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30화 (30/209)

#30화. 絶處逢生(절처봉생)

“아니, 이 녀석이 왜 여기에 있답니까?”

“쉿! 조용히 해라. 나는 사형제들을 이끌어야 하니, 네가 이 녀석을 잘 지키고 있어라.”

웅얼거리는 소리에 기절해 있던 운선은 차츰 정신이 돌아왔다. 깨어나자마자 극심한 통증이 몰려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하였다. 그는 입술을 꽉 깨물어 간신히 신음을 참아내었다. 눈앞이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보였다. 눈에서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것이 피고름인지 눈물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그 자리에서 죽는 것이 나았겠구나.”

형진이 밖으로 나간 후에야 비로소 도평은 운선의 처참한 꼴을 살펴보았다. 십수 군데의 화상 자국에서 여전히 진물이 묻어 나오는 중이었다.

“아휴, 냄새…….”

그는 한 손으로 자신의 코를 쥐어 잡더니 다른 손으로 앞을 휘휘 내저었다. 운선의 피 냄새를 맡고 모여든 하루살이들 때문에 여간 귀찮지 않았다.

“곽사형…….”

운선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곽도평을 불렀다.

“어? 깼느냐?”

아무리 운선을 싫어하는 그였지만 피떡이 되어 묶인 모습을 보니 측은지심이 생길 지경이었다.

“곽사형, 도…, 도와주십시오. 제발…….”

“내가 무슨 힘이 있겠어…….”

도평은 괜히 민망하여 코를 크게 훌쩍였다. 도와줄 만큼 운선이가 안쓰럽지도 않았을뿐더러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를 만한 처지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운선은 입안에 이물감이 느껴져 바닥에 퉤 뱉었다. 진득한 피가 섞인 가래였다.

“왜 제가 여기 있는지 들으셨습니까?”

생각해 보니 그저 자리를 지키라고 했을 뿐 이유를 전혀 듣지 못했다. 도평의 표정을 본 운선은 자신의 예측이 맞는다는 생각에 조금 희망이 생겼다.

“해심밀경소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그 절세 무공 비급이라는…….”

도평의 눈이 순간 반짝 빛났다. 강호 사람이라면 그것을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제가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저를 도와주시면 경전을 사형께 드리겠습니다.”

“아니, 네가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도평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동굴 입구까지 나가 경계를 살폈다. 다행히 워낙 비밀스러운 곳이라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원래 그것은 저의 스승 검신 강율천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여 저에게 잘 보관하여 현 스승님께 드리라 한 것이지요. 그런데 제가 막상 무공을 익혀 보니 그 위력이 정말 엄청나더란 말입니다. 욕심이 나서 그만…….”

“그럼 그 사실을 알고 사부님이…….”

운선의 말에 혹한 도평이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문득 모순을 깨달았다. 감히 자신을 속이려 한다는 생각에 화가 치솟아 운선의 뺨을 짝 소리가 나도록 세게 내리쳤다.

“아주 많이 웃기는 놈일세. 무공을 할 줄도 모르는 놈이…….”

활인검 1초식도 제대로 시연하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절세 무공을 익혔다는 것인가? 도평은 잠깐이라도 마음이 혹했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에이, 사형. 제가 그럼 어찌 사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사부님을 속일 수 있었겠습니까? 적어도 같이 생활하는 대사형의 눈을 피하려면 바보인 척이라도 해야지요. 참으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십니다.”

갈비뼈가 폐를 찌르는지 말할 때마다 가슴이 찌릿하여 괴로웠으나 운선은 최선을 다해 통증을 참았다. 어떻게든 도평을 속여야 살길이 열릴 것이었다. 그들에게 고문을 받은 지 불과 몇 시진도 지나지 않았으나 차라리 죽고 싶을 만큼 끔찍한 시간이었다.

“이래도 비급의 내용을 제대로 말하지 않겠다면 더한 방법도 있다.”

온몸에 화상 자국을 내도 버티는 운선을 가엽게 바라보며 조양이 말했다. 그는 평소처럼 인자한 얼굴로 웃고 있었지만,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칼날이었다.

“옛날 경국에는 절대로 진실을 말하지 않고는 버티지 못하는 고문이 있었지.”

그는 손바닥만 한 작은 칼을 꺼내 운선의 눈앞에 들이댔다. 칼날은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두꺼운 가죽을 자를 정도로 예리했다.

“고문을 과하게 하면 일찍 죽어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명줄을 붙여 놓으려면 고문에 한계가 있고. 이 난제를 극복하는 방법은 하나지. 몸에 서서히 피를 빼 숨을 붙여 놓되, 죽을 만큼의 상처는 입히지 않는다. 하여, 옛 조상들은 사람의 살점을 손톱 만큼씩 하나하나 발라내면 치명상은 피하고 고통을 줄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단다. 이틀까지는 끄떡없다고 하더구나.”

