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一手遮天(일수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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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일을 그르친 상황에서 굳이 그토록 많은 이를 살해해야 했습니까?”
상원은 무림대회에서 고대산파의 제자들을 도륙하던 적우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문을 말리려 했으나 그 역시 자신의 눈길을 외면한 것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러나 성곤 역시 상원의 마음을 헤아릴 생각이 없었다. 겨우 그 정도에서 끝난 게 오히려 아쉬운 그였다. 아끼던 그의 제자 유이정이 죽은 사실에 슬픔이 가시기도 전이었다.
상원은 더 따져봤자 의미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옅은 한숨을 쉬더니 이번에는 화제를 돌려 물었다.
“우영은 끝내 만나보지 않으시렵니까?”
흑접영의 부단장이 우영을 업고 왔을 때, 그는 주화입마에 빠져 생사를 넘나들고 있었다. 조상원은 사문의 배신자인 그를 도와주고 싶지 않았으나 좌영이 죽었다는 이야기에 차마 내칠 수 없었다. 산속 깊은 동굴에 거처를 마련하고 목숨만 부지하게 해 주었을 뿐이었으나 흑접영들은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다며 그의 수족이 되었다.
“자네는 참, 속도 좋구먼.”
성곤은 못마땅한 얼굴로 조상원을 한껏 노려보았다. 이런 무른 자가 벌써 십수 년 넘게 간자 노릇을 하고 있으니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 그 아이는 정녕 모른 체하시겠습니까?”
한참 고민하던 조상원은 결국 마음에 걸리던 그 일을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성곤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굳이 그럴 이유가 없네.”
“하지만 이대로 두면 조양이 죽일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팔자인 게지.”
아무리 그래도 운선은 려국의 핏줄이었다. 조상원은 성곤의 냉정한 태도가 오늘따라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직도 원망이 남은 것입니까?”
조상원의 가시 돋친 말에 성곤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이미 망한 나라에서의 직급이었으나 어찌 되었든 자신의 부하였던 그가 이리 건방지게 구는 것은 하극상이 분명했다.
“말조심하게! 자네는 자네 역할만 다 하면 되네.”
“알겠습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의 쇠심줄 같은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아이의 운명이 안쓰럽기는 하였으나 자신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우영의 말에 따르면 아이가 비급의 내용을 외우고 있다 합니다. 이대로 조양에게 가서 다 불어 버린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이번에는 이성적으로 성곤을 설득해 보기로 했다. 일단은 운선을 확보해야 뒤탈이 없다는 것에는 그도 이견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것도 괜찮겠지.”
성곤은 무심하게 긴 수염을 쓸어내렸다. 어차피 조양이 정확히 내용을 알게 된다 해도 해석하는 데 오랜 시일이 걸릴 것이었다. 려국의 표기법을 아는 이를 찾아야 할 텐데 웬만큼 학식과 무공이 갖춰진 이가 아니고서야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혹여 어찌 운이 좋아 해석한다 해도 장소의 위치는 수수께끼와 같았다. 풀어낼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태을신공의 남은 두 단계에 욕심이 나지는 않으신지요? 또한, 장소에 대한 여덟 글자는 우리도 모르지 않습니까? 검신이 죽었으니 그 아이만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조상원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성곤을 설득하려고 했다. 그것이 측은지심 때문인지, 려국에 대한 충성심 때문인지 본인도 명확하게 알지 못했다.
“내 능력으로는 5단계가 최선이네. 또한, 장소는 알고 싶지 않아. 영원히 세상에 나오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네.”
조상원이 반박하려고 입을 떼자 성곤은 더는 대답하기 싫다는 듯 소매를 크게 휘두르며 등을 돌려 버렸다. 강율천이 자기 뜻을 거절하고 운선을 데려갈 때 이미 결심한 일이었다. 그에게 운선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더는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지 않았던 성곤은 성급히 문 쪽으로 향했다.
“그래도 만약 말입니다.”
성곤의 등 뒤로 조상원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약 그 아이가 끝까지 경전을 지킨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성곤은 천천히 뒤돌아보며 빙긋이 웃었다.
“그 정도로 뚝심이 있는 놈이라면 그때 생각해 보지.”
그리고는 다시 돌아서며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럴 리 없을 것이네. 피는 못 속이는 법이니까…….”
***
“참으로 자네의 의기가 대단하더군.”
