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我田引水(아전인수)
고대산 줄기를 타고, 때 이른 하얀 눈이 소복이 쌓였다. 산 바로 아래 위치한 영암 마을은 지대가 높아 차가운 바람을 올곧이 맞았다. 그 추위에도 마을 아이들은 연날리기에 한창이었다.
“마치 하늘에 징검다리가 생긴 것 같구나.”
매월 신양선은 고대산 제일 높은 봉우리에 앉아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안에 다 쥘 것 같았던 세상이었으나 막상 손바닥을 펴고 보니 바람 한 점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하니,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이로구나. 세상의 모든 것은 허상과 같아 집착을 버려야 한다더니, 그 말이 또한 맞는구나.” (<금강경(金剛經)> 中 일부 발췌)
사 년 전 무림대회에서 중상을 입기는 했으나 극복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장문 직을 내려놓은 이유는 지난 과거에 대한 후회 때문이었다. 날로 무너져가는 고대산파의 위상을 위해 시작한 일이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나서야 욕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태사부님!”
숨을 헐떡거리며 올라온 이는 죽은 고근남의 아들이자 매월검의 십 대 전승자인 인경이었다. 비록 자질이 뛰어나지는 않았으나 맑고 바른 성품 때문에 유달리 신양선이 예뻐하는 아이였다. 인경의 얼굴을 마주하자 마른 나뭇가지처럼 메마른 그의 얼굴에도 가느다란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호흡이 흔들리는 것을 보니 아직도 반월경(半月經) 3절을 다 깨우치지 못한 게로구나. 어찌 그리 게으른 것이냐?”
마음과 달리 신양선은 엄한 목소리로 어린 제자를 꾸짖었다. 때가 되면 자신의 내력 모두를 전수해 줄 생각이었기에 빨리 그의 그릇을 단단하게 만들고 싶었다.
“태사부님, 본파에 손님이 찾아오셨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장로님들께서 어서 태사부님을 모셔오라 하여…….”
인경은 숨을 채 고르기도 전에 태사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상황의 위급함을 알렸다. 딱히 어떤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으나 불길한 마음에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하필 장문과 사숙들이 자리를 비운 때라 더 심란한 것인지도 몰랐다.
“으음, 손님들의 용모(容貌)가 어떠하냐?”
신양선 역시 의심되는 바가 있어 표정이 심각해졌다.
“중년의 서생은 말쑥한 미남자였는데 피부가 하얗고 손이 고운 것으로 보아 평범한 선비인 듯했습니다. 반면 젊은이는 이목구비가 큼직하고 눈썹이 유달리 짙어 무식하게 생겼는데 덩치가 커서 그런지 그에 맞는 큰 칼을 등에 짊어지고 있었습니다.”
“혹, 서생이 산수(山水)가 그려진 부채를 들고 있더냐?”
“네, 어찌 아셨습니까? 아는 이들입니까?”
신양선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언젠가는 겪을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시기가 또한 너무 일렀다. 적어도 고근동이 장문으로서의 자질을 갖출 때까지만이라도 유예하고 싶었으나 그 또한 자신의 욕심이었다.
“인경아.”
“네, 태사부님.”
인경은 차분한 태사부의 표정을 보자 내심 마음이 놓였다. 위협적인 인물들이었다면 이렇듯 평온하게 자신을 부르지 않았을 터였다.
“내 오늘 이곳에서 반월경 18절을 필사(筆寫)하고 돌아가려 했으나 오랜 친구가 찾아와 마무리할 수가 없게 되었구나. 나 대신 네가 해야겠다.”
이 추위에서 내전 무공 구결을 쓰라니, 벌도 이런 벌이 없었다. 인경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태사부에게 먹히지도 않을 애교를 부렸다.
“필사는 어렵지 않으나, 내려가서 쓰면 아니 되겠습니까? 지금부터 시작하면 아무리 빨리하여도 새벽은 돼야 끝이 날 텐데 오늘 같은 날씨에 얼어 죽습니다.”
그러나 신양선은 그의 간절한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반드시 이곳에서 끝을 맺은 후, 내려오너라.”
