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首丘初心(수구초심)
주운 일행이 용문산 아래에 도착한 때는 벌써 진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마음이 급한 주운이 무작정 용문파 현문으로 직진하자 윤설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일단 진정하세요. 당장 오라버니를 내놓으라고 한들 그들이 모른다, 잡아떼면 그뿐 아닙니까? 방법을 찾아야지요.”
윤설의 말이 십분 맞았으나 주운은 마음속에 자리 잡은 불길한 기운을 주체할 수 없었다. 운선이 용문파로 향했다는 말을 듣고 나서부터 계속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이, 꼭 큰 사달이 날 것만 같았다.
“방법을 찾을 시간이 없어.”
윤설 역시 몹시 긴장되었으나 주운을 안심시키려고 일부러 방실방실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신교의 제자가 이미 잠입해 있으니 마음을 놓으세요. 새벽에 온 전갈에 따르면 앞으로 한 시진 안에 운선 오라버니를 구해 나오기로 했어요.”
주운은 갑자기 냉수를 들이켠 것처럼 가슴 속이 시원해졌다.
“그게 정말이야? 그런데 누가?”
운선을 데리고 나오려면 웬만한 직급이 아니고서야 어림도 없을 터였다. 용문파의 제자 중에서도 항렬이 꽤 높아야 할 텐데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윤설은 아무리 주운이라지만, 내부 기밀을 함부로 발설할 수 없어 머뭇거렸다. 할아버지한테 물어보고 싶었으나 그는 뒤따라오고 있는지 어떤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정 그렇게 가셔야겠거든 일단 들어가 정황만 살펴요. 저는 약속 장소에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여 일이 잘못된다면 객잔에서 다시 만나요.”
아무래도 윤설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생각에 주운은 군소리 없이 의견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용문파의 현문까지 십여 장을 남겨둔 상태에서 헤어졌다. 곧 다시 만나기로 하고 간단한 눈인사만 주고받았으나 찝찝한 기분이 영 가시지 않았다. 어쩌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부디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윤설은 바람처럼 사라져 가는 주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두타공파 뿐만 아니라 그녀가 만났던 소위 명문정파라는 사람들은 늘 한결같이 위선적이었다. 겉만 냉정하지 은근히 속정이 많고 순진한 주운이 사뭇 걱정되었다.
“할아버지, 괜찮겠지요?”
“아무렴, 무영의 유일한 제자 아니냐? 운이 나빠 함정에 빠지더라도 그의 사부가 내버려 두지는 않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성곤의 심드렁한 대답에 윤설은 짚이는 바가 있었다.
“검선도 이곳에 온 건가요?”
그러나 그녀의 할아버지는 어느새 한참 거리를 두고 앞장서 있었다.
“시간이 많지 않구나. 너처럼 걷다가는 생목숨 하나 죽이겠다.”
“어이쿠!”
윤설은 부지런히 뒤따르기 시작했다. 곧 그녀의 시야에 기지개를 켜는 호랑이의 형상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문주,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고근동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조상원에게 따져 물었다. 그는 평소 조양보다 조상원을 더 존경해왔다. 조상원 같은 이야말로 무림 맹주에 추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런 그가 태을신교를 몰래 돕고 있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태을신교 놈들은 간교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소소정 역시 조상원의 정체에 큰 충격을 받았다. 회의에서 조양의 이야기를 들을 때만 해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다. 오히려 고유생이나 고근동이라고 했으면 이보다 덜 놀랐을 것이었다. 세상 품위 있는 그가 태을신교의 첩자라니……. 믿었던 만큼 배신감도 컸다.
“저 어린 것이 수년 동안 우리를 속였다니, 내 저놈의 팔다리를 모두 분질러 놓아도 분이 풀리지 않겠소.”
운선을 노려보는 고유생의 얼굴에는 노여움이 가득했다. 스승의 죽음을 빌미로 두타공파에 잠입하였다니 앙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일단 조상원을 처리한 후에 저놈을 산 채로 잡아 경전의 행방을 불게 할 생각이었다.
그들의 말을 찬찬히 들어본 조상원은 조양이 어떤 감언이설로 이들을 꼬드겼는지 대강 짐작이 갔다. 아무래도 오늘이 그의 마지막 날인 것 같았다.
“언제부터 아셨습니까?”
빙그레 웃는 조상원의 얼굴에는 초조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기에 의외로 침착할 수 있었다.
“진즉에 의심하였으나 차마 한 문파의 장문인을 몰아세울 수 없어 기회를 보고 있었습니다. 부러 유약한 제자로 유인하였더니 금세 들킨 것입니다. 좀 더 주의하셨어야 했습니다.”
조양은 내부에 간자가 있다면 책임이 중한 사람일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무림대회에서 두타공파가 태을신교를 잡기 위해 놓아둔 덫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장로급의 인사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조상원을 지목하여 의심하지는 않았다. 지난밤, 급작스럽게 나타나 운선을 숨길 장소를 안내할 때 비로소 그의 정체를 알게 된 셈이었다.
