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各自圖生(각자도생)
황석파의 장로 고유생의 거처에 모인 이들은 선운검파의 소소정과 고대산파의 고근동이었다. 외따로 위치한 그곳이야말로 무림 맹주 조양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공간이었다.
“검신의 제자를 어디 숨겨둔 게 분명합니다.”
고근동이 식식거리자 소소정이 제발 조용히 하라며 핀잔을 주었다. 이들의 회동이 밝혀져서 좋아질 일이 하나도 없었다. 최대한 은밀하게 검신의 제자를 찾는 게 그들의 목적이었다.
“그런데 과연 그 아이가 경전을 가지고 있을까요?”
소소정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고유생이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흥, 능구렁이 같은 현로 선생이 마교 놈들에게 그 아이를 내주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것을 못 보았소? 분명 뭔가를 알고 있소.”
“근데 왜 우리에게 그 사실을 알린 걸까요? 이렇게 몇 년이나 꽁꽁 싸매고 있을 거면 아예 언질도 주지 말든지. 아주 애가 타 죽겠습니다.”
고근동이 머리를 긁적이며 짜증을 내자 소소정이 한심한 눈초리로 흘겨보았다.
“저는 곧 우리에게 나눠주겠다는 의도로 들었습니다. 사 년이면 딱 적절한 때가 아니겠습니까? 이미 무림대회의 일은 소문이 파다하여 그 아이를 노리지 않는 문파가 없습니다. 두타공파에서 손을 떼는 순간, 먼저 낚아채는 쪽이 임자겠지요.”
고유생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동의하였다.
“나도 같은 생각이네. 정찰대에게 태을신교의 동태를 살피는 한편, 그 아이의 행방을 찾으라 함이 어떻겠나?”
두 사람은 고유생의 의견에 각자 맞장구를 쳤다. 세 문파가 서로 경쟁하다가는 엄한 이들에게 뺏길지도 몰랐다. 특히 태을신교 쪽에서 데려가면 영영 이쪽의 기회는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고선배님. 태을신교의 기습을 받기는 하였으나 두타공파를 제외하고 나머지 문파는 큰 피해가 없었습니다. 아까는 일부러 호들갑을 떨었지만 기실 제자 셋이 몇 군데 자상을 입은 것이 다니까요.”
소소정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고유생도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황석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오는 길에 기습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태을신교의 흑의인들은 놀라게 하기만 했을 뿐, 제대로 공격도 하지 않고 물러갔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고대산파는 공격도 받지 않았다니까요!”
고근동이 왠지 무시당한 것 같은 기분에 울화통을 터뜨렸다. 소소정은 단순하고 무식한 그가 안쓰러워 피식 웃었다.
“어느 문파도 크게 피해를 보지 않았으니 다행입니다. 다만 의도가 무엇일까요? 굳이 정보를 빼내 매복까지 해 놓고 기습하는 척만 했으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 오대산검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경고인가?”
고근동이 뭔가를 알아냈다는 듯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쳤다. 그러나 고유생은 그와 생각이 달랐다. 검귀 성곤은 이서문보다 더 하면 더 했지 교활하고 영악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다. 쓸데없이 인력과 시간을 낭비할 리가 없었다.
“각자 알게 되는 것이 있으면 공유하고 오늘은 이만하세.”
어차피 이들과 머리를 맞대고 수다를 떨어봤자 알아낼 것이 없다는 생각에 고유생은 서둘러 자리를 정리했다. 만약 조양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그동안의 준비가 다 허사로 돌아갈 것이었다. 이번에야말로 검신의 제자를 손에 넣어 경전의 내용을 알아내야 했다.
쾅!
어렴풋이 들려오는 굉음에 세 사람은 순간 얼어붙었다.
“이게 무슨?”
고근동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소소정이 손가락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그는 오랜만에 여인의 손길이 닿자 얼굴이 새빨개졌다.
“무슨 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제가 가서 살펴볼 테니 시간을 두고 나오십시오.”
고유생이 고개를 까딱하니, 소소정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 소리가 나는 쪽은 그들이 방금까지 회의했던 대청이었다.
‘혹 태을신교의 누군가가 쳐들어왔나?’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마진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지만,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는 완전히 남남인 것을 자꾸 그리워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소장문님?”