그는 울상이 된 인경을 그 자리에 남겨둔 채 바위 위를 미끄러지듯 내려가 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이를 시키는 건데…….”
인경의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한줄기 차가운 바람이 그의 솜털이 보송보송 난 얼굴을 할퀴고 지나갔다.
현문 앞에는 벌써 두 식경이 넘게 실랑이가 이어지고 있었다.
“지금 장문인은 출타하셨고 장로님들은 폐관 수련에 들어가셨으니 다음에 오십시오.”
말은 제법 공손하게 하는 듯하였으나 고대산파의 십 대 제자들은 두 명의 불청객에게 칼을 겨누고 있었다. 여차하면 진(陳)을 만들어 공격을 개시할 심산이었다.
“이런 조무래기들을 상대해야겠습니까?”
적우는 자신의 도(刀) 행덕을 어깨에 짊어지고는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새파란 소년들을 못마땅하게 둘러보았다. 자신들을 몰라보는 것을 보니 무공을 배운 지도 얼마 되지 않는 햇병아리들인 것 같았다.
“이곳이 감히 어딘 줄 알고 이리 건방지게 구는 것이냐?”
적우에 말에 자극을 받은 어린 제자 하나가 앞으로 나서 야무지게 따져 물었다.
“꼬마야, 딱 봐도 내가 너보다 곱절은 더 오래 산 것 같은데 말이 너무 짧구나.”
적우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리자 인상이 훨씬 험악해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몸에서는 강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칠 대 제자들은 다리가 덜덜 떨려 서 있기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매월선생을 먼저 봬야겠으니 자네들은 비켜 주게나.”
이서문은 흥분한 적우를 눈짓으로 진정시킨 다음, 고대산파 제자들에게 길을 열어주기를 청했다. 말투는 제법 친절하였으나 어딘지 모르게 위압적인 태도였다.
“이대협, 오랜만이오.”
가늘고 날카로운 쇳소리가 그들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어느새 봉우리에서 내려온 신양선이었다.
“매월선생, 고대산파의 손님 접대가 참으로 서툰 것 같습니다. 제 인내심이 막 바닥을 드러내던 참이었는데, 조금만 늦으셨으면 제자들의 얼굴을 영영 보지 못 할 뻔하셨습니다.”
이서문은 유달리 하얀 이를 잔뜩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신양선은 섬뜩한 그의 말뜻을 짐짓 모르는 척하며 아직도 칼을 겨누고 있는 제자들을 뒤로 물렸다.
“들어갑시다.”
신양선이 신호하자, 굳게 닫혔던 대청의 문이 스르르 열렸다. 돌로 엮은 긴 복도와 함께 고대산파의 오랜 역사가 한눈에 들어왔다.
“장관이군요.”
적우는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망각한 채, 눈이 휘둥그레져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록 명성이 많이 쇠퇴하였으나 과연 오대산검의 시초라 할만한 위엄이었다.
“태사부님!”
대청에 모인 여덟 명의 장로와 그의 제자들이 신양선이 들어서자 모두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태을신교의 방문에 겁을 잔뜩 먹었던 그들은 신양선의 등장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손님 접대를 이렇게 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은가?”
신양선은 대청 정중앙에 서더니만, 불현듯 호통을 쳤다. 분명 장로들에게 내지르는 소리 같았으나 어쩐지 자신들에게 하는 말인 것 같아 적우는 심히 기분이 불쾌하였다.
“대사형, 저 늙은이가 무슨 꿍꿍이랍니까?”
이서문은 예의 그 비웃는 표정으로 신양선이 하는 꼴을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대협, 늙은이가 대신 사과하겠소.”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휘적휘적 걸어가더니 장로들이 비워둔 상석에 올라가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그러나 이리 불쑥 찾아온 것도 법도가 아니니, 차 대접은 못 하겠소. 이 늙은이가 나이가 많아 차마 배웅을 할 처지가 아니니 알아서 살펴 가시구려.”