아무리 분노로 가득 찬 운선이었어도 조양의 고문 예고에는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토록 계획적이고 냉혈한 인간이라면 절대 빈말은 아닐 터였다.

‘조양이 돌아와 고문을 시작하면 끝이다. 죽더라도 이렇게 허무하게 당해서는 안 된다.’

운선은 고민에 빠진 도평을 바라보며 전의를 다졌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이 위기를 극복하고 말리라. 설사 그것이 저 멍청한 놈의 발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일이더라도 자신은 의연하게 받아들일 결심이 섰다.

“믿지 못하겠다면 보여드리겠습니다.”

운선은 대접만큼 피를 흘리고 갈비뼈가 세 개나 부러졌지만, 최선을 다해 기를 모았다. 두 손이 의자 뒤로 묶여 있어 자유롭지 못했으나 상대를 놀라게 할 정도로는 충분했다.

“태일(太一)이 물을 생겨나게 하지만 도리어 물이 태일을 도와 하늘을 이루고 하늘이 도리어 태일을 도와 땅을 이룬다.”

운선이 중얼거리며 신공의 구결을 읊기 시작하자 주변의 공기 흐름이 삽시간에 변했다. 도평은 예상외의 상황에 놀라 자기도 모르게 동굴 벽 쪽으로 몸을 찰싹 붙였다.

“사형, 제 팔을 보십시오.”

운선은 눈을 감고 집중한 후, 오른팔 쪽으로 일시에 기운을 쏟았다. 잿빛이었던 그의 팔이 겨드랑이부터 조금씩 붉어지더니 서서히 아래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저게 뭐야?”

도평은 세상 처음 보는 신기한 무공 시연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공에 대한 식견이 짧은 그에게는 그저 화기(火氣)를 가라앉힐 뿐인 태을신공의 기(氣)운용이 대단한 신공의 기술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운선은 눈을 가늘게 뜨고 도평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반응이 자신의 예상과 맞아떨어지자 흐뭇하게 미소가 지어졌다.

“보셨습니까? 제가 이리 묶여 있어 제대로 장풍을 보여드릴 수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운선이 한숨을 푹 내쉬자 도평은 그에게 바짝 다가와 물었다. 어찌나 흥분했는지 말까지 더듬거렸다.

“그……, 그러니까, 사부님은 네가 무공비급을 손에 넣은 걸 알고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 운선의 상처가 사뭇 징그러워 도평은 눈을 질끈 감았다. 너그러운 분인 줄만 알았는데 이리 화를 내셨다니 운선이 가진 비급이 정말 대단하긴 한가보다 싶었다.

“내가 도와주면?”

“절 이곳에서 나가게만 해 주신다면 비급을 사형께 드리겠습니다. 이것만 있으면 대사형은 물론 사부님도 넘어설 수 있을지 모릅니다. 사형은 그럴 능력이 되시지 않습니까?”

운선은 평소 도평이 가지고 있던 자격지심을 건드려보기로 했다. 도평은 늘 운선을 비롯한 사제들의 앞에서 허세 떠는 것을 좋아했다. 계정 유지의 아들로 태어나 남 부러운 것 없던 그가 두타공파에 입문한 이유는 바로 그의 지나친 공명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무공의 자질이 매우 부족했던 그는 입문한 지 꽤 오래되었음에도 늘 사형제들에게 치였다. 대사형 또한 자신을 예뻐하기는 했으나 은근히 잡일만 시키고 무공으로는 인정해주지 않았다.

용문파 일행에 자신을 뽑아주었을 때 유달리 기뻐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번에도 자신은 정찰대에 뽑히지 못하고 지하 동굴에서 운선이나 지키라 한 것이었다.

‘하긴, 모든 명예와 재물을 가질 수 있다는 전설의 비급 아닌가? 어쩌면 나를 무시하던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 줄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도평은 곧 결심이 섰다. 조만간 일류 고수가 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벌렁벌렁한 것이 몹시 설렜다.

“좋다. 내가 너를 풀어줄 테니 함께 도망가자. 내 나가는 길은 안다.”

도평은 서둘러 다가와 운선의 손에 묶인 밧줄을 풀었다. 어찌나 꽁꽁 싸매어 놓았는지 푸는 데도 일각이 족히 걸렸다.

“사형,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적절한 때에 기절시키고 도망갈 생각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진심이었다. 만약 보초가 다른 이였다면 상상하지 못할 탈출 계획이지 않은가?

“자자, 나를 따라오게.”

