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阿修羅場(아수라장)
인경이 필사를 다 마치고 나니 자시(子時)가 훌쩍 지났다. 내내 내력을 써서 몸을 데우고는 있었으나 그의 능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추위였다.
‘태사부님은 가끔 심술을 부리신단 말이야.’
그는 누구보다 태사부를 존경했지만, 가끔 그 지나친 공명심과 고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슬슬 내려가 볼까?”
낮부터 쏟아져 내린 눈 때문에 내려가는 길이 여간 미끄럽지 않았다. 조심한다고 했는데도 벌써 두어 번 자빠진 터라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그래도 따뜻한 화로 앞에서 고구마를 구워 먹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오늘따라 달도 없는 캄캄한 밤이었다. 평소 현문 앞을 밝혀야 하는 등불이 보이지 않자 인경은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매서운 바람결에는 달큼한 비린내가 느껴지기도 했다.
‘설마…….’
인경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태사부의 평온했던 마지막 얼굴을 떠올리며 공연한 기우(杞憂)일 거라고 수만 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현문을 열자마자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헉!”
눈 앞에 펼쳐진 전경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수십 구의 시체가 마당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을 잔뜩 덮은 하얀 눈 위로 군데군데 붉은 웅덩이가 보였다. 웅덩이에 고인 피는 또 다른 웅덩이와 합쳐져 마치 냇물처럼 현문 앞까지 흘러내렸다.
“사부님, 태사부님!”
차마 사형제들의 시체를 확인하지 못하고 멀뚱히 서 있던 인경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태사부님 같은 절대 고수라면 반드시 살아계실 것이었다. 비록 이들은 희생되었으나, 남은 장로님과 사형제들을 구해 후일을 도모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인경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심지어 눈물도 나지 않았다. 사형제들의 절단된 시신들을 피해 걸으면서도 아직 울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끼이익.
대청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인경은 진한 피비린내에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코를 막았다. 어렴풋이 비치는 불빛에 언뜻언뜻 보이는 것은 마당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손으로 벽을 짚자 끈적한 무언가가 잔뜩 묻어나왔다. 인경은 끔찍한 현실에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으나 입만 벙긋거릴 뿐, 목구멍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헉!”
그때 인경의 발밑으로 무언가 물컹한 느낌이 들었다. 누구의 시체인가 싶어 바닥에 주저앉았는데 더듬어 만져보니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인경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심스럽게 누워있는 이를 흔들어 보았다.
“으으으…….”
“아아!”
인경은 그가 살았음을 확인하자 서둘러 벽 쪽에 아슬아슬하게 꺼져가는 촛불을 가져와 얼굴을 비췄다. 피범벅이 되어 알아보기 어려웠으나 옷차림을 보니 자신의 사형제임이 분명했다.
“너……너는…….”
“사형…….”
십 대 제자 중 가장 어린 영준이었다. 이제 열넷이 된 그는 인경을 알아보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괜찮으냐? 이게 어찌 된 것이냐?”
인경이 다 쉰 목소리로 재차 묻자 영준은 숨을 헐떡이며 인경의 손을 꼭 쥐었다.
“태을, 태을신교의 마두들이었습니다.”
그는 신양선이 현문 앞에 서서 금선(禁線)을 그릴 때만 해도 이와 같은 지옥도가 펼쳐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물론 사형제 중에는 공포에 질려 떠나버린 이도 있었다. 심지어 장로 중에서도 현문을 넘어간 이가 있었다. 그러나 사문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 영준은 그들이 비겁하다 생각했다.
“그…그때…도, 도망쳐야…했습니다.”
단 두 사람이었다. 기괴한 가면을 쓴 이들이 고대산파를 빙 둘러싸고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지키고 있었으나 실제로 살육을 벌인 이들은 단 두 사람이었다. 적우의 무식한 칼이 사형제들을 무참히 벨 때, 그는 자신이 흡사 악귀를 만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더 무서운 쪽은 이서문이었다. 수십의 고대산파 제자들을 쓰러뜨리면서도 그의 새하얀 부채에는 피 한 방울 튀지 않았다. 얼굴에는 마치 관음보살처럼 은은한 미소를 띠고는 생명이 붙어 있는 이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명줄을 끊었다.
“태사부님은?”
영준의 몸을 받치고 있는 인경의 손이 덜덜 떨렸다. 아무리 그래도 태사부님은 그 유명한 매월신검이 아닌가? 그들이 아무리 대단하다 하여도 그리 허망하게 쓰러지실 분이 아니었다.
“으으.”
영준은 피를 울컥 토해내며 힘겹게 손가락을 들었다. 그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익숙한 검(劍)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설마…….”
인경은 기둥에 영준을 조심스럽게 기대 놓고는 검이 떨어진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 화려한 검광은 사라졌으나 검날에 새겨진 특이한 문양을 보니 매월검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태사부님?”
