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賭博(도박)
침상에 있는 기관을 이용해 동굴 속으로 다시 들어간 운선은 참담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자신이 뭐길래 이처럼 많은 사람이 목숨을 내놓아 구하는지 기가 막힐 뿐이었다. 반면 살아야겠다는 의지는 더욱 강해졌다.
‘반드시 살아야 한다. 이제 내 한목숨이 아니다.’
조상원이 말한 그들을 만나면 자신이 살아남은 이유를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복수를 위해 지난 시간을 버텼다면 이제는 복수의 진짜 이유를 찾고 싶었다.
움직일 때마다 부러진 갈비뼈가 온갖 내장을 찔러 대는 것 같았으나 이제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길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호랑이 바위, 거기까지만 제발…….’
바람과 달리 운선의 발걸음은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눈은 가물가물하고 손은 덜덜 떨렸다. 이런 몸으로 과연 그 좁은 굴을 통과할 수 있을지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슥!
목에 차가운 금속성이 닿고 나서야 운선은 또 한 번 위기가 찾아왔음을 깨달았다.
“이놈, 감히 나를 치고 도망가?”
도평은 조상원에게 찍힌 혈 자리가 아직 아픈지 명치를 계속 문지르며 운선을 위협했다. 그는 자신을 기절시킨 이가 누군지 보지 못했으므로, 운선의 속임수에 걸린 줄로 알고 있었다.
운선은 도평의 목소리를 듣자 안심이 되어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가 칼끝으로 운선의 목덜미를 찌르고 있었으나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곽사형, 이제 저와 같은 신세가 되셨습니다.”
“뭐라는 거냐? 이 미친놈이…….”
곽도평은 일단 욕부터 뱉었으나 태연자약한 운선의 표정을 보아하니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
“사형이 저를 풀어준 것을 사부님이 아셨습니다. 이미 저와 한편이 되었다고 생각하실 텐데 어찌합니까?”
“뭐라고?”
도평은 눈앞이 캄캄했다. 십 년 가까이 몸과 마음을 바쳐 사부님을 섬겼건만,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사형, 원래 계획대로 경전의 무공을 함께 익힙시다. 일단 일류 고수만 된다면 아무도 사형을 우습게 보지 않을 것입니다.“
“허튼소리 말아라!”
버럭 고함을 치기는 했으나 도평의 마음은 세차게 흔들렸다. 운선의 말대로 사부님을 만나고 온 뒤라면 자신이 풀어준 사실을 당연히 알고 계실 터였다.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일단 이 동굴을 나가서 생각하자. 오래 있었더니 머리가 어질하고 숨이 안 쉬어지는구나.”
도평은 뒤에서 계속 칼끝으로 위협을 하며 운선을 앞장세웠다.
‘아, 죽으란 법은 없구나.’
작은 희망이라도 생긴 것 같아 운선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혼자서는 벗어나기 불가능한 통로였으나 도평이 길을 열어 준다면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사형, 이제부터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굴 앞에 다다르자 운선이 울상을 지으며 도평을 돌아보았다. 보아하니 그의 현재 몸 상태로는 아무래도 굴을 통과하기 어려울 성싶었다. 도평은 왠지 자신이 크게 속고 있는 기분도 들었으나 다른 방도가 없었으므로 투덜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내가 굴의 너비를 넓히며 전진할 테니 너는 뒤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따라오너라. 일단 점혈을 해둘 것이니 허튼수작 부릴 생각은 하지도 말아!”
“아이고, 사형. 그런데 제가 기운이 없어 기어가지 못하겠으니 어찌합니까?”
운선이 바닥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울먹이기 시작했다. 도평은 어이가 없어 멍하니 그를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어쩐단 말이냐?”
“저를 묶은 후에 그 밧줄을 당기면 어떻습니까? 굳이 점혈하지 않아도 움직이지 못할 테니 제가 공격할 염려도 없지 않겠습니까?”
도평이 생각해 보니 힘이 들기야 하겠지만 과연 그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그는 운선이 묶여있던 장소로 다시 돌아가 긴 밧줄을 구해온 다음 운선의 몸을 꼼꼼하게 묶었다.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렇게 철저하게 묶으면 방법이 없을 것이다.”