조상원이 기를 주입해주자 기력이 조금은 돌아온 느낌이었다. 적어도 산에서 내려갈 만큼의 체력은 생긴 것 같았다.
“나 같았으면 이미 사 년 전에 다 알려주고 말았을 것이네.”
생긴 것과 달리 조상원은 꽤 수다스러운 편이었다. 하긴 그동안 정체를 숨기고 있었으니 담아둔 말이 꽤 있었을 것이었다.
“그저 이제 저를 지켜줄 사람이 없으니 누구든 의심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심이 기우(杞憂)이기를 바라고 또 바랐던 운선이었다. 조양의 따뜻한 품이, 형진의 살뜰한 보살핌이 진심이었다면 목숨을 바쳐 은혜를 갚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슬픈 예감은 어김없이 맞아떨어졌다.
“그런데 문주님이 설마 저를 도와주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운선의 말에 상원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일찍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네. 사실 내 코가 석 자이다 보니 행동을 신중히 할 수밖에 없었지.”
그의 대답을 듣고 보니 문득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문주님, 근데 어떻게 태을신교의 제자가 용문파 장문이 될 수 있었습니까?”
아무래도 불쾌한 질문일 수 있을 것 같아 사뭇 조심스러운 태도로 질문을 던졌다. 예의에 어긋나는 줄 알면서도 꼭 물어보고 싶었다. 그도 궁금한 것이 있으면 못 참는 성미였다.
“백여 년 전에는 이 계정이 원래 려국의 영토였다는 것을 아는가?”
상원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워낙에 지하에 있는 곳이라 꽤 많은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건강한 자신은 상관없었지만 모진 고문을 당한 운선에게는 버거울 것이 분명했다.
“려국은 참으로 강건한 나라였네. 왕실이 방탕하여 힘을 잃기 전에는 계정뿐 아니라 문천, 한주가 다 려국의 것이었지. 또한, 용문파의 근원 역시 그러하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이곳 용문파의 자리를 지키던 이들이었어.”
상원은 힘겹게 숨을 고르는 운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쩌면 누구의 잘못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려국의 멸망은 그저 하늘의 뜻(天意)인 것을, 탓할 대상이 있어야 견딜 수 있었기에 그저 원망하고 또 원망했던 것이었다.
“나는 반쪽짜리 려국인이라네. 어머니 쪽은 경국인이어서 아버지를 따라 려국인으로 살면서도 늘 정체성을 고민해야 했지. 원체 두 나라의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까…….”
정작 려국에 충성하면서도 그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며 살아왔다. 나서서 자신의 국적을 밝히지 못하고 여기까지 온 것도 그러했다.
“그래도 나는 려국의 사람인 것이 늘 자랑스러웠다네.”
마치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 행복한 얼굴이 된 그를 바라보는 운선은 괜히 명치 끝이 간질간질해졌다. 늘 우울하고 무뚝뚝하게 보였던 그가 이처럼 유쾌하고 친절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놀란 한편, 오랜 세월 자신을 감추고 살았을 그의 고달픈 삶을 생각하니 동병상련의 마음도 들었다.
“원래 려국의 운검(雲劍)이라는 것이 뒤에서 왕을 호위하고 보필하는 임무를 부여받기에 정체를 잘 드러내지 않아. 그러다 보니 려국이 멸망했을 때, 자연스럽게 간자(間者)로 발탁된 것이네. 그렇게 용문파에 남아 십수 년이나 경국인들을 속이며 산 것이지.”
“하지만 문주님, 그렇다 해도 용문파의 장문 자리를 넘겨받기에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지 않았습니까?”
운선의 날카로운 질문에 상원은 순간 멈칫했다. 그러더니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그러나 곧 평정심을 찾은 그는 다시 환하게 웃더니 운선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고 잡아 일으켰다.
“서둘러야 하네. 조양이 회의를 주관하고 있으나 시간을 길게 끌지는 않을 것이네.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은데 저 좁은 곳을 통과할 수 있겠나?”
상원이 가리킨 곳은 일전에 운선이 기어들어 왔던 그 토끼굴이었다. 걷기도 힘든 운선에게는 불가능한 통로였다.
“그럼 할 수 없이 좀 더 돌아야겠네.”
상원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운선의 얼굴을 보더니 더는 강행하지 않았다. 용문파의 지하 샛길은 수 갈래 길로 뻗어 있었는데 그 좁은 구멍이 아니라면 장문의 거처인 내당 쪽으로 나가야 가장 안전했다.