검 자루에는 눈에 너무나 익숙한 늙은 손 하나가 팔뚝에서 끊어진 채 매달려 있었다. 인경은 그제야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태사부님의 시체가 주변에 있을 것이 자명했으나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다리가 후들거리더니 그대로 무릎이 크게 꺾였다.
짝!
짝!
인경은 자신의 손으로 양 뺨을 연달아 휘갈겼다.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니 꿈인 것 같았다.
‘그래, 이게 사실일 리 없어. 아무렴. 고대산파가 무어냐? 오대산검의 시작이 아니더냐?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참, 또 한참의 시간이 흘러도 꿈은 깨지 않았다. 여전히 현실을 부정하는 인경의 뺨만 계속 부어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이제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운선의 비장한 물음에 성곤은 배꼽이 빠지도록 웃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윤설이 고약한 성미라며 할아버지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운선은 성곤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에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았으니 방법을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성곤은 드디어 웃음을 멈추고 운선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우선 태을신교가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야겠지.”
“네.”
어쩌면 그것이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스승의 복수를 위해 시작한 여정이었으나 이제는 더 많은 이들의 염원을 담아야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명분이 생겼으니 그저 이뤄가면 될 일이었다.
“경국은 열두 개의 주(州), 그 아래 스물여덟 개의 소주(小州)로 나뉘어 있다. 각 소주에는 오십여 개의 문파가 있으며 이는 오대산검의 관할 아래 각자의 소임을 다하고 있지.”
운선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동, 서, 남, 북 그리고 중앙의 명산(名山)을 근거지로 하여 만들어진 다섯 개의 거대 정파는 지역을 다섯으로 나눠 고을을 수호하고 정비하는 역할을 해오고 있었다.
“지난 십수 년간, 스물여덟 개의 소주(小州)에 있는 중소 방파들은 려국의 문화와 역사를 훼손하는 것도 모자라, 수많은 려국인을 잡아 와 타국에 팔아 왔다.”
윤설은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시작되자 금세 코를 훌쩍이기 시작했다. 운선이 그녀를 만난 이후로 웃는 낯이 아닌 적이 없었건만, 지금은 누구보다 서러운 얼굴이었다.
“너의 아버지, 그러니까, 려국의 마지막 왕이었던 창현은 려국의 영토와 모든 권한을 경국 황실에 넘기는 조건으로 려국인의 안전을 걸었다. 그러나 후안무치(厚顔無恥)한 경국인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운선은 무릎까지 덮인 이불을 있는 힘껏 부여잡았다. 심장이 어찌나 쿵쾅거리는지 속이 울렁거려 목구멍으로 신물까지 올라왔다.
“연반표국, 일심방, 그 외에도 우리가 멸문한 여덟 곳의 방파는 모두 려국인들을 인신매매하여 이동하는 거점 상단이었다. 아, 그리고 이번 일의 핵심, 송림표국!”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순간, 성곤은 주먹으로 동굴의 내벽을 거세게 내리쳤다. 그 육시(戮屍)를 해도 모자랄 놈들을 생각하니 새삼 눌러놨던 분노가 다시 차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놈들은 동족을 팔아먹은 매국노들이다. 같은 려국인으로서 어찌 그런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짓을 할 수 있는가?”
윤설은 결국 참았던 눈물을 왈칵 터뜨렸다. 아무리 세상 풍파를 일찍 겪었다지만 아직 어린 그녀가 감당하기에 너무 끔찍하고 참담한 현실이었다. 운선은 자신은 울 자격조차 없는 것 같아 감히 눈물을 떨구지 못하고 입술만 꽉 깨물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의 목표는 려국인을 핍박하는 방파를 무너뜨리고 그들을 암묵적으로 두둔하는 오대산검을 쓸어 버리는 것이야.”
성곤은 드디어 분노를 가라앉히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겨우 몇백에 지나지 않는 태을신교가 오대산검을 무너뜨리는 것은 달걀로 바위 치는 격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에게는 려국인을 지켜야 하는 사명이 있었다.
“송림표국의 일을 미끼로 조상원은 오대산검의 장문과 주요 인재들을 이곳 용문산으로 불러 모았지. 혹여 그들이 의심하지 않도록 매복과 기습을 하여 우리가 용문파 근방에서 일을 꾸미고 있음을 충분히 시사하면서 말이야.”
성곤은 자신이 생각해도 기가 막힌 작전이라 여겼는지 얼굴 가득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시작은 고대산파, 빈 산을 무너뜨리는 것만큼 쉬운 일이 어디 있나?”