만족스러워하는 도평의 등을 바라보며 운선은 슬며시 웃음이 났다. 세상 위선적인 인물 군상들 사이에 있다 보니 이제 곽도평 정도는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무공으로는 이미 그를 앞지른 지 한참인 운선이었다. 여차하면 단칼에 베어 버릴 수 있을 정도였으나 되도록 다치게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비록 온갖 심술을 다 부리며 자신을 괴롭혔지만, 그의 열등감과 자격지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 아니었다.
‘부디 다시 만나지는 맙시다.’
도평은 뜻하지 않게 두 사람의 무게를 감당하며 힘을 써야 했지만, 덕분에 운선은 모처럼 한숨 돌릴 여유가 생겼다. 윤설이 준 환약을 몰래 씹어 삼키며 운기조식을 했더니 팔다리는 자유롭게 쓸 수 있을 정도로 회복이 되었다.
다행히 곽도평은 체력이 남아도는 청년이었고 좁은 통로의 길이가 웬만한 방의 너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 시진도 못 되어 동굴을 벗어날 수 있었다.
“자, 이제 얼른 하산하자.”
도평이 운선에게 다시 칼을 겨누려 할 때였다. 어설프게 찍어 놓은 점혈은 이미 풀린 상태였기에 운선은 눈 깜짝할 새에 금나수(擒拿手)를 사용하여 도평의 칼을 낚아챘다.
“어?”
“사형, 미안합니다.”
운선이 멋쩍게 웃으며 되레 칼끝으로 그의 목을 겨눴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너무 놀란 도평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네가 어떻게?”
활인검법의 초식도 다 외우지 못해 버벅거리던 운선이었다.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믿을 수 없던 그는 눈동자만 도르륵 굴리고 있었다. 이윽고 운선이 검을 왼손에 든 것을 보고 나서야 자신이 크게 속았음을 깨달았다.
“이 후레자식이!”
그러나 이제 와 눈치채봤자 소용이 없었다.
“사형, 미운 정도 정이라고 제가 충고 한마디 하겠습니다.”
“이 미친놈이 뭐라는 거냐?”
운선은 도평의 욕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사형의 사부라는 자는 제자를 이용해 덫을 놓은 것 같습니다. 사형의 생사에는 아예 관심이 없더란 말입니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그만 하산하여 본가로 돌아가심이 어떻겠습니까?”
조상원이 만약 일을 쉽게 처리하려고 했으면 곽도평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자비로 살린 목숨을 다시 사지로 몰아넣고 싶지는 않았다.
“흥, 아주 꼴값이다. 꼴값! 네 앞날이나 걱정해라. 네가 감히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듯싶으냐? 오대산검을 아주 우습게 보는구나!”
도평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졌다. 혹시나 운선이 자신을 찌를까 두렵기도 했으나, 그보다 자존심이 상해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와중에 동정까지 받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사형…….”
“고작 여기까지 온 것이냐?”
할 수 없이 도평을 기절시키려는 찰나, 귀에 익은 목소리가 산속에 쩌렁쩌렁 울렸다. 운선은 또다시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따돌렸다 생각한 오대산검의 장문들이 어느새 그를 뒤따라 온 것이었다. 반면 사부의 얼굴을 확인한 도평은 신이 나서 더 꽥꽥 소리를 질러댔다.
“사부님! 사부님! 저를 좀 구해 주십시오!”
“조양…….”
운선은 솟구치는 분노를 참기 위해 피가 나오도록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들 쪽으로 달아나려는 도평의 목덜미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이제 너를 도와줄 사람도 없으니, 그만 투항하여라.”
고근동은 의기양양하여 거만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래도 함께 한 정이 있으니 네가 우리에게 협조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운선은 고근동 쪽은 쳐다보고 있지도 않았다. 팔짱을 끼고 서서 자신을 불쌍하게 쳐다보는 조양의 얼굴 쪽으로 침을 탁 뱉었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머리를 박고 죽고 말지, 목숨을 구걸하지는 않겠다.”
그는 자신의 손아귀에서 숨이 막혀 캑캑거리는 곽도평을 잡아 일으켜 그들의 앞에 들이밀었다.
“여기서 한 발자국이라도 다가오면 이놈의 목구멍을 뚫어버릴 것이다!”
