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28화 (28/209)

#28화. 靑出於藍(청출어람)

조양이 손을 놓자 허공에 떠 있던 운선은 가슴부터 바닥에 쿵 떨어졌다.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은 극심한 통증에 그는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강운선?”

형진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꺾어 운선을 빤히 바라보았다. 태을신교 놈들에게 당하지 않았더라도 발작을 일으켜 죽었으리라 생각했는데 너무나 멀쩡한 얼굴로 자기 앞에 버젓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운선아, 다 들었느냐?”

도리어 조양은 예상이라도 한 듯, 침착한 모습이었다. 그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고통을 참는 운선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자글자글했던 그의 안면 주름이 일순간에 쫙 펴지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방금까지 표독스러운 말을 쏟아내던 이와 같은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사람 좋은 웃음이었다.

“듣지 않았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운선은 엎어진 자세에서 힘겹게 일어나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는데 마치 기회라도 주는 것처럼 너스레를 떠는 조양의 모습이 역겹기 그지없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너도 이해하지 않느냐?”

조양은 껄껄 소리를 내어 웃더니 다시 탁자의 상석으로 돌아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운선이 설사 도망이라도 치려 하면 형진에게 죽이라고 하면 그뿐이었다. 들킨 시점에서 이미 운선은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사제, 그 절망적인 순간에도 이리 무탈한 것을 보니 참으로 운이 좋네. 허나, 오늘은 넘기지 못할 것 같으니 안타깝구먼.”

형진은 앉아 있는 운선의 옆쪽으로 한 발자국 다가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말투는 사뭇 안쓰러움이 묻어났으나 세상 즐거운 표정이었다.

“어쩌시겠습니까? 명하여 주십시오.”

형진이 공수하며 스승을 바라보자, 조양은 긴 턱수염을 두어 번 쓸어내렸다.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노려보는 모습이 먹이를 노리는 한 마리 구렁이 같았다.

“그러게 말이다. 이 아이를 어찌할까? 그간의 정이 있어 내 손으로는 도저히 끝내지 못하겠구나.”

“하면 사문에서 방출하여 이 녀석 운에 맡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형진의 물음에 조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분명 다른 문파에서 갖지 못해 안달이 날 텐데, 거기 가서 오늘 들은 이야기를 나불거리면 큰일이 아니냐?”

곰곰이 생각하던 형진은 불현듯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아, 이 아이는 태을신교에 끌려가 고문을 받다 혀가 잘리지 않았습니까?”

“아, 그것도 나쁘지 않구나.”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를 듣는 운선은 손발이 덜덜 떨렸다. 그것은 자신의 앞날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가면을 쓰며 살아가는 인간 자체에 대한 환멸 때문이었다.

운선은 천천히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가슴이 크게 덜컹거렸으나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드디어 그동안 숨겨왔던 패를 보여 줄 때가 온 것이었다.

“의백, 그리고 대사형. 안타깝게도 두 분은 저를 죽이지 못합니다.”

일부러 끔찍한 고문을 열거하며 운선을 겁주려 했던 형진은 그의 의외의 말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내가 너에 대한 애정이라도 생겨 해치지 못할까 염려하는 것이냐? 그렇다면 나를 너무 얕본 것이다.”

형진은 운선이 자신의 처지도 모르고 깐죽거리는 것이 같잖으면서도 몹시 불쾌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느라 입가에 경련이 파르르 일었다.

한편 운선의 태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조양은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평소 모습처럼 인자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패를 가지고 있기에 그리 자신만만한 것이냐?”

운선은 그제야 조양을 돌아보더니 양쪽 입술을 최대한 위로 올리며 미소지었다.

“의백, 제가 알려드린 태을신공은 잘 연마하고 계십니까? 의백의 뛰어난 능력을 참작한다면 지금쯤 2단계는 거뜬히 완공하지 않으셨습니까?”

조양은 살짝 당황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으려고 작위적인 웃음을 지었다.

“글쎄, 내가 익혔으리라 생각하느냐?”

운선은 사뭇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능청스럽게 다시 물었다.

“혹시 익히지 않으신 겁니까? 아니 익힐 필요가 없지 않았습니까?”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몸에 붙은 흙먼지를 털털 털어내었다.

“의백이 무림대회에 세울 때부터 저에게 순수한 마음이 아닌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눈치가 빨라 웬만해서는 남에게 잘 속지 않는답니다.”

곁 눈짓으로 형진을 바라보니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였다. 아무래도 꽤 화가 난 모양이었다. 운선은 자신이 제대로 그들의 속을 긁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도 참 이상하더군요. 의백은 절세고수라 강호에 당할 적수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해심밀경소’, 아니 태을신공을 탐냈을까요?”