그제야 장로들은 신양선의 의도를 깨닫고 저마다 실소를 터뜨렸다. 어디 감히 사파의 마두들이 신성한 오대산검의 성지에 발을 들일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모두 사 년 전의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통쾌하게 복수는 할 수 없을지언정 망신이라도 주고 싶었다.
“호의(好意)로 왔는데 적의(敵意)를 만드시니 퍽 안타깝습니다.”
이서문은 한쪽 입꼬리를 삐쭉 올리며 웃더니 오른손에 쥐고 있던 부채를 활짝 펼쳐 들었다. 천천히 흔들 때마다 부채에 그려진 물결이 잔잔하게 흔들렸다.
“오늘 해시(亥時)까지 시간을 드릴 것입니다. 살고 싶거든, 그 안에 이곳을 벗어나십시오.”
“뭐라?”
“네 이놈!”
대청 안에 있던 고대산파의 제자들은 깊은 충격과 분노에 저마다 욕설을 내뱉었다.
“부디 많은 이들이 현명한 선택을 하기 바랍니다.”
서문은 신양선을 비롯한 장로들의 얼굴을 쓱 휘둘러보더니 곧 등을 돌리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뒤따르던 적우가 행덕을 크게 휘두르며 덧붙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행덕으로 쓸어버리고 싶지만, 너희를 불쌍히 여겨 기회를 주는 것이니 살아남거든 평생 마음에 새기고 고마워하여라.”
적우가 호탕하게 웃으며 사라지자 대청은 기묘한 정적만이 남았다.
“이를 어찌합니까?”
“설마 저 두 놈이 전부는 아니겠지요?”
“우리 모두 보았지 않습니까? 저 두 사람만으로도 고대산파는 멸문입니다.”
장로들이 저마다 다른 의견을 제시하였으나 마음속에 지우지 못하는 감정은 단 하나, 공포심이었다. 실질적으로 본파를 이끄는 이들이 부재한 상황에서 늙은 장로들과 어린 제자들만으로는 고대산파를 지키지 못할 것이 뻔했다.
“차라리 후퇴하여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누구도 차마 마음속의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을 때, 신양선의 사형이자 장로 중에서도 가장 원로인 백천이 머뭇거리며 나섰다. 아흔을 훌쩍 넘긴 그는 고대산파의 산 증인과도 같은 존재였다.
“적어도 어린 제자들은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색하지는 못했으나 장로 몇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뻔히 죽을 것을 알면서 불구덩이에 뛰어들고 싶지는 않았다. 잠깐의 치욕만 참아낸다면 복수는 이후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었다.
“사형,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신양선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백천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이백여 년을 지켜온 고대산파입니다. 감히 누가 이곳을 더럽힐 수 있단 말입니까?”
신양선의 노기 어린 목소리가 대청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두려움에 들썩이던 장내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경건해졌다. 백천 역시 더는 대꾸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쓰러져가던 고대산파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이가 누구였던가? 신양선에게 대들 수 있는 이는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울혈이 가슴까지 올라온 신양선은 얼굴이 점점 붉어지더니 순식간에 눈의 실핏줄마저 모두 터졌다. 그는 붉어진 눈으로 제자들의 얼굴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어떤 이의 눈에는 원망이, 또 어떤 이의 눈에는 절망이 담겨 있었다.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졌구나.’
신양선은 마지막 승부수를 띄우기로 마음먹었다. 긴 복도를 지나 현문 앞까지 성큼성큼 나아간 그는 매월검을 뽑아 들었다. 망설이지 않고 검을 바닥에 내리긋자, 돌 위에 반듯한 선 하나가 굵고 곧게 그려졌다.
“누구든 떠나고자 하면 잡지 않겠다. 다만 이 선을 넘는 자, 더는 고대산파의 제자가 아니다!”
하늘에서 하나둘, 눈송이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 중 누군가는 분명, 그 눈이 굵어져 현문 앞에 그어진 선을 영영 덮어 버리길 바라고 있었다.
*** 아전인수(我田引水):
자기 논에만 물을 끌어다 쓴다는 뜻. 자기에게만 유리한 일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