“혹시 자네 스승에게 들은 것이 있는가?”
“뭘 말입니까?”
상원이 묻는 의도가 무엇인지 몰라 운선은 당황스러웠다.
“자네는 왜 자꾸 자신이 태을신교와 엮이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사실 그에게 가장 큰 의문점이 이것이었다. 조상원뿐만 아니었다. 적우는 우연이라 치더라도 흑접영이나 유이정까지 태을신교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궁금합니다. 혹 제 태생에 관련된 무엇입니까?”
“일단 안전한 곳으로 가면 자네에게 긴히 해 줄 말이 있어.”
상원의 얼굴에 순간 그늘이 드리워진 것처럼 보였으나 다시 보니 그가 들고 있는 등불 때문에 생긴 그림자인 것도 같았다.
“자! 이곳으로 나가면 바로 내 방이네. 방의 뒷문을 통하면 아까 그 좁은 통로의 입구로 나오게 되지. 만약 내 서찰이 잘 전달됐다면 호랑이 바위가 있는 절벽 아래에서 도움을 줄 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네.”
“호랑이 바위요? 토끼 바위 아니었습니까?”
운선의 되물음에 상원이 빙그레 웃었다.
“경국인들이야 그렇게 부른다지만 우리는 호랑이 바위라고 부르지. 아무튼, 일이 잘 풀린다면 우리는 안전하게 하산하여 우영이 숨어 있던 동굴까지 갈 수 있을 것이야.”
“아니, 그럼?”
놀라는 운선을 바라보며 상원은 사뭇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몹쓸 놈을 구해 준 이도 나라네. 미안하지만 사과는 추후 시간 여유가 있을 때 하지.”
그는 마음이 급해졌는지 발걸음의 속도를 한층 높였다. 지면에 가까워질수록 발소리의 진동이 느껴져야 하는데 너무 고요한 것이 수상했기 때문이었다.
‘설마……. 아무리 그래도 내 거처에 비밀 통로가 있는 것을 모를 텐데…….’
두 사람은 드디어 통로의 입구에 도착하였다. 그 위는 바로 상원의 침상이었다. 그는 왠지 모를 불길한 생각에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여차하면 운선을 통로 안에 두고 입구를 닫을 생각이었다. 이곳의 존재는 성곤도 알고 있으므로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한다면 그가 운선을 구해낼 것이었다.
‘하나, 둘, 셋’
운선에게 눈짓을 보내 안심시킨 그는 속으로 셋을 센 다음 입구를 열었다. 침상은 하나의 기관처럼 작동하여 순식간에 상원을 지상으로 올려놓았다.
스릉!
상원은 혹시나 몰라 검을 빼 들고 주변을 살폈으나 다행히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강소협, 올라오게!”
그는 다시 한번 침상 아래의 기관을 움직여 운선을 끌어올렸다. 드디어 지상의 맑은 공기를 마신 운선은 그제야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문주님…….”
그는 겨우 한 마디를 뱉어내고는 바닥에 그대로 널브러졌다. 빨리 도망쳐야 하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넘어져 있는 운선의 맥을 짚어 본 상원은 침상 맡에 있는 서랍에서 환단을 하나 꺼내 그의 입에 넣어주었다.
“잠시 기력을 회복하는 약이니 안 넘어가더라도 무리해서 넘겨보게.”
운선은 최선을 다해 그 큰 환약을 씹어 삼켰다. 공복에 쓴 물이 넘어가니 구역감이 올라왔지만 한 방울이라도 토해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제 움직이세.”
상원은 방 밖의 동태를 살피더니 다시 운선에게로 돌아와 그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둘렀다. 아예 업을 수도 있었으나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여 손에서 칼을 놓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그래, 잊지 말게나.”
상원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운선의 늘어진 몸을 지탱하여 일어섰다. 그에게 많은 진기를 불어넣는 바람에 평소보다 기운이 쇠한 상태였지만 워낙에 위급한 상황이었으므로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드디어 내당의 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생각보다 늦으셨습니다.”
“헉!”
두 사람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문 앞에는 무림 맹주 조양을 비롯한 오대산검의 장문 모두와 용문파의 용가 삼 형제가 그들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 일수자천(一手遮天) :
손바닥으로 넓은 하늘을 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