마저 당한다면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타격이 클 것입니다. 당장 두 달 뒤 큰 거래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모든 전력을 운평표국에 쏟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태을신교가 그것을 예상하고 다른 거점 상단들을 친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이었다.
“칠원성군 중에 이미 둘이 죽었고, 한 명은 무공과 관련이 없는 자이니 우리는 네 명의 동선만 파악하면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를 기습할 때 그들 중 아무도 나타나지 않은 점이 계속 마음에 걸립니다. 혹 이곳에 묶어두려는 목적이 아니었을까요?”
용가현은 되도록 말을 아끼려고 하였으나 아무래도 짐작 가는 바가 있어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했다. 정예 인원을 차출하여 모이자고 건의한 이는 다름 아닌 조상원이었다. 그가 태을신교의 사람이라면 분명 용문파로 이들을 불러 모은 의도가 순수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일리가 있군요.”
조양은 그제야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안개가 걷히는 것 같았다. 운선에 대한 일 때문에 자신이 미처 간과하고 있었던 사실을 용가현 덕분에 깨달은 참이었다.
“그들이 이처럼 빨리 물러갔다면 운평도 가능성이 있습니다.”
고유생 역시 더럭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 성동격서(聲東擊西)! 문천에서 일을 일으켜 계정에 모아둔 연후에 실제로는 전혀 다른 쪽을 칠 요량이 아니었을까?
“이거 큰일 아닙니까? 당장 운평으로 갑시다.”
성질이 급한 고근동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호들갑을 떨었다. 운평이라면 아무리 말을 타더라도 보름은 넘게 걸릴 거리였다. 책상머리에 앉아 수다나 떨 시간이 없었다.
“용사부님!”
그때, 용문파의 시동 하나가 쪼르르 달려와 대청 앞에 무릎을 꿇었다. 꽤 급하게 뛰어왔는지 양 볼이 빨갛게 얼어 있었다.
“무슨 일이길래 이리 방정맞게 행동하느냐?”
용가현은 예의를 중시하는 이였기에 평소 같았으면 아이의 불손함을 꾸짖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태도를 보니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고대산파의 제자 한 명이 피투성이가 되어 고문주님을 뵙기를 청합니다.”
“뭐라고?”
고근동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여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하필 그들의 대화가 무엇이었던가? 성동격서! 고근동은 불길한 예감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숙부님!”
허락을 받은 시동이 재빨리 뛰어나가더니 곧 소년 하나를 데리고 다시 들어왔다. 피와 흙으로 범벅이 된 소년의 모습은 마치 산짐승에게 습격이라도 받은 몰골이었다.
“설마……”
고근동은 한달음에 달려가 바닥에 엎어진 소년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아 올렸다. 그의 하나밖에 없는 조카, 인경이었다.
“아니, 대체 무슨 일이냐?”
“숙……부님, 숙부님, 이제 어찌합니까…….”
인경은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은 고통과 숙부를 만난 안도감이 뒤섞여 제대로 말을 뱉지도 못했다. 그저 숙부의 품에 안겨 목놓아 울기만 했다.
“인경아, 네 꼴이 이게 무엇이냐? 그보다 왜 네가 여기 온 것이냐?”
“태을신교의 두 마두가…….”
인경이 드디어 더듬더듬 이야기를 시작하자 장내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아무리 예전보다 못하다 하더라도 오대산검의 초대 문파인 고대산파였다. 하루아침에 멸문이라니,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것이 고대산파만 기습하지 않은 이유였구나.’
조양은 자신이 성곤에게 완벽하게 졌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아무리 경전에 정신이 팔려있었다고 해도 이렇게 무기력하게 당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고장문, 일단 진정하고 대책을 마련해 봅시다.”
조양이 단상에서 내려와 고근동의 어깨를 잡았다. 그의 성정으로는 지금 당장 뛰쳐나가 태을신교의 본진이라도 찾아갈 것이 분명했다.
“대책? 조맹주! 지금 제 귀에 그따위 말이 들어오겠습니까? 당장 그놈들을 찢어 죽이러 가야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고근동은 눈까지 시뻘게져 펄펄 뛰기 시작했다. 아무리 말을 탔다고 해도 열흘이 족히 걸리는 길을 닷새 만에 당도한 인경은 숙부의 품에 무너지듯 안겼다. 그런 조카의 모습을 보자 아예 이성의 끈을 놓아 버렸다.
“우선 고대산파로 돌아가 상황을 수습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고작 서른 남짓한 인원으로는 검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조양은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설득했다. 그의 말이 일리가 있었기에 흥분한 고근동도 서서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럼 맹주님, 우리 여기서 탁상공론만 할 것이 아니라 같이 태을신교를 찾아갑시다. 옛 려국 땅인 태봉 쪽에 그들의 본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소. 존경하는 오대산검의 여러분!”
고근동은 갑자기 무릎을 바닥에 대고 털썩 주저앉았다. 오대산검의 장문들을 둘러보는 그의 눈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이 무지렁이 같은 놈을 도와달라고는 감히 못 하겠습니다. 허나, 우리는 오랜 친구인 오대산검 아닙니까? 이 원수를 함께 갚아주십시오.”