“려국을 팔아먹어 명맥을 유지한 집안의 사람이 그 왕실의 물건을 탐낸다는 것이 앞뒤가 맞지 않더이다. 역시 한 번 배신한 전력은 무시할 수가 없군요.”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던 상원은 조양의 비아냥에 이성의 끈을 놓치고 말았다. 가문에 관한 일은 그에게는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역린(逆鱗)이었다.
“감히 너 따위에게 들을 말은 아니다. 앞으로 다시는 그 추악한 입을 놀릴 수 없도록 두 동강을 내주겠다!”
상원이 일갈하며 검을 빼 들었다. 마치 도(刀)와 같이 묵직한 그의 검이 칼집을 빠져나오자 천둥이 치는 것처럼 큰 소리와 함께 주변에 강한 진동을 일으켰다. 한때 신양선의 매월검과 비견되었던 청운검(靑雲劍)이었다.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구나. 너 같은 소인배를 여태 문주로 모신 것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겠다.”
용가 형제의 맏형 용가현은 앞으로 나서며 여러 장문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사문의 배신자이니 우리 삼 형제가 해결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시오.”
조양을 비롯한 이들 모두 이견이 없었다. 오히려 고근동은 다행이다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의 스승 신양선이 일전에 조상원과 겨뤄본 뒤에 제자들에게 이른 말이 있었다.
“조상원은 강호 제일이라는 조양과 겨루어도 비등한 실력자이니라. 위명을 떨치는 용가현이 장문이 되지 못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온전히 실력 때문이더구나. 되도록 그와는 척을 지지 않는 것이 좋겠다.”
용가 삼 형제가 모두 각각의 무기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그들 역시 세 사람이 함께 덤비지 않으면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강소협, 잘 듣게. 내가 시간을 버는 동안 자네는 기회를 보아 집안으로 다시 들어가게. 아까 보았던 좁은 통로 기억하는가? 힘들겠지만 그곳을 통과하여 호랑이 바위가 있는 곳까지 간다면 살길이 있네.”
운선은 상원이 말하는 뜻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렸으나 차마 그를 사지에 두고 갈 수 없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문주님, 같이 갈 방도는 없겠습니까?”
“강소협…….”
조상원은 운선의 귀에 대고 몇 마디 말을 더 전하고는 그의 어깨를 살포시 안아주었다.
“행운을 비네.”
마지막으로 운선을 돌아보는 그의 얼굴은 절체절명의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행복해 보였다. 이제야 비로소 려국인으로서 당당하게 나설 수 있다는 사실이 몹시 기쁜 모양이었다.
“자네들과 겨루게 되니 영광이구먼.”
그는 검을 세로로 세워 들며 용가 삼 형제에게 고개를 숙여 예의를 갖췄다. 속내가 어찌 되었든 십수 년을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며 생사를 함께 했던 동료들이었다. 정이 들지 않았을 리 만무했다.
“조문주, 부디 불충을 용서하십시오.”
그를 유달리 따랐던 둘째 용송현은 이미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이곳에 와서 두 눈으로 확인할 때까지도 그는 상원의 정체를 믿고 싶지 않았다.
“형님, 공과 사를 구별하십시오.”
셋째 용조현도 마음이 불편하였으나 더는 사문의 이름을 더럽힐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손으로 끝내는 것이 장문에 대한 배려인 것도 같았다.
조상원이 검을 움직이자 마당에 가라앉아있던 모래가 서서히 먼지를 일으키며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검의 주변으로 작은 소용돌이가 일면서 공기가 일시에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용문파의 절기인 소요(小搖)공을 검기에 실은 것이었다.
‘참으로 명불허전이구나.’
조양은 내심 조상원의 내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자신이 직접 나선다고 하더라도 단시간에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었다. 적으로 두기에는 너무나 두려운 상대였다.
‘어쩌면 이쯤에서 잘라내는 것도 전략일 수 있지.’
그는 조상원이 경국인으로 귀화한 이후로부터 쭉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골치 아픈 운선과 함께 큰 짐을 덜었으니 마음이 홀가분하기도 하였다.
‘조상원을 처리하고 운선을 자연스럽게 넘긴다면 원래의 계획과 다르지 않겠구나. 그 사이에 저 녀석이 죽으면 더할 나위 없지.’
다행히 어리숙한 고근동과 소소정은 운선이 첩자이며 경전을 어디에 숨겨둔 것 같다는 그의 임기응변을 별 의심 없이 믿는 것 같았다. 황석파의 저 두꺼비 같은 고유생은 여전히 미심쩍어하는 것 같았으나 운선을 넘겨주면 알아서 해결될 일이었다.