약속된 장소까지는 아직도 한참이었다. 도평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렇게라도 시간을 벌어야 했다.
“쯧쯧, 어린 것이 간악하기 이를 데 없구나.”
고유생은 두타공파의 제자이니 차마 간섭할 수 없어 혀만 끌끌 찼다. 생각 같아서는 단번에 잡아,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었으나 조양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속이 타 환장하겠건만, 정작 조양은 운선이 하는 양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곽사형, 두려워 마십시오. 절대 해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조금만 도와주십시오.”
운선은 곽도평의 귀에 중얼거린 다음, 한 걸음 한 걸음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도평은 너무 놀라 입만 벙긋거리며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대치 상태를 지속하니 어느덧 절벽까지 백여 걸음도 남지 않았다.
“얘야, 뒤가 바로 절벽인데 그만 포기하렴. 다른 이들은 못 믿어도 내 말은 믿어다오. 결코, 해치지 않겠다 약속하마.”
상황이 다급해지자 소소정은 초조해졌다. 경전을 누구보다 갖고 싶은 그녀였다. 이대로 눈앞에서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칠 수는 없었다. 칼을 놓은 채로 상냥하게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은 조금의 악의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운선은 불현듯 지난 무림대회의 일이 떠올랐다. 고독(蠱毒)을 사용해 놓고도 뻔뻔하게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가 아니었던가?
“누구 하나 악랄하기로는 빠지는 이가 없구나.”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운선은 도평의 몸을 더욱 가까이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이대로 더 다가오면 뛰어내리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무심코 절벽 아래를 내려다본 운선은 머리가 어질하였다. 아무렇게나 삐죽 튀어나온 기암괴석들에 부딪히면 뼈도 못 추릴 것 같았다.
‘아뿔싸!’
그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던 조양은 그제야 깨달은 바가 있었다. 운선이 언제나 살기 위해 발버둥 치기에 설마 자결을 선택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운선의 발끝은 절벽 쪽을 향해 있었다.
쉭!
“윽!”
무심코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도평의 무게가 곱절로 무거워졌다.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던 조양이 던진 승부수였다. 끔찍한 예감이 운선의 가슴을 스쳐 지나갔다.
“사형!”
곽도평의 목에는 한 마디 정도 길이의 대침이 깊숙이 박혀있었다. 단말마(斷末魔)의 비명만 남긴 채 그는 절명하였다. 꿈도 채 펼쳐보지 못한 청년의 죽음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자신의 제자를 죽일 수 있단 말이냐!”
운선이 울부짖자 조양이 손을 툭툭 털며 대답했다.
“어째서 내가 죽인 것이냐? 네가 인질로 삼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흥! 관절 마디 마디를 부러뜨려 주마!”
드디어 기회가 오자 고유생이 득달같이 운선에게로 달려들었다. 닿기만 해도 내장이 뚫릴 것처럼 길고 날카로운 그의 손톱이 곧장 운선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왔다. 고근동도 질세라 검을 뽑아 들었으니 진퇴양난이 따로 없었다.
“인제 보니 호랑이가 틀림없구나.”
운선은 자신이 밟고 있는 바위를 내려다보더니 알 수 없는 말을 툭 던졌다. 그리고는 고유생의 손톱과 불과 한 장의 거리를 남겨두었을 때, 미련 없이 바위 아래 절벽으로 몸을 던졌다.
“운선아!”
순간 그리운 주운의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으나 이제 의미 없는 일이었다.
“스승님, 사형……. 그립습니다.”
분명 운선의 눈물이건만, 추락하는 그의 몸뚱이 위로 빗방울처럼 한 방울씩 떨어져 내렸다.
***
“문주님, 같이 갈 방도는 없겠습니까?”
“강소협…….”
조상원이 다가와 운선을 살포시 안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호랑이를 만나거든 지체 말고 뛰어내리게나. 혹시 아는가? 한 차례 시험을 끝낸 매정한 어미가 드디어 자네를 인정하고 건져 올려 줄지.”
놀란 토끼 눈으로 바라보는 운선을 향해 조상원이 지그시 미소를 보냈다.
“행운을 비네.”
***
*** 도박(賭博):
요행수를 바라고 위험한 일이나 가능성 없는 일에 손을 대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