도평은 신이 나서 앞장섰다. 운선이 갇힌 굴에서 나가면 무려 세 갈래의 길이 나왔다. 정면 방향은 알 수 없었으나, 좌측으로 가면 어젯밤 운선이 숨어 있던 대청 아래였고 그 반대로 난 길은 확실히 개구멍의 입구였다.

“내가 누군가? 이래 봬도 용문파 개구멍을 발견한 첫 외부인…….”

주절주절 떠들던 도평이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스르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사형?”

뒤따라오던 운선은 얼음처럼 그 자리에 몸이 굳어 버렸다. 조양이나 백형진이 돌아온 것이 틀림없었다. 이제 마지막 희망도 끝이었다.

“어이, 강소협. 참으로 재주도 좋지. 이 멍청한 놈은 또 어찌 꼬드겨서 나왔나?”

조상원이 기절한 곽도평을 발끝으로 툭툭 차며 운선에게 말을 걸었다. 조양이 모진 고문을 하는데도 뒤에서 표정 변화 하나 없이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그였다. 분명 자신의 편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운선은 절망감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아아, 다 틀렸구나.’

운선은 이제 선택권이 없었다. 조양이 예고한 그 끔찍한 고문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손이 자유로울 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최선이었다. 다만,

‘스승님과 사형의 한을 풀어드리지 못하고 이 악당들에게 복수하지 못하는 것이 억울하고 원통하구나!’

운선은 도평의 허리춤에 달린 호신용 단도로 시선을 옮겼다. 조상원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재빠르게 움직여야 할 것이었다. 운선은 셋까지 세는 동안에 모든 마무리를 짓자고 다짐했다. 제대로 경동맥을 찔러야 탈이 없으리라.

‘하나…….’

운선은 수를 셈과 동시에 도평의 허리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강소협, 너무 느리네.”

이미 운선의 손은 조상원에게 잡혀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문주님, 비록 초면이지만 후배를 불쌍히 여겨 스스로 죽게 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운선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절대로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저 죽고 싶은 마음에 자존심 따위를 지킬 여력이 없었다.

“쯧쯧, 강소협. 내가 왜 자네를 죽이려 한다 생각하나? 나는 살리려 하는 것이네.”

운선은 기가 막혀 눈물이 딱 멈췄다. 고작 비급의 몇 줄을 얻겠다고 이리 위선을 떠는 이가 명문정파의 장문이라니. 관 속에서도 통탄할 일이었다.

“너희들이 내 사지를 갈기갈기 찢는다고 해도 절대로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운선은 혹시나 자신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나불댈까 봐 혀를 끊어내기로 작정했다. 겁이 나긴 했으나 저 악귀들의 고문보다는 짧은 고통일 것이었다. 운선은 한 번에 끝내기 위해 최대한 입을 크게 벌려 입아귀 힘을 모았다.

“강소협!”

그러나 이번에도 조상원의 대처가 한발 빨랐다. 그는 자신의 팔뚝을 운선의 벌린 입으로 집어넣어 그의 자해를 막았다. 대신 그의 팔에서는 이빨 모양대로 붉은 피가 몽글몽글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 급한 성격은 누구를 닮은 건가?”

조상원은 약간 기분이 상했는지 인상을 구기며 핀잔을 주었다. 다른 쪽 소매의 옷자락을 찢어 물린 팔뚝을 감으며 지혈하면서도 운선의 다음 행동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여차하면 다시 손발을 묶을 요량인 것 같았다.

“그래, 비급의 내용은 자네 머릿속에 있고, 조양은 그 내용을 제대로 모른다 이거지?”

무슨 생각인지 그는 운선에게 다시 한번 상황을 확인하더니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이제 마음대로 하시오.”

운선은 무기력한 상황에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이제 될 대로 되라지. 사람이 바닥까지 몰리면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된다는 사실을 운선은 이제야 깨닫는 것이었다.

“강소협, 왜 매번 오대산검의 무림대회는 태을신교에게 걸린다고 생각하나?”

“네?”

운선은 조상원의 말에 놀라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그건 이 안에 간자(間者)가 있다는 뜻이지.”

운선은 어젯밤 대청에서 소소정이 열변을 토하던 일을 생각해냈다. 간자가 없다면 결코 오대산검 제자들의 경로를 들킬 리가 없다. 그것은 분명 내부에 있다.

“그래, 그게 바로 날세. 나는 전(前) 려국의 운검(雲劍)이자 태을신교의 건곤사자(乾坤使者) 조상원이라네.”

“네?”

운선은 너무 놀라 입을 동그랗게 벌린 채, 조상원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충분히 놀라도 되네. 내 그거 보려고 여태 참았으니.”

그의 껄껄 웃는 소리가 윙윙 소리를 내며 동굴 안을 가득 메웠다.

*** 絶處逢生(절처봉생) :

절체절명의 판국에서 요행히 살길이 생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