운선은 이번에는 발걸음을 옮겨 얼어붙은 듯 서 있는 형진의 어깨에 바싹 다가섰다.

“대사형, 저는 시묵공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더 큰 의문이 생겼습니다. 제가 기연을 얻어 태을신공을 배울 기회가 생겼지 뭡니까? 헌데 두 무공을 다 연마해 보니 엄청난 문제가 있더군요. 시묵공과 태을신공은 기의 흐름이 정반대라 절대로 같이 익힐 수가 없더란 말입니다. 그런데 왜 의백은 굳이 그것을 얻으려 하였을까?”

조양의 인상이 서서히 사납게 변했다. 여차하면 운선의 입을 찢어버릴 것처럼 그를 한껏 노려보았다.

“그때 항간의 소문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더군요. ‘해심밀경소’를 얻는 자, 세상의 모든 명예와 재물을 얻게 되리라. 사형도 들어보셨지요? 무지한 저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아! 의백이 얻으려는 것은 신공이 아니구나!”

머리끝까지 화가 난 조양은 앉아있던 의자를 강하게 내리쳤다. 오동나무로 만든 팔걸이가 굉음과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그러나 운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해심밀경소에 담긴 것은 신공만이 아니었던 것이죠. 무공비급이 아닌 또 다른 무엇! 정체 모를 그것이 바로 의백께서 경전을 얻고 싶었던 진짜 이유입니다. 대사형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까?”

형진을 능청스럽게 바라보는 운선의 얼굴은 마치 아이와 같이 해맑았다. 어찌 보면 형진을 불쌍하게 바라보는 것도 같았다.

“그……, 그렇다 해도 너를 죽이지 않을 이유는 없다.”

스승의 흥분한 모습을 보니 운선의 말이 거짓은 아닌 듯싶었다. 허나 일단은 이 교활한 녀석의 입을 닥치게 하는 것이 먼저였다.

형진은 급하게 마음을 추스르고는 운선에게 칼을 겨눴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연기를 펼친 것은 스승과 자신만이 아니었다. 저 후레자식이 여태 바보 행세를 하고 있었구나 싶자, 부아가 치밀었다.

“아니요. 의백은 저를 절대 죽이지 못합니다. 제가 없으면 비밀을 풀 수 없으니까요.”

조양의 눈썹이 심하게 꿈틀거렸다. 이제야 그는 운선의 깜찍한 계략을 눈치챘다.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오리라 예상한 그가 미리 덫을 놓았던 것이었다.

‘마냥 순진하고 어리숙한 아이인 줄 알았더니,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구나. 율천은 어찌 이런 여우를 키워냈을까? 참으로 기가 차는구나.’

운선은 다시 조양 쪽으로 몸을 돌리며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나갔다.

“해심밀경소는 원래, 려국에서 만든 불교 경전의 해석본입니다. 하여, 당연히 려국의 언어로 쓰여있었지요.”

처음 운선이 경전을 외울 때 위화감이 들었던 것은 자신이 평소에 공부하던 경국의 문장과 글자의 배치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숨겨진 태을신공의 비급 역시 마찬가지였다. 경국 사람이 보았다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글자의 나열이었다.

려국은 경국의 글자를 빌려 썼기에 글로 옮길 때 화용 언어의 뜻을 다 담을 수 없어 어려움을 겪었다. 그들은 비록 스스로 글자를 만들지는 못하였으나 수십 년에 걸쳐 그들만의 방식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경국의 표의 문자를 음 글자와 뜻글자로 분리하여 려국 어순에 맞게 바꿔 배열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다행히 운선은 스승에게 어릴 때부터, 려국의 표기법을 배웠기에 곧 제대로 해석할 수 있었다.

“제가 뒤에 드린 비급은 전부 뜻글자와 음 글자를 바꿔 알려드렸습니다. 같은 음에도 글자가 여럿인데 제가 무엇으로 바꿨는지 의백께서 어찌 아시겠습니까? 이 자리에서 저를 죽인다면 평생 경전의 비밀은 묻히게 될 것입니다.”

여기까지 들었을 때, 조양은 강율천의 마지막 말이 생각났다.

“설령 얻는다고 해도 깨우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동안 수많은 방법으로 연구했으나 알지 못했던 것은, 비단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무려 사 년 동안이나 운선에게 완전히 속은 것이었다.

“네 이놈!”

조양이 어찌나 몸을 부들부들 떠는지, 수염 한 올까지도 춤을 추듯 넘실거렸다. 운선을 죽일 수 없는 것은 맞으나 목숨만 붙여놓으면 될 일이었다. 그는 순식간에 바람처럼 달려와 운선의 얼굴 바로 앞에 도달했다. 그리고는 온 힘을 다해 그의 왼뺨을 세게 내리쳤다.