그의 눈에서는 어느새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절대 검귀 성곤의 옷자락조차 건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존심 따위는 다 버려도 좋았다. 사문의 복수를 할 수만 있다면 무릎을 꿇는 것보다 더한 치욕도 감내할 수 있었다.
“고문주, 나 역시 뼈가 시릴 만큼 비통하네. 허나, 지금 자네를 도와 움직일 형편이 아니지 않은가? 조맹주, 그들의 목적을 알았으니 더는 이곳에서 지체할 수 없게 되었소. 다음이 황석파가 아니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소?”
고유생은 조양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들에게 하산을 재촉하였다. 당장 다음 목표가 황석파가 아니더라도 대비를 해두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고대산파의 일은 안타깝게 되었으나 이제 와 돕는다고 해도 사후약방문이니, 지금은 그저 애도의 마음만 전하면 그뿐이었다.
“고문주, 고대산파와 선운검파는 거리가 멀지 않으니 태을신교의 다음 목표가 우리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남겨둔 제자들은 실전에 약한 이들이라 제가 빨리 돌아가야 대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추후 고대산파로 찾아가 사죄할 것이니 지금은 부디 양해해 주십시오.”
소소정 역시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제자들을 이끌고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고근동은 너무나 황망하여 차마 잡지도 못하고 대청 한가운데 멍하니 서 있었다. 용가현은 아예 고개를 숙여버렸고 조양은 그저 자신을 불쌍하게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이것이 의리라는 것입니까? 평생을 오대산검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아왔으나 인제 보니 한낱 모래알이었군요.”
고근동은 쓰러져있는 인경을 안아 들었다. 장문이 움직이자 비로소 고대산파의 제자들이 달려 나와 장문의 뒤를 따랐다. 눈물범벅이 된 그들의 얼굴에는 슬픔보다도 서러움과 서운함이 역력했다.
“용문파는 이제 어찌하실 겁니까?”
멀어져가는 고대산파를 바라보며 조양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용가현은 천천히 뒤를 돌아 동생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그 시작점조차 잃은 사람들 같았다.
“앞으로 두타공파가 궤(軌)를 같이할 것입니다.”
용가 형제들은 그 자리에서 바로 무릎을 꿇고 절함으로써 무림 맹주의 은혜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였다.
고근동은 측근인 두 장로와 의논하여 일단 고대산에 돌아가기로 했다. 사부님을 비롯한 사형제들의 시신을 수습한 연후에 태을신교에 대한 복수를 의논할 참이었다. 그는 자신의 간절한 부탁을 외면한 오대산검 장문들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고대산파를 업신여긴 게 아니면 무어란 말이냐?’
서러움이 복받쳐 매서운 한겨울 추위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문주님, 아무래도 오늘 밤은 노숙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앞서 객잔을 찾으러 떠났던 제자가 돌아와 곤란한 얼굴로 보고했다. 홧김에 용문파를 뛰쳐나온 터라 마을 간의 거리를 가늠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날이 추워 잠을 잘 수는 없어도 단 몇 시진 정도는 쉬어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다들 피곤할 텐데 몸을 녹이면서 간단하게 요기나 하자꾸나.”
제자들은 서둘러 행장을 내리고 불을 피우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사형제들의 피습 소식에 마음이 참담하였기에 누구도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고대산파 제자들 모두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차디찬 주먹밥을 입속에 꾸역꾸역 넣고 있었다.
“인경아, 그래도 뭘 먹어야 기운을 차리지.”
인경은 숙부가 주는 주먹밥을 받아들었으나 차마 먹지 못하고 멀뚱히 바라만 보았다. 거의 닷새 동안 물만 겨우 마셨을 뿐이지만 허기를 느끼지 못했다.
“숙부님, 복수하고 싶습니다.”
“암, 당연히 그래야지.”
근동은 조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시원하게 대답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것이 불쌍하여 마치 아들처럼 챙겼던 조카였다. 이제는 아들과 다름이 없었다. 다른 이가 아니라 인경이 살아 있음에 누구보다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인경아, 이 숙부는 네 아버지에 비해 많이 부족하지만 너는 다르다. 열심히 노력한다면 반드시 나는 물론이고 네 아버지, 태사부님까지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숙부님.”
그래도 남은 이들이 있으니 고대산파를 재건할 수 있을 것이다. 인경의 마음 끝자락에서 작은 희망이 몽실몽실 피어올랐다. 고근동이 함께 있으니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 같았다. 인경은 숙부에게만 보이도록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누구냐?”
그때, 적막을 뚫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근저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두 제자의 고함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인경의 눈에 바위처럼 커다란 검은 그림자가 들어왔다. 그 그림자의 손에는 자신의 키보다 한참 큰 묵직한 창이 들려 있었다.
“마진건!”
그의 옆에 서 있던 숙부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 성동격서 (聲東擊西) :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에서 적을 친다는 뜻으로, 적을 유인하여 이쪽을 공격하는 체하다가 그 반대쪽을 치는 전술을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