그때, 검고 큰 인영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소소정은 깜짝 놀라 검 자루에 손을 갖다 댔다. 여차하면 바로 내지를 작정이었다.
“접니다, 조상원!”
그는 두 손을 가슴 앞으로 쭉 내밀어 소소정을 진정시켰다.
“아…….”
소소정은 긴장을 풀었으나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물었다.
“이 한밤에 무슨 소립니까?”
“소리라니요?”
조상원은 의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무언가 크게 부딪치는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까?”
소소정은 조상원의 태도가 어딘지 어색하여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조상원은 오대산검의 장문 중에서 가장 속을 알 수 없는 자였다. 무림에서 무공으로는 둘째라면 서러운 용가 삼 형제가 있음에도 용문파의 장문을 꿰찬 것부터가 어딘지 모르게 수상했다.
“아아, 용문파 제자들이 정찰대의 임시 거처를 만드는 중인데 그곳에서 소음이 난 모양입니다. 제가 당장 가서 조심하라 이르겠습니다.”
소소정은 탐탁지 않았으나 더 따지고 드는 것도 예의가 아닌지라 물러나기로 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쉬십시오.”
두 사람은 서로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분명 숨기는 게 있는데……’
소정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멀리서 지켜보던 조상원은 한숨을 푹 쉬었다. 자신이 다시 나와 주변을 둘러보지 않았다면 저 음흉한 선운검파의 여우에게 들킬 뻔한 것이었다.
대청의 굉음은 조양이 운선을 대들보에 집어 던져서 발생한 소음이었다. 마침 밤 산책을 나온 조상원이 대청 안으로 급히 들어가 보니 백형진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
“문주님, 아무 일도 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그만 의자를 박살 냈으니 추후 꼭 보상하겠습니다.”
형진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쪽을 보자 대청의 상석에 자리한 오동나무 의자의 팔걸이가 완전히 부서져 있었다.
“아, 괜찮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조상원은 전혀 신경 쓰지 말라며 형진을 안듯이 잡아서는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때 그는 보았다. 대들보 아래 떨어진 핏자국을.
“어서 들어가 쉬십시오.”
조상원이 웃는 낯으로 읍하자 형진은 다행이다 싶어 가뿐한 마음으로 돌아섰다.
“그런데, 백소협. 실종된 사제는 찾으셨습니까?”
가슴이 끔찍하여 즉시 돌아보니 조상원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에는 곰 같은 인간이 왜 오늘따라 여우같이 구는 것인가?’
형진의 이마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관자놀이를 지나 턱 밑으로 또로록 떨어져 내렸다.
“안타깝게도 아직입니다. 사형제들이 찾으러 갔으니 곧 소식이 있겠지요.”
“제가 도와드릴까요?”
조상원이 이제껏 본 적 없는 짓궂은 표정으로 입꼬리를 잔뜩 올렸다.
“뭐……, 뭘 말씀입니까?”
그는 어느새 당황한 형진의 앞으로 걸어와 그를 내려다보았다. 형진보다 머리 하나가 큰 건장한 체격의 그가 다가오자 마치 거대한 바위를 대하는 것 같았다.
“숨길 장소가 필요하시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맹주님?”
조상원은 형진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질문의 상대는 그가 아니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서야 조양이 병풍 뒤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걸레처럼 축 늘어진 운선의 몸뚱이가 아무렇게나 들려 있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조장문.”
조양은 이미 들켰으니 도움을 받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에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이지요. 다만…….”
조양은 그가 말하지 않아도 다음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경전의 내용을 저도 알아야겠습니다.”
“……그럽시다.”
조상원은 감사의 의미로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더니 조양에게로 서둘러 다가왔다.
“용문파는 혹시나 있을 전란을 대비하여 지하에 밀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곳이라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을 것입니다.”
해맑게 웃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형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여태 그가 오대산검의 장문 중에서 가장 영리(榮利)에 어두운 이인 줄 알았던 탓이었다.
‘세상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그 말이 진리로구나.’
스승에게서 넘겨받은 운선을 질질 끌고 가며, 또 한 번 강호의 무서움을 깨닫는 형진이었다.