“소요음보(逍遙吟步)”
조상원이 조용히 읊으며 칼을 들어 올리자 푸른 검기가 묵직한 검을 완전히 감싸 안았다. 보통 장력으로 사용하는 소요공이었으나, 검에 실으면 많은 적을 상대하기 용이하였다.
용가현 역시 소요공을 구사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의 절기인 권갑(拳鉀)을 낀 오른손으로 검기를 방어하는 한편, 왼 주먹에 소요공을 모아 권풍을 날릴 심산이었다.
“휙!”
드디어 조상원이 몸을 날려 삼 형제가 비워둔 가운데 공간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무거운 검이 분명하였으나 건장한 그가 휘두르기 시작하자 마치 총채처럼 이리저리 휘어지기 시작했다. 푸른 검기가 세 사람을 차례로 몰아치자 싸우기를 망설였던 송현과 조현도 그들의 무기인 대도(大刀)와 화극(畫戟)을 각각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싸움이 절정에 이르면 아이를 보호할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그때 데려오십시오.”
소소정이 고근동에게로 가 은밀히 귀엣말했다. 사실 근동은 격전의 상황에 끼어들 자신이 없었으나 어쨌든 그것이 가장 적절한 방법인 것 같아 고개를 주억거렸다.
상대적으로 무공이 고강한 고유생은 훨씬 여유가 있었다. 괜히 네 사람의 싸움판에 끼어들 이유가 전연 없었다. 저 어리숙한 머저리들이 아이를 확보한 이후에 뺏어오면 그뿐이었다.
쉭!
용가현의 권풍이 정확하게 조상원의 가슴팍으로 날아갔으나 검기에 막혀 닿기도 전에 소멸하였다. 잇따라 용조현의 화극이 그의 등을 스쳐 지났지만, 옷깃만 찢어 놓았을 뿐 작은 자상도 낼 수 없었다.
“송현아! 뭘 망설이느냐?”
가현은 답답한 마음에 그의 아우에게 호통을 쳤다. 인정에 이끌려 방어만 할 뿐, 좀처럼 공격을 하지 않는 송현이 답답하기만 했다. 이대로 망설이면 수세에 몰리는 것은 삼 형제 쪽이었다.
상원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송현이 망설인다면 싸움이 쉽게 끝날 것이었다. 그는 좌로 몸을 두 번 비틀더니 송현의 목덜미를 노리고 검기를 흘려보냈다.
캉!
송현의 목에 난 가느다란 상처에서 붉은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가까스로 막아내지 않았다면 그의 목은 영영 몸뚱이와 이별할 뻔하였다.
“조문주!”
그제야 그는 조상원의 의도를 깨달았다. 자신들이 아니더라도 그의 목숨은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죽음으로서 그들에게 사죄하고 싶어하는 장문의 마음을 깨닫자 송현의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 모자란 놈아, 어찌 그리 눈치가 없느냐?”
가현은 상원의 첫 초식을 보고 나서 바로 알아차렸다. 최선을 다해 겨루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장문을 위한 최대한의 예의였다.
조상원은 오른쪽으로 빠르게 세 걸음을 옮긴 뒤 청운영결(靑雲永訣)을 펼쳐 몸을 빙글 돌리며 검을 찔러 들어갔다. 그의 검은 화극을 찔러 들어오는 용조현의 손목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급격하게 방향을 틀었다. 이번에는 청운함묵(靑雲含默)의 초식이었다. 퍼진 검기를 모아 검을 단단하게 만들더니 그대로 용가현의 주먹을 직선으로 베어 들어갔다.
“형님!”
송현이 외쳤을 때는 이미 청운검의 검날이 가현의 왼쪽 약지와 소지를 잘라낸 후였다. 그와 동시에 권갑에 박힌 손날이 정확하게 상원의 오른쪽 어깨에 박혔다. 반탄지공으로 가현이 두 장 넘게 튕겨 나가자 두 아우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원에게 달려들었다.
“가게!”
그때 상원의 눈에 운선을 향해 달려오는 고근동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권갑을 쳐내는 동시에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황급히 청운검을 거둬들여 대각선으로 휘두르자 검에 모아두었던 기운이 우산처럼 펼쳐졌다. 운선의 옷깃을 잡을 만큼 가까이 왔던 고근동은 수십 개의 푸른 검기로 안해 옴짝달싹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틈에 운선은 쏜살같이 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이!”
고근동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내당에 진입하려 하자 조상원은 몸을 완전히 돌려 문을 차단하였다. 조상원은 장력으로 고근동을 문에서 튕겨 냈으나 뒤에서 쏟아지는 공격에는 미처 대비할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송현의 대도와 조현의 화극이 차례로 그의 등을 갈라놓았다.
“윽!”
그러나 운선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상원의 표정에는 조금의 고통도 담기지 않았다.
“반드시 살아야 한다…….”
고된 여정을 끝낸 그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만이 남아 있었다.
*** 수구초심(首丘初心):
여우가 죽을 때에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둔다는 뜻으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