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結者解之(결자해지)
“운선아!”
이름을 부르짖으며 달려갔으나 그의 옷깃조차 손에 닿지 않았다. 주운은 망연자실하여 바위 위에 주저앉았다.
“이럴 수가!”
혼란스럽기는 오대산검의 장문들도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하여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니 시체는커녕 머리카락 한 올도 남지 않았을 것 같았다.
“현로선생!”
고유생은 노여움을 이기지 못하고 허연 수염을 바르르 떨며 조양에게 손가락질했다.
“왜 아이를 자극하여 일을 그르쳤단 말이오!”
방금까지만 해도 도평을 죽인 일에 쾌재를 불렀던 그였으나, 막상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자 조양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었다.
“내 사랑하는 제자까지 죽여가며 드린 기회가 아닙니까?”
조양은 불쾌한 기분을 숨기지 않고 호통을 쳤다. 운선이 죽은 일은 어쩔 수 없었으나 마지막까지 자기를 비웃는 그 얼굴에서 자꾸 율천의 모습이 겹쳐졌다.
“일단 진정하시고 차근차근 다음 일을 논의해 봅시다.”
눈치가 빠른 소소정은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앞으로 나서 두 사람을 말렸다. 운선이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누구보다 절망에 빠졌던 그녀였지만 문득 바라본 조양의 얼굴에서 또 다른 희망이 보였다.
‘만약 조양이 아무것도 못 알아냈다면 저리 평온한 표정일 리 없지. 다른 방도가 있거나 이미 알아낸 것이 있다는 뜻.’
괜히 그의 심기를 건드릴 이유가 없었다. 조금의 실마리라도 얻어내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소소정은 이편도 저편도 들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고근동의 어깨를 툭툭 쳤다.
“몰래 절벽 아래로 사람을 보냅시다. 혹시 모르니 시체라도 찾아보자고요.”
근동은 소소정의 지혜에 새삼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은 그녀와 협력하는 것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고유생 역시 조양과 싸워서 득 될 것이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소매를 크게 펄럭이며 뒷짐을 지고 내려가 버렸다.
장문들이 자리를 비우자 비로소 조양은 물끄러미 주운 쪽을 바라보았다.
“주낭자! 이제 본파에 남을 일이 더 있나?”
조양의 비아냥에 주운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은 텅 비어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자네도 운선이를 감시하지 않았나? 이제 와 마치 진정으로 마음이라도 나눈 것처럼 구는 게 우습지 않은가?”
조양의 한마디 한마디가 주운의 가슴에 날아와 콕콕 박혔다. 조금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서 진정으로 운선을 위한 마음이 얼마만큼인지 자신도 전혀 알 수 없었다.
‘과연 나에게 책임이 없을까?’
평생 후회라는 감정을 느껴본 적 없는 주운이었다. 조양에게서 눈길을 거둔 그녀는 잠시 후 숨을 헐떡이더니 그대로 혼절하여 바위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사저, 사저!”
뒤늦게 따라온 형진은 헉헉거리며 언덕으로 올라왔다. 그의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주운이었으나, 자연스럽게 그 옆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곽……도평?”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도평의 시체를 본 형진은 믿을 수 없어 여러 차례 눈을 비볐다. 비틀비틀 걸어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의 목덜미를 짚은 형진은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사부님!”
감정을 담지 않은 조양의 냉정한 눈이 이번에는 그의 첫 제자에게로 향했다.
“어째서 도평을 죽인 것입니까?”
그의 목에 박힌 대침이 스승의 암기임을 모를 수 없었다.
“안타깝게 되었다.”
조양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이 아이가 아니었다면 동굴의 출입구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공을 치하하지는 못할망정 어찌…….”
도평에 대한 애정보다는 죄책감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십여 년을 자기 뒤꽁무니에서 어떻게든 마음에 들고자 노력했던 아이였다. 비록 끌어줄 정도는 아니었더라도 수하에 둘 만큼 친밀한 사이였음은 틀림없었다.
“인명은 재천(在天)이라. 오늘이 그 아이의 명이 다하는 날이었을 뿐이다.”
형진은 도평을 받치고 있는 그의 왼손을 있는 힘껏 꽉 쥐었다. 분명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스승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쉬이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어쩌면 그 때문에 더 우러러보기도 하였다. 대의(大意)를 이루기 위해서는 숱한 희생이 따르는 법이니까.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스승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이제 운선이 죽었으니 어쩌실 겁니까?”