짝!

운선의 얼굴이 완전히 옆으로 돌아가더니 어금니 하나가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조양은 그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지 여전히 몸을 떨면서 소리를 내질렀다.

“감히!”

일순, 운선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뭐라 하셨습니까?”

방금까지 빙글빙글 웃으며 상대를 조롱하던 운선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조양을 뚫어지라 쳐다보는 그의 눈에는 충격과 공포가 가득 담겨 있었다.

“감히, 너 따위가!”

이번에는 발을 들어 운선의 명치를 세게 걷어찼다. 아무런 방어도 하지 못한 운선은 기왓장처럼 튀어 날아가 대청 대들보에 등을 크게 부딪쳤다.

“자기 스승보다 머리는 좀 쓴다고 하였더니, 결국 그릇은 똑같구나. 그 스승의 그 제자야. 배은망덕하게 품어준 은혜도 모르고 가증스럽게…….”

내장에 강한 충격을 받은 운선이 바닥에 잔뜩 피를 토해냈다. 단전 아래 눌러놨던 기혈이 다시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객잔의 소녀에게 치료를 받은 일이 다 허사가 되었다.

“히히히”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운선이 갑자기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기괴한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소리는 점차 커져 나중에는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끄러워졌다.

“이게 미쳤나?”

물색없이 덤벼들던 아까와는 또 다른 의미로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형진은 그의 반응에 소름이 끼치는 한편, 혹여 밖에서 사람들이 몰려올까 전전긍긍했다. 그의 사부는 이미 이성을 잃은 것 같으니 자신이 추후 상황을 수습해야 할 듯싶었다.

“너로구나.”

한참을 끅끅거리던 운선은 드디어 고개를 들어 조양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두 눈에 그렁그렁 맺혔던 눈물이 주르륵 턱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감히……. 감히…….”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사 년 전 그날, 전의를 상실한 듯한 스승에게 벼락같이 일 장을 날리던 청의인. 흑접쌍살을 꼬드겨 결국, 스승과 사형을 살해하게 만든 배후.

얼굴은 볼 수 없었으나 운선은 그의 목소리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동안 수없이 들었던 조양의 목소리와는 음색도 억양도 완전히 달랐다. 그의 본성이 그대로 묻어난 가식 없는 목소리를 오늘에야 제대로 들은 셈이었다.

“운선아, 운선아……. 참으로 어리석구나. 바로 눈앞에 원수를 두고도 그리 헤맸구나.”

운선은 실성한 사람처럼 두 주먹으로 바닥을 마구 두드리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의 처절한 외침은 이제 웃음소리인지 울음소리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

무림대회가 끝난 지 한참이 지났다. 그런데도 유이정의 죽음 때문에 눈물을 글썽이는 운선을 바라보며 주운은 짜증이 솟구쳤다.

“생전 처음 본 이의 죽음이 뭐 그리 슬프다고 아직도 질질 짜는 것이냐?”

한참을 대답 없이 있던 그는 그제야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상황이 마치 저인 것 같아 그렇습니다.”

“불쌍하기로 따지면 너를 따라갈 자가 없으니 헛소리 그만해라. 그는 실력을 과신했거나 꼼수가 통하지 않아 죽은 것이다. 어디서 동병상련을 느낀 지 모르겠구나.”

다른 사람 일에 늘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살아온 그녀는 운선의 태도가 퍽 답답했다. 더 이상 위로해주는 것도 귀찮아진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했다.

운선은 주운의 팔을 잡아 세우더니 고개를 크게 가로저었다.

“꼼수를 부리려다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부능파 선배를 일부러 선택하였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모르는 그와의 은원(恩怨)이 있었겠지요. 애초에 질 것을 알면서 나선 것입니다.”

“흥, 맹인인 그가 어찌 부선배를 찍었단 말이냐?”

주운은 기가 막혀 콧방귀를 크게 꼈다. 세상 맹한 소리를 하는 운선이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더 못 들어주겠다며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리더니 방안에 그만 덩그러니 남겨두고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 버렸다.

“목소리……. 그는 목소리로 알아챈 것입니다.”

주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서 운선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알 수 있었다. 딱 한 마디였으나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목소리였다.

“감히!”

딱 그 한 단어만 들을 수 있다면 그는 단번에 스승님의 원수를 알아볼 수 있었다.

***

*** 청출어람(靑出於藍):

쪽에서 뽑아낸 푸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는 뜻으로, 제자나 후배가 스승이나 선배보다 나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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