운선은 그제야 이서문이 무림대회에서 걸었던 두 가지 조건이 미끼임을 깨달았다. 태을신교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첫 번째 조건 때문에 오대산검은 그들이 거대한 공작을 꾸민다고 의심하게 되었다. 또한, 무림대회를 열지 말라는 두 번째 조건을 거는 바람에 그들은 역으로 은밀히 정예 인원을 차출하게 된 것이었다. 그 미끼를 이용하여 무려 사 년을 기다린 뒤에 낚을 줄 누가 알았을까? 수년에 걸친 치밀한 계획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네 할 일은 우선, 결심하는 것이다.”
성곤은 운선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애국심? 죄책감? 애초에 그런 것은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분노와 투지. 그 두 가지면 충분하였다.
“호랑이 바위에서 뛰어내릴 때부터 결심은 이미 섰습니다. 네, 아직 려국인이라는 자각도 없고 신념도 없습니다. 허나, 제 목숨을 살리려 했던 이유와 그에 대한 책임감은 충분히 깨달았습니다.”
운선은 앉아 있는 것도 힘겨웠으나 제대로 모양새를 고쳐 성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백님, 그러기 위해서 저는 강해져야 합니다. 더는 목숨을 의탁하며 겨우 연명하는 삶은 싫습니다. 강해지고 싶습니다.”
바닥에 머리를 크게 조아리자, 그의 연약한 이마에서 대번에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태을신공을 이미 외우고 있다 했느냐?”
“네. 하지만 혼자서는 익힐 수 없었습니다.”
적우가 이미 1단계를 알려 준 일은 알고 있었다. 비록 내규를 위반한 일이었으나 어찌 보면 더 수월하게 된 셈이었다. 태을신공은 1단계를 익히는 데에만 완공의 8할이 소요되었다.
“느린 대신에 꼼꼼하게 기초를 잘 닦아 놓았더구나. 또한,”
성곤은 흐뭇한 얼굴로 윤설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직접 운선의 맥을 짚어 누구보다 그의 몸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오라버니의 스승님은 부러 무공을 가르치지 않은 것 같아요. 오라버니의 단전에 있는 주요 혈맥을 모두 닫아 놓아 애초에 무공을 익히기 어려운 기질로 바꿔놓았더군요.”
뜻밖의 말에 놀라 눈만 끔뻑거리는 운선을 바라보며 윤설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덕분에 오라버니가 여태 살아 있는 것이었어요. 우영 사형이 주입한 화기가 워낙 강해 아무리 신공의 1단계를 익혔더라도 3년을 넘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심지어 팔을 잘라내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윤설은 의술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자 신이 났는지 얼굴 가득 홍조를 띠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야기인즉슨, 세상으로부터 운선을 지키고자 했던 율천의 사랑이 운선의 목숨을 살렸다는 것이다.
“오라버니가 혼절한 동안에 막힌 혈맥은 모두 뚫어 놓았으니, 태을신공만 완공한다면 팔이 낫는 것은 물론이고 내력으로는 오라버니를 이길 이가 강호에 손꼽을 것입니다.”
성곤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은 전혀 모르고 있으나 운선은 무공을 익히기에 완벽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머리도 비상하여, 하나를 알려 주면 열을 깨우치니 자신의 일곱 제자와 비교해도 자질만으로는 누구보다 월등했다.
“사백님, 그런데 말입니다.”
기뻐할 줄 알았던 운선이 의외로 꽤 곤란한 얼굴이 되어 물었다.
“제가 외운 태을신공은 무려 일곱 단계가 있었습니다. 분명 적우 형님은 다섯 단계라 하였는데 혹, 제 기억이 잘못된 것일까요?”
운선의 표정에 순간 긴장했던 성곤은 안심이 되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다, 제대로 외운 것이 맞다. 원래 태을신공은 일곱 단계다. 내가 우둔하여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성곤의 대답에 운선의 얼굴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태을신공은 2단계조차 익히기 어렵다는데 제가 완공을 할 수 있을는지요.”
성곤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자리에 벌렁 누워 버렸다. 그리고는 곧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며 자는 것이 아닌가? 운선은 어리둥절하여 멍하니 윤설 쪽을 바라보았다.
“안타깝게도 오라버니는 제가 만진 골격 중에 최고의 기골을 타고났답니다. 우리 할아버지 성정으로 보아 배우기 싫어도 배울 수밖에 없을 거예요. 청출어람(靑出於藍)! 할아버지 꿈이 그런 제자를 꼭 만드는 거였거든요. 에구, 그만 고민하고 어서 잠이나 자 두세요. 앞으로 고생길이 열렸어요.”
운선은 키득거리는 윤설에게 더는 되묻지 못하고, 머리만 긁적거리고 있었다.
*** 아수라장(阿修羅場):
싸움이나 그 밖의 다른 일로 큰 혼란에 빠진 곳. 그런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