다소 쌀쌀맞은 형진의 대답에 조양은 코웃음을 쳤다. 백형진이야말로 곽도평을 실컷 이용해 왔던 당사자가 아니었던가? 죄책감 따위를 견디지 못해 저리 칠칠치 못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보니 영 그릇이 작다고 느껴졌다. 그에 반해,
‘용기와 기지, 어느 것 하나 처지는 부분이 없었다. 아깝게 되었어.’
조양은 운선에 관한 생각을 지우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안이 있다.”
“네?”
던지듯이 툭 뱉은 조양의 말에 형진의 눈이 탁 떠졌다.
“일부이긴 하지만 경전의 내용을 아는 이가 한 명 더 있다.”
조양은 형진을 바라보던 시선을 그대로 옆쪽으로 옮겼다.
“설마……?”
“검선이 왜 주운을 운선의 옆에 붙여 두었겠느냐? 경전의 내용이 알고 싶어서? 흥, 아니다. 자신이 아는 내용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미 십수 년 전에 내가 원하는 그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나에게 태을신공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다. 검선이 알고 있는 그 암호, 그것만이 필요할 뿐.”
형진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주운을 찬찬히 내려다보았다.
“제가 반드시 알아내겠습니다.”
“하긴, 네가 방법일 수도 있겠지.”
형진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조양은 성큼성큼 바위 언덕을 내려가 버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꾸벅꾸벅 졸고 있는 노인의 얼굴이었다. 운선은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리다가 몰려오는 통증에 자신이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깨달았다.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니 일전에 우영을 만났던 그 동굴 안이었다.
“일어나셨어요?”
반가운 목소리가 운선의 등 뒤로 쏟아졌다.
“아니, 그럼…….”
윤설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운선을 바라보다가 졸고 있는 성곤을 세차게 흔들었다.
“할아버지, 오라버니가 깼어요.”
“으응?”
성곤은 천천히 기지개를 켜더니 게슴츠레한 눈으로 운선을 쳐다보았다.
“쯧쯧, 아무리 상처가 깊다 한들, 어찌 사흘을 내리 혼절해 있누? 아주 약골이구먼, 약골.”
“어르신…….”
운선은 이 두 사람의 정체를 고민하느라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조상원의 말에 따르면 태을신교의 인물들임이 분명한데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었다. 눈치가 빠른 윤설은 운선의 당황한 표정을 보고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어이구, 일단 뭐라도 좀 먹어요. 애써 구해냈는데 굶어 죽으면 꼴이 우습잖아요.”
그녀는 밤새 끓인 어죽을 운선의 앞으로 들이밀었다. 고소한 냄새가 코끝에 닿자 극심한 허기가 느껴졌다.
“흥! 뭐가 예뻐서 이런 놈을 위해 그 정성을 다하느냐?”
성곤은 못마땅한 얼굴로 끊임없이 이죽거렸다. 오랜 지우(知友)였던 조상원의 죽음이 그의 마음을 온통 헤집어 놓았다. 좀 더 일찍 마음을 결정했더라면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자책이 되어 그를 괴롭혔다.
운선은 눈치가 보여 차마 죽을 먹지 못하고 멍하니 그릇만 들고 있었다. 차차 기억이 제자리를 찾아가자 명치 끝이 조금씩 아파 왔다.
“할아버지를 이해해 주세요. 오라버니에게 뭐라 하는 것이 아니니 주눅 들지 말고요.”
윤설은 운선의 죽그릇을 다시 받아들고는 한 숟가락씩 떠서 그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그 정성이 고마워 운선은 꿀꺽꿀꺽 죽을 삼켜 넣었다. 뱃속이 차츰 따뜻해지면서 정신이 조금씩 맑아지는 것 같았다.
“혹, 사백님입니까?”
죽을 다 먹은 후에 운선은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곳곳이 골절되어 무릎을 꿇을 수는 없었으나 최대한 예의를 다하고 싶었다.
“사백? 흥, 나에게는 사제가 없다.”
성곤은 눈을 내리깔고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윤설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나요? 검신 강율천은 엄연히 할아버지의 사제가 아닙니까? 없던 일로 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나요?”