왔던 길을 하루가 다 지나도록 되돌아갔던 주운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주인장은 노인이라 아침잠이 없어요. 새벽에 산책하러 나가셨는데 아직 안 돌아오셨죠.”
소녀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흑의인들이 새벽녘에 우르르 지나갔다는 것을 보았다면서 조부가 산책하러 가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그 아이는 무공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어. 도평의 말에 따르면 노인도 촌부에 불과했다고 했다. 괴한들이 떼로 지나갔는데도 태연히 산책하러 나갔다고? 아뿔싸!’
주운은 그제야 자신이 그 소녀에게 완전히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운선의 생사에 정신이 팔려 계속 느껴지던 위화감을 무시한 게 패착이었다. 객잔의 두 사람은 결코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할아버지와 손녀……. 손녀…, 전혀 무공을 못 하는…….’
다시 객잔 쪽으로 발길을 돌려 달려가던 주운은 어떤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르자 걸음을 딱 멈춰 섰다. 태을신교의 등장, 객잔을 운영하는 할아버지와 손녀. 정답은 이미 그녀의 기억 속에 있었다. 그러고 보니 소녀가 처음 보는 자신을 다정하게 언니라고 부른 것도 이해가 갔다.
‘칠원성군의 일곱째 약선(藥仙) 윤설’
그녀는 너무 늦게 깨달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주운은 이미 윤설을 만난 적이 있었다. 다만 너무 어릴 때였으므로 성인이 된 그녀의 모습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만약 성곤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주운은 한눈에 두 사람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주인장이 숨어 있었던 거로군.’
주운은 왠지 안심되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검귀 성곤이면 몰라도, 윤설이 누군가? 이 세상에 온갖 병은 다 고친다는 약선 아닌가?
‘그 아이가 운선이를 데려갔다면 일단 목숨은 구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주운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체한 것처럼 답답했던 속이 순식간에 뻥 뚫린 기분이었다. 이제 고비를 넘겼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가 용문파로 가기 전에 찾으면 되었다. 또한, 약선을 만났으니 치료 방법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었다.
어둠이 한풀 물러간 새벽녘이 되어서야 주운은 객잔에 도착했다. 낮에 볼 때는 기괴하기 짝이 없던 초라한 객잔이었으나 이제 와 보니 세상 따뜻하고 안락한 보금자리 같았다. 객잔 문 앞에 양쪽으로 켜진 등불이 어서 오라고 반짝반짝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계십니까?”
객잔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침 윤설이 탁자에 앉아 국수를 먹고 있었다.
“어머, 언니. 왜 이리 늦게 왔어요?”
윤설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주운에게로 쪼르르 달려왔다.
“총명하다고 소문이 자자하여 금방 돌아올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늦으셨네요. 제가 그렇게 눈치를 주었는데 말입니다.”
맑은 목소리로 까르르 웃는 그녀가 새삼 귀엽게 느껴졌다. 여전히 깐죽거리는 말투였으나 지금은 전혀 얄밉지 않았다.
“운선은 어디 있니?”
주운이 고개를 들어 2층을 흘긋거리자 윤설이 금세 슬픈 표정이 되었다.
“겨우 발작은 가라앉혔지만, 상태가 좋지 않았어요. 하루만, 한나절만 쉬어가라고 부탁해도 말을 듣지 않더라고요.”
“뭐?”
그럼 두타공파의 일행에게로 돌아갔다는 말이었다. 주운은 맥이 딱 풀려 옆에 놓여 있는 의자에 풀썩 앉았다. 왠지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것이 영 마음이 불편했다.
“아무래도 용문파로 가야겠다.”
“저도 같이 가요.”
주운이 검을 손에 꽉 쥐는 것을 보자 윤설은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자신은 무공을 전혀 할 수 없지만 대신 위기에 처하면 재빨리 구해 줄 든든한 싸움 귀신이 뒤에 있었다.
“할아버지, 같이 가실 거죠?”
부엌에 앉아 국수를 삶던 성곤이 그제야 고개를 쑥 내밀었다.
“일단 배부터 채우자. 주운아, 너도 한 그릇 주련?”
*** 각자도생(各自圖生):
제각기 살아나갈 방법을 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