성곤은 윤설의 말이 틀리지 않아 짜증이 났지만, 티 내고 싶지 않아 눈을 감아 버렸다. 천하에 괴팍하기로는 일등인 그였으나 손녀에게만은 세상 약했던 것이었다.
“사백님께 인사 올립니다.”
운선은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성곤에게 두 번 절했다. 그가 자신에게 인연인지 악연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운선에게 가장 필요한 이였다. 마음속에 가득 품고 있는 수많은 질문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사백님, 제가 왜 살아야 하는지 알려 주십시오. 이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운선은 바닥에 넙죽 엎드린 채로 왈칵 눈물을 쏟았다. 그동안 참았던 설움과 외로움이 한 번에 복받쳐 올라왔다.
“뭐라?”
눈을 부릅뜬 성곤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저따위가 뭐라고 스승님도 사형도, 심지어 조문주님도……. 차라리 죽고 싶습니다…….”
성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달음에 운선에게로 다가왔다. 곧장 엎드린 운선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서는 그의 왼뺨을 강하게 후려쳤다.
“찢어진 입이라고 함부로 놀리는구나! 그래, 너 따위가 뭐라고 상원이 그 귀한 목숨을 버렸단 말이냐?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구나!”
윤설이 쪼르르 달려와 막지 않았다면 운선의 뺨이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오라버니, 정신 줄을 똑바로 잡으세요. 조숙부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세요.”
윤설의 눈에 맺힌 눈물을 보자 운선은 가슴 깊은 곳에서 묵직한 바위 같은 것이 느껴졌다.
‘이제부터 이들의 목숨값을 책임져야 한다. 나는 멋대로 죽을 수도 없는 목숨이다.’
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성곤은 동굴 벽에 기대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어린 나이에 온갖 고초를 겪은 운선이 불쌍한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지금 치밀어오르는 이 화는 자신에게 내는 것인지도 몰랐다. 멍청하게 과거에 얽매어 얼마나 많은 일을 그르쳤던가?
“조상원의 집안은 대대로, 려국 왕실을 지켜왔다. 그의 아버지도, 또 그의 조부도 그러했지.”
성곤은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이처럼 다른 이의 이야기를 주절거리는 것은 윤설이 아는 한, 이번이 처음이었다.
“려국의 왕실이 완전히 무너지고, 우리는 긴 전쟁을 준비하기로 했다.”
일, 이년에 끝날 싸움이 아니라는 것은 그들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경국 내부에 깊숙이 침투하여 그들의 사정을 속속들이 전할 간자(間者)가 절실히 필요했다. 조상원의 아버지는 그것이 제 아들에게 가장 적합한 역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종의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지. 그는 스스로 나라를 팔았다는 오명을 쓰고 참수를 당했다. 상원은 아버지의 죽음을 빌미로 어머니의 나라로 귀화하게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과거 그들의 가문이 지켜왔던 용문파의 수장이 될 수 있었다.”
경국인들은 부러 그에게 중요 직책을 맡기고 여러 방법으로 충성심을 시험했다. 그 과정에서 외조부가 비명횡사했고, 그의 어머니가 몹쓸 병을 얻었다. 조상원은 경국인들에게는 끊임없이 의심받았고, 려국인들에게는 평생을 매국의 죄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려국인임을 잊은 적이 없었다.”
거기까지 말을 끝낸 성곤은 한참 동안 운선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증오도 있었고 연민도 보였다.
“운선아, 이미 눈치챘겠지만 너는 려국인이다. 망국인에게 애국심을 강요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도 잘 안다. 허나,”
성곤의 눈시울이 점차 붉어졌다. 다시는 이 얼굴을 가진 이에게 부탁하지 않겠노라 다짐했건만, 결국 또다시 결심을 어기게 된 것이었다.
“너만은 려국을 버리면 안 된다.”
운선은 드디어 자신이 그토록 찾던 복수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살아남으라는 스승님의 유언, 자신의 목숨을 대신한 조상원의 희생은 모두 하나의 정답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다.
“려국인을 배신하고 경국에 나라를 넘긴 왕실의 하나 남은 핏줄, 그것이 바로 너다. 그러니, 너만은 그들의 염원을 배신하지 말아라.”
운선은 이제 자신의 눈에서 나오는 물이 눈물인지 진물인지 알 수 없었다.
*** 결자해지(結者解之):
저지